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집과 야만이 빚은 살상극

입력 2021. 02. 24   16:11
업데이트 2021. 02. 24   16:12
0 댓글
어리석은 명예의 대가 - 앨리스터 혼, 『베르? 전투: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소모전』
 
1916년 2월부터 10개월 끈 佛-獨 전투
보불전쟁 패한 프랑스군 명예회복 집착
독일군 “최대한 많이 죽인다” 잔혹 계획
 
佛 승리했지만 사상자 120만 명 넘어
단위면적당 사상 최다 사망 전투 오명

 

영국 역사가 앨리스터 혼의 연구서 『베르? 전투』(조행복 옮김, 교양인, 2020)
영국 역사가 앨리스터 혼의 연구서 『베르? 전투』(조행복 옮김, 교양인, 2020)

1871년 보불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는 추락한 위신을 회복하고자 절치부심했다. 보불전쟁 이후 프랑스 군대에는 참모부 국장 드 그랑메종 대령이 주창한 ‘드 그랑메종(죽을 때까지 공격한다)’의 신조가 확산되었다. 프랑스는 다시 독일과 전쟁이 시작되면 가용한 병력을 총동원해 보불전쟁 때 빼앗긴 알자스로렌 지역을 되찾고 곧바로 라인강으로 진격하는 것을 골자로 한 ‘17계획’을 수립했다. 독일군 상급대장 알프레드 폰 슐리펜(1833~1913)은 프랑스군의 17계획을 잘 알고 있었다. 슐리펜은 프랑스군의 주력이 알자스로렌 지역으로 몰린 사이 벨기에를 거쳐 신속하게 파리를 점령해 5주 안에 프랑스를 꺾고 곧바로 동부전선의 러시아를 친다는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 여름 마른강에서 프랑스군이 독일군을 저지하면서 전선은 고착되었다.

소모전이 길어지자 독일군 지휘부는 두 가지 작전을 시행했다. 하나는 잠수함 U보트로 영국에 접근하는 수송선을 공격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프랑스군의 공격 정신을 역이용하여 프랑스군을 섬멸하는 것이었다. 독일군의 참모총장 에리히 폰 팔켄하인(1863~1922)은 프랑스 북부 소도시 베르?을 선택했다. 독일군은 전선이 뚫릴 위기에 처한 프랑스군의 주력이 방어선에 몰리면 포병 화력을 집중해 프랑스군에 감당하기 어려운 인명 손실을 안겨주고자 했다. 특정 지역의 점령보다 ‘전쟁을 포기할 정도의 인명 살상’을 주된 목표로 정한 이 작전명은 ‘심판’이었다. 살상 자체를 목적으로 한 살벌한 계획 아래 1916년 2월부터 시작된 베르? 전투는 무려 10개월을 끌었고, 인류 역사상 단위면적당 사망자 수가 가장 많은 전투라는 악명을 떨치게 되었다. 이 전투는 1차 세계대전의 양상을 완전히 바꾸었고, 프랑스와 독일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베르? 전투의 참혹한 현장. 필자 제공
베르? 전투의 참혹한 현장. 필자 제공

독일군은 대구경 장거리 곡사포 ‘베르타’를 대량으로 동원해 프랑스군 요새를 두들겼고, 첫 일제 포격에서만 프랑스군 수천 명이 사망했다. 최전방의 두오몽 요새와 보 요새가 점령되자 프랑스군은 요새를 되찾으려고 반격했고, 사상자가 속출했다. 애초에 요새 점령이나 도시 점령이 아닌 ‘최대의 인명 살상’을 목표로 했기에 양측은 교착된 상태에서 포병과 기관총을 이용해 살상을 거듭했다. 동서 양쪽에서 싸우던 독일군은 예비군이 충분치 않았기에 비율로 따지면 독일군이 입은 피해는 프랑스군과 거의 비슷한 수준에 달했다.

베르?의 살상극은 후퇴를 불명예로 여기는 프랑스군의 고집과 살상 자체를 목표로 삼은 독일군의 잔혹한 계획이 충돌한 결과였다. 만약 프랑스군이 베르?을 포기하고, 조금만 뒤로 이동했더라면, 베르? 후방의 숲에 방어선을 설치하고 개활지를 통과하는 독일군을 쉽게 격퇴했을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군 지휘관들은 베르?을 ‘조국을 지키려는 의지’의 표상으로 규정했다. 한 치의 땅도 빼앗기지 않는다는 원칙 아래 끊임없이 포격전과 보병 돌격이 이루어졌고, 베르? 전방의 요새와 언덕은 양 군의 시신으로 뒤덮였다.

