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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광복군 그리고 국군으로… 한평생 조국 위해 싸우다

기사입력 2021. 05. 11   16:57 입력 2021. 05. 11   17:0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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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 최초의 장군 임관자 김홍일 장군

일제 탄압 속 중국으로 망명…1921년 中 육군군관학교 졸업
중·러 오가며 독립운동…김구 요청에 윤봉길 의사 폭탄 제작도
국민혁명군 참모장으로 중일전쟁 대활약…육군중장까지 진급
수만 병력 지휘 경험으로 6·25 한강·낙동강 방어전에 큰 기여


대한민국 국군은 100년의 전쟁역사를 품고 있다. 대한민국이란 국호는 1919년 4월 11일 상해 임시정부에 의해 지어진 뒤 1948년 정식 정부 수립 후에도 계승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20년 만주 일대의 독립군을 산하로 편입해 일본과 독립전쟁을 벌였다. 100년이 넘는 전쟁역사의 출발점이다. 이에 국방저널(국방일보)은 올해부터 지난 100년간 나라를 위해 앞장서서 싸운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전쟁영웅을 재조명하고자 한다. 5월호의 주인공은 독립군과 광복군 출신으로 국군 최초의 장군이 돼 6·25 전쟁 개전 초 패잔병인 국군을 추슬러 한강방어전을 전개, 북한군을 저지하고 훗날 반격의 발판을 마련한 김홍일 장군이다. 글=정호영/사진=국방일보 DB

김홍일(오른쪽)이 윤봉길에게 제공한 폭탄 제조와 교섭을 맡은 중국인 왕백수(왼쪽),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와 함께 찍은 사진.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으로 이어지는 100년의 대한민국 전쟁역사에서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의 일원이 돼 일본과 북한을 상대로 전쟁을 치른 군인은 과연 얼마나 될까? 있다면 몇 명이나 되고 또 누구인가? 기자가 오래전부터 가슴에 품었던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그동안 쉽게 찾지 못했던 것은 항일무장독립운동사와 6·25전쟁 역사가 서로 단절된 채 따로 연구됐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난 2018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펴낸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이라는 공식 간행물이 나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이제는 질문에 대한 답을 내릴 수 있다. 기자는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김홍일 장군이 유일무이한 군인이라고 확신한다. 광복군 출신으로 국군이 된 군인은 여럿 있다. 또 독립군과 광복군 출신으로 1945년 해방이 된 후 미 군정 소속의 국방조직에 참여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창설된 국군의 일원이 돼 직접 6·25전쟁을 치른 독립군과 광복군 출신의 군인은 오직 김홍일 장군뿐이다.

김홍일 장군은 ‘오성장군’으로 불리기도 한다. 중국군 중장(우리 군 소장에 해당) 출신이며 대한민국 국군의 중장으로 제대했기 때문에 붙여진 별칭이다. 광복군 참모장 시절의 계급까지 따지면 칠성이나 팔성 장군이기도 하다. 김홍일 장군은 또 중국군 고위 간부 시절 이봉창 열사의 수류탄과 윤봉길 의사의 도시락 폭탄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지원하기도 했다.

김홍일 장군은 1948년 12월 10일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귀국과 함께 대한민국 육군 준장으로 임관됐다. 대한민국 국군 역사상 최초의 장군 임관자였다. 육군사관학교 교장 시절인 1949년 3월에는 소장으로 진급했다. 역시 국군 역사상 최초 사례다.

김홍일 장군은 무엇보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무기력하게 무너진 국군 패잔병을 추슬러 한강방어선을 구축, 북한군의 공세를 6일간 저지했다. 지연작전의 개념이 없던 국군에게 지연작전을 시행한, 대부대 지휘경험을 가진 국군 유일의 지휘관이었다. 만약 김홍일 장군이 없었다면 서울함락 이후의 방어와 다부동 전투를 비롯한 낙동강 일대에서의 방어전, 그리고 인천상륙작전 등의 반격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는 단순히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으로 이어지는 정통성의 산증인이라는 차원을 넘어 풍전등화 대한민국을 침략자로부터 구해낸 위대한 전쟁영웅이었다.

