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원 조명탄] 힘이 되는 말, 덕을 쌓는 말

입력 2021. 02. 18   16:07
업데이트 2021. 02. 18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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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원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장소원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내가 한국방송통신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하던 1990년대까지 상당수의 고교 졸업생은 대학에 진학할 수 없었다. 고등학교 졸업생 수보다 일반 대학교의 신입생 정원이 턱없이 적기도 했고,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는 것이 녹록지 않은 사람도 많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방송대는 등록금이 학기당 20만 원 정도여서 마음만 먹으면 큰 부담 없이 입학이 가능했기에 낮에는 직장에 다니며 돈을 벌어 등록금을 마련하고 밤 시간을 이용해서 공부를 하는 학생이 많았다.

코로나19로 인해 요즘은 전국의 학생들이 온라인 학습을 하지만 당시에는 라디오 강의나 카세트테이프에 녹음된 강의를 들으며 혼자 공부를 해야 했는데, 이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낮에는 직장생활을 하거나 집안일을 하고 밤에 잠을 줄여 졸린 눈을 비벼가며 식구들이 깰세라 이어폰을 꽂고 공부를 하려면 강한 의지가 필요했다.

그래서인지 큰 결심을 하고 방송대에 입학한 학생들이지만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는 비율이 무척 높았다. 그 사정을 알았기에 어려움을 극복하고 4년 혹은 6, 7년이나 10년 만에라도 졸업장을 받아드는 학생들을 볼 때면 가슴이 뭉클해지곤 했다.

당시 방송대 학생들은 한 학기에 사흘 정도 지역대학의 강의실에 나와 앉아서 출석수업을 듣곤 했는데 그때가 교수와 학생이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그 기회를 틈타 나는 방송대를 졸업한다는 것이 얼마나 값진 일인지, 전국의 졸업생들이 서울로 올라와 졸업가운을 입고 학사모를 쓰고 참석하는 졸업식이 얼마나 멋진 광경인지를 생생하게 들려주곤 했다.

학생들이 학업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이기도 했지만 방송대를 졸업하는 사람은 진실로 성실한 사람이고, 원하는 목표를 위해 고통을 참고 노력한 사람이라는 증명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어느 학기인가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방송대의 졸업식을 말로 그려 설명하면서 ‘희망을 잃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세요’라는 말로 수업을 마쳤는데 한 여학생이 내게로 다가와서는 ‘선생님, 손 한번만 잡아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별생각 없이 ‘내가 안아줄게’라고 말하며 그 학생을 덥석 품에 안았다가 놓아주고는 그 일을 잊어버렸다.

그런데 다음 주, 나는 편지지 7장을 작은 손글씨로 가득 채운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그 안의 내용인즉 자신은 너무나 대학공부가 하고 싶어서 직장을 다니며 방송대에 입학했는데 한 학기 한 학기가 너무 힘들어 공부를 그만두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했다. 그런데 출석수업이 있다고 해서 ‘그럼 그거나 한번 들어보고 그만두자’ 하고 학교에 왔는데 우연히 내 수업을 듣게 되었고, 내가 해준 말이 힘이 돼 포기하지 않고 공부를 계속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는 내용이었다.

그 편지를 받고는 나의 말 한마디가 한 사람의 삶을 바꾸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너무 기뻐 그 편지를 들고 다른 교수님의 연구실로 달려가 자랑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살아갈수록 다른 이에게 힘이 되는 말을 많이 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따뜻한 마음 한 조각으로 큰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남을 위로하는 말이 내게 더 큰 위로가 되고 남에게 상처를 주는 말이 내게 더 큰 상처로 돌아온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몇 마디의 말로 다른 사람에게 힘을 줄 수도 있고, 기쁘게 할 수도 있으니 이보다 더 보람되고 덕을 쌓는 일이 어디에 또 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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