프랑스군 사상자가 10만이 넘어선 2월 말, 프랑스군 방어 지휘관으로 필리프 페탱(1856~1951)이 부임했다. 페탱은 ‘드 그랑메종’의 신봉자가 아니었다. 그는 단순히 병력으로 밀어붙이는 소모전을 거부하고, 포병으로 적을 제압하면서 최전방의 보병을 계속 교체(노리아 제도)해 병사들의 피로를 줄였다. 이 전술은 엄청난 보급이 동반되어야 가능했다. 페탱의 참모 리샤르 소령은 수만 대의 차량을 징집했고, 식민지 세네갈인들과 베트남인들까지 운전병으로 동원했다. 이런 노력으로 2월 마지막 한 주 동안 군수품 2만5000톤이 수송되었고, 병력 19만 명이 베르?으로 충원되었다. 80㎞에 걸쳐 구축된 보급로를 오간 차량의 주행거리는 지구 둘레의 25배를 넘었다. 이 보급로는 ‘부아사크레(신성한 길)’로 명명되었고, 페탱은 ‘베르?의 구원자’로 칭송되었다.

그러나 프랑스군 지휘부는 페탱의 전술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페탱은 정치가들이나 상관에게 아첨하지 않았고, 프랑스군의 상징과 같았던 ‘드 그랑메종’을 어리석은 전술로 치부했다. 최고사령관 조프르 장군은 페탱을 교체하고자 했으나 병사들과 초급 지휘관들은 페탱을 굳건히 신뢰했다(훗날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자유프랑스군을 이끌었던 드골도 페탱을 존경하고 따랐던 초급장교 중 한 명이었다). 푸앵카레 대통령과 조프르는 페탱을 해임하는 대신 승진시켰다. 페탱에게 베르?까지 포함한 넓은 지역을 총괄하는 자리를 맡기고 베르? 전선의 지휘관으로 로베르 니벨(1856~1924)을 임명했다. 니벨은 탁월한 포병 지휘관이었지만 사상자 명부에 무감한 인물이었다. 니벨의 지휘 아래 프랑스군은 다시 요새 탈환을 위한 돌격에 나섰고, 양 군은 다시 엄청난 피를 흘렸다.

1916년 6월 동부전선에서 브루실로프 장군이 이끄는 러시아군의 반격이 시작되자 예비군이 바닥난 독일군은 수세에 몰렸다. 동시에 프랑스군의 요구로 영국군이 솜 강에서 공세를 시작했다. 솜 전투에서 영국군도 자국 역사상 가장 많은 사상자를 냈다. 양 전선의 압박으로 독일군은 12월, 요새에서 물러났고 베르?전투는 프랑스의 승리로 끝났다. 이 승리로 고위 지휘관들은 ‘프랑스의 명예’를 지켰다고 자축했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사상자는 양측 합쳐 70만이 넘었고, 솜 전투까지 포함하면 그 숫자는 120만을 넘었다. 연합군은 미국이 참전하기까지 절대 승리할 수 없는 상황에 내몰렸고, 병력의 한계에 도달한 독일군도 러시아가 혁명으로 이탈하기까지 공세를 취할 수 없게 되었다.

베르?에서 소모전에 지친 프랑스는 적을 초반에 저지할 궁극적인 요새를 구상하게 된다. 이것은 훗날 ‘마지노 요새’ 건설로 이어졌다. 반대로 독일은 베르?의 경험을 잊지 않고 효율적인 기갑부대를 운용하게 되었다. 이것은 단지 군사적인 결과일 뿐이다. 이 전투는 유럽의 한 세대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고, 강렬한 증오는 다음 세대까지 이어졌다. ‘베르?’은 어리석음, 낭비, 잔혹함의 대표적인 상징이 되었다. 현재 베르?에 조성된 묘지에서 양국의 지도자들은 매년 희생자들을 애도하며 평화를 기원하는 행사를 열고 있다.

<이정현 문학평론가>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0 댓글

오늘의 뉴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