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국군 장병들 김치·라면 먹고 싶다고 캠프 찾기도

입력 2021. 02. 25   16:05
업데이트 2021. 02. 25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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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전우애에는 국적이 없었다-이종봉 예비역 중령의 회고

일과 후 한국군 캠프 종종 방문
보급품 넉넉지 않았지만 한식 외교
자국 음식 가져와 함께 나눠 먹기도
열악한 환경에도 사명과 의지 빛난 시간
도로 공사현장에서 상록수부대원들과 유엔임무단 사령부 참모들이 공사 계획에 대해 토의하고 있다. 
 사진 제공=정장수 당시 상록수부대 운영과장
도로 공사현장에서 상록수부대원들과 유엔임무단 사령부 참모들이 공사 계획에 대해 토의하고 있다. 사진 제공=정장수 당시 상록수부대 운영과장

1993년 소말리아는 폭력과 갈등으로 혼란스러운 공간이었지만 유엔의 깃발 아래 뭉친 각국 장병들은 서로를 격려하며 검은 땅의 평화와 재건에 힘을 모았다. 업무에서는 의사소통에 특히 신경 쓰며 협업과 공유를 이뤘고, 일과 후에는 교류를 이어가며 전우애를 다졌다. 피부색과 생김새는 달랐지만, 모두 유엔의 임무를 수행하는 평화유지군이었다.

이종봉 소령(당시 계급, 예비역 육군중령)에게도 낯선 환경은 적응을 어렵게 만들었다. 날씨, 음식, 언어 등 어느 것 하나 만만치 않은 생활이었다. 게다가 처음 사령부에 도착했을 당시 사령부 내 한국인이라고는 연락장교로 먼저 와 있던 김광우 소령이 유일했다. 타국 군 장병들과의 교류는 업무와 생활 모든 면에서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타국 군 장병들은 이 소령과 한국에 큰 관심을 보였다. 독일·이탈리아·인도·파키스탄 등 다양한 국가에서 온 장병들이 이 소령을 찾았다. 특히 한국에서의 근무 경험이 있는 미군이나 아내가 한국인인 장병들은 이 소령을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친구처럼 대했다.

“아무래도 과거 주한미군으로 근무했던 장병들이 반가운 마음에 종종 한국군 캠프를 찾아오곤 했어요. 그러면서 김치·고추장·라면 같은 우리 음식을 먹어보고 싶다고 하는데 곤혹스럽기도 했지요.”

김치와 고추장 같은 부식은 이 소령에게도 늘 필요한 식자재였다. 수량이 넉넉하지도 않았다.

“사령부 내에 공용 식당이 있어서 식사할 수 있었지만 열악한 상황이었던 만큼 음식 상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이 소령을 비롯한 우리 군은 기본 부식을 상록수부대에서 조달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저녁과 휴일에는 간단한 조리도구를 이용해 직접 만들어 먹기도 했다. 보급품 하나가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미군의 경우 낮에는 콜드푸드라고 불리는 식사를 하는데 간단하게 먹을 수밖에 없는 음식이었고, 저녁에나 겨우 따뜻한 음식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일교차가 큰 날씨로 인해 해가 지면 기온이 서늘해지면서 따뜻한 음식이 절로 생각나게 되지요. 김치와 라면이 얼마나 맛있었겠습니까?”

열악한 환경에서 근무하는 탓에 서로 격려하고 챙기려는 노력은 국적을 가리지 않았다. 타국 군 장병들도 자국의 음식을 가져와 이 소령 등과 함께 나눴다. 또 음식을 즐기면서는 소말리아의 평화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다. 김치와 라면으로 쌓은 전우애였다. 자리는 누추할지언정 그곳에서 모두의 사명과 의지는 밝게 빛났다.

한 번은 미군 장병들과 바닷가재 요리를 먹은 적이 있었다. 그 당시에도 바닷가재는 지금처럼 값비싼 식자재였다. 소말리아는 아프리카 대륙 동북부 인도양에 접해 있었고, 모가디슈도 항구도시였다. 어느 날 일정 지역을 정찰하던 미군 장병들이 어촌마을 주민으로부터 바닷가재를 공짜로 얻어 한국군 캠프로 가져왔다. 소말리아 사람들은 갑각류를 먹지 않았기 때문인데 미군 장병들은 바닷가재를 받아들자 평소 음식을 나누던 이 소령을 먼저 떠올린 것이었다.

미군 장병들이 가져온 바닷가재는 훌륭한 요리가 됐다. 대단한 부가재료나 소스가 있던 것도 아니었다. 단지 삶아 먹는 정도였지만 생사를 함께하는 전우들과 함께하는 식사는 그 자체로 충분히 풍성했다.

소말리아 상록수부대 1진 장병들이 2진과 교대를 마친 뒤 철수를 위해 모가디슈 공항에 집결해 있다. 
 사진 제공=이종봉 당시 유엔임무단 사령부 참모장교
소말리아 상록수부대 1진 장병들이 2진과 교대를 마친 뒤 철수를 위해 모가디슈 공항에 집결해 있다. 사진 제공=이종봉 당시 유엔임무단 사령부 참모장교


“이 같은 일이 있고 나서 같은 마을을 지나갈 일이 있던 미군 장병들이 다시 한 번 바닷가재를 구하려고 했더니, 이번에는 돈을 달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간단히 값을 치렀는데, 이후 다음에 다시 갔을 때 가격을 더 높게 불렀다고 하더라고요. 수요와 공급의 시장원리가 작동된 재미있는 사건이었습니다.”

이 소령은 약 7개월의 임기를 마친 뒤 1994년 3월 귀국했다. 무사히 임무를 완수하고 귀국해 가족을 만난 일은 감사했지만, 소말리아 근무 당시 포탄 소음에 쉽게 노출된 이유로 한동안 큰 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귀국 후 국방부에서 근무했습니다. 어느 날 야근 중에 창밖에서 포탄 터지는 듯한 큰 소리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몸이 먼저 반응해 급히 움직였지요. 알고 봤더니 서울 시내에 큰 행사가 있어 불꽃놀이가 벌어지면서 나오는 폭죽 소리였습니다.”

이 소령은 소말리아를 생각할 때면 아쉬움이 먼저 든다. 여전히 소말리아 국민은 열악한 상황에 놓여 힘들고 어렵게 지내고 있기 때문이다. 30년여 전 수많은 국가의 장병들이 평화와 재건이라는 목적을 위해 흘렸던 피와 땀이 헛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또 그와 같은 우리 군의 평화유지 활동이 더욱 적극적으로 이어지기를 희망한다.

“우리나라 첫 유엔 평화유지활동(PKO) 참모장교로서 그곳에서의 활동은 영광이자 자부심이었습니다. 소말리아의 재건과 우리나라의 국위 선양에 일조했다는 점에서 상록수부대원들도 모두 같은 생각일 것입니다. 적극적인 PKO 활동이 계속 이어져 대한민국의 위상이 더욱 높아지기를 소망합니다.” 서현우 기자


서현우 기자 < lgiant61@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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