일찍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중국 대륙에서 일본군과 싸운 뒤 해방된 조국 땅에서 다시 침략자인 북한군과 맞서며 한평생 군인으로서 본분을 다한 김홍일 장군을 연중기획인 ‘대한민국의 전쟁영웅’에서 재조명한다.


김홍일은 1898년 9월 23일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났다. 그는 구한말 일제의 탄압 속에서 평안북도 정주 오산학교에서 남강 이승훈과 고당 조만식 문하에서 수학했다. 이후 오산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중 조국의 독립투쟁을 위한 웅지를 품고 중국으로 망명했다.

김홍일은 1921년 중국 귀주의 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국민혁명군 소위로 임관했다. 이후 독립운동에 전념하기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갔다. 하지만 임시정부 지도부의 파벌과 분열에 염증을 느끼고 적극적인 무장투쟁을 위해 러시아로 떠났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자유시 참변 이후 만주의 독립군이 붕괴된 가운데 어렵게나마 독립군의 무장투쟁 열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한국 의용군사령관이 돼 러시아 백군 및 일본군과 싸우다가 적군(러시아 공산당 군대)에 이용당하고 있다고 생각해 약 3년 만에 중국으로 되돌아 왔다. 김홍일은 이후 중국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에 투신해 1926년 중국 국민혁명군 동로군 참모로서 북벌전쟁에 참가했다.

1921년 자유시 참변으로 조직이 붕괴된 임시정부 계열 한인 독립군의 선택지는 별로 없었다. 소수의 인원으로 홀로서기를 하든지 아니면 중국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혁명군에 속하거나 러시아나 중국의 공산당 군대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나마 장제스의 국민당은 임시정부와 상호 우호적인 관계였지만 러시아나 중국 공산당과는 그렇지 못했다. 임시정부의 독립투쟁역사에서 공산주의자는 늘 갈등과 반목의 불씨였다.

김홍일은 중국의 명문 귀주군관학교 출신인 탓에 자연스럽게 국민혁명군에 들어가 연대장, 군단 및 집단군 참모장, 사단장 등을 역임하며 군인으로서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특히 193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인 백범 김구의 요청으로 폭탄을 제작해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지원한 것은 그가 국민혁명군 상하이 군수공장 고위간부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왼손에 폭탄, 오른손에 권총을 들고 태극기 앞에서 절명사를 가슴에 붙이고 사진을 찍은 윤봉길 의사.

김홍일의 군 경력에서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국민혁명군으로 활동하던 때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벌어지자 국민혁명군 중앙부처 참모로 재직하던 김홍일은 상부에 참전을 요구했다. 그리고 1938년 일본군이 중국 우한으로 진격해올 즈음 국민혁명군 제102사단의 참모장으로 부임했다.

당시 일본군은 중국의 교통과 산업 중심지였던 우한을 점령하고 중국을 항복시키고자 총 40만의 병력을 끌어모아 총력전을 펼쳤다. 이때 김홍일의 102사단은 중국군 9전구 소속 제4군단 휘하에서 전투에 참가했다. 흔히 만가령(완자링) 전투로 불리는 이 전투에서 김홍일은 2개 연대 6개 대대를 배속받아 사단장 대신 직접 전투를 지휘했다.

당시 김홍일의 102사단과 만가령에서 대치한 일본군 106사단은 주요 고지마다 기관총 진지를 구축해 중국군의 공격을 완강히 저지했다. 이에 김홍일은 휘하 연대의 81㎜ 박격포 16문을 한곳에 모두 끌어모은 뒤 적 기관총 진지에서 사격할 때 위치를 파악해 일제히 포격을 가하며 보병공격을 벌였다. 이렇게 적 기관총 진지를 하나하나 집중적으로 공략함으로써 적의 방어선은 완전히 무너지게 됐다.

이로 인해 일본군 106사단은 수많은 장비와 1000 필에 달하는 군마, 심지어 파기하지 못한 기밀문서마저 황급히 버리고 퇴각하는 참패를 당했다. 이 전투가 끝난 10월 10일은 중화민국의 국경절인 쌍십절이었기에 중국 전역은 환호로 들끓었다. 중국 최고 지도자인 장제스도 직접 102사단 사령부에 전화를 걸어 승전을 축하할 정도였다. 김홍일은 이때부터 중국군의 명장이자 영웅으로 명성을 떨쳤다. 김홍일은 이어 1939년 5월 국민혁명군 육군 소장으로 진급한 뒤 1941년 샹가오 회전(상고회전·上高會戰)에 참전해 성공적인 지연전으로 일본군의 공세를 저지하는 등 대활약을 펼쳤다.

중국군 육군 중장까지 진급한 김홍일은 1945년 잠시 임시정부의 광복군 참모장이 됐다가 뒤늦게 조국의 부름을 받았다. 1948년 12월 10일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육군 준장으로 임관했다. 창군 최초 장군 임관자인 김홍일은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 임명된 뒤 1949년 3월 육군 소장으로 진급(국군 최초)했다. 하지만 1950년 6월 10일에는 뜻밖에도 한직인 육군참모학교 교장으로 발령됐다. 6·25전쟁이 발발하기 불과 보름 전의 일이었다.

국립서울현충원 임정묘역의 김홍일 장군 묘소.   이헌구 기자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했다. 개전 초기 김홍일은 국방부에서 개최된 군원로회의에서 서울 포기 및 한강 이남에서 방어선 구축안을 제시했지만 거부당했다. 신성모 국방장관을 비롯해 전쟁경험이 없는 무능한 군 지휘부는 상황을 오판하고 있었다. 김홍일은 답답했지만 그에게 주어진 직책이 따로 없었기에 실제 병력이 없는 참모학교로 내려가 있어야만 했다.

이후 전황은 점점 심각해졌다. 결국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의 잘못된 명령으로 인해 국군 5개 사단이 서울에서 철수하기 전에 한강교를 폭파 시키고 말았다. 이로써 국군의 5개 사단은 한강 이북에 고립됐고, 이로 인해 대부분의 군 병력은 뿔뿔이 흩어지게 됐다.

6월 28일 새벽 미아리 방어선이 무너지고 나서야 채병덕 참모총장은 뒤늦게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김홍일 소장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김홍일 소장은 이때부터 일분일초를 쪼개 흩어진 병력을 수습하며 한강 이남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김홍일 소장은 제7사단장 유재흥 준장을 혼성제7사단장, 수도사단장 이종찬 대령을 혼성수도사단장, 제2사단장 임선하 대령을 혼성제2사단장에 임명하고 안양천에서 광진교에 이르는 한강 남안 24㎞ 정면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30일 새벽부터 북한군은 한강 도하를 시도했다. 하지만 완강한 국군의 저항에 실패했다. 북한군은 도하 첫날에는 노량진 부근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점차 여의도와 영등포까지 전선을 확대했지만 번번이 국군의 방어전에 막혀 꼼짝없이 묶이고 말았다.

이렇듯 김홍일 장군의 지휘하에 치러진 한강방어선전투는 전쟁 초기 북한군의 일방적 기세를 꺾음으로써 이후 반격의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국군 지휘관으로 유일하게 수만 병력을 지휘해 본 경험이 있는 김홍일 장군의 탁월한 지연전은 1주일간이나 한강 방어선을 지탱함으로써 수원 이북에서 국군의 주력을 섬멸하려던 북한군의 작전계획을 무너뜨렸다.

한강 방어전은 미 지상군의 전개를 보장함은 물론 국군과 미군이 연합작전을 펼쳐 지연작전을 전개할 수 있도록 상황을 조성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육군은 병력을 수습하고 편제를 재편할 수 있었고, 시흥지구사령부는 곧바로 제1군단으로 개편됐다.

김홍일 장군은 7월 5일부로 제1군단장이 돼 순차적으로 방어전을 펼치며 진천-음성-청주 축선에서 성공적인 지연전을 수행했다. 또한 낙동강 방어작전에서 기계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등 제1군단장으로서 반격작전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군문을 나선 김홍일 장군은 이후 정계에 뛰어들어 주로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광복회장 보직을 끝으로 1980년 8월 8일 향년 83세로 서거했다.

평소 “부하를 사랑하고 청렴결백하라”를 강조하던 김홍일 장군은 한평생 중국 대륙에서 일본군과 싸우고 6·25 전쟁 시에는 북한군으로부터 조국을 구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전쟁영웅이다.



정호영 기자 < fighter7@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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