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걷다가 글을 만난다… 30년의 사색

입력 2020. 11. 30   16:46
업데이트 2020. 11. 30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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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광화문 글판 

 
1991년 보험사 빌딩 외벽에 캠페인 문구 적힌 웅장한 간판 첫 등장
계절마다 감성적인 문장·시적 표현으로 시민에 희망·응원 메시지
브랜드 이미지 홍보 넘어 경영철학·가치 인지시켜 기업 호감도 확산



거리에서 만나는 한 줄의 글이 걸어가는 행인들의 마음을 달래기도 한다. 지난 세월 희망과 위로를 전하며 시민들에게 호평받은 광화문 글판이 어느새 30주년을 맞았다. 광화문 글판은 시민들에게 감동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공공 언어가 아닌, 브랜드 이미지 형성에 기여하는 기업 커뮤니케이션의 기능을 맡아 왔다.

교보생명이 시민 공모로 선정한 ‘광화문 글판 30년 기념’ 편(2020)의 내용은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풍경”이다. 이 글판은 시인과 촌장의 노래 ‘풍경’에서 가져왔다. 1980년대에 활동했던 시인과 촌장은 서정적인 노래로 사랑받았던 포크 밴드다.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오라는 소망을 담은 노랫말은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되돌아보게 한다. 어느덧 정상처럼 돼버린 비정상의 일상은 물론, 한때의 판단 착오로 놓쳐버린 사랑을 되찾고 싶은 때늦은 후회마저도 말이다. 그동안 인기를 끌었던 광화문 글판을 살펴보자.

아이돌그룹 방탄소년단의 노래 ‘런’을 빌려 응원 메시지를 담은 광화문글판 특별판이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에 걸려 있다. 연합뉴스
아이돌그룹 방탄소년단의 노래 ‘런’을 빌려 응원 메시지를 담은 광화문글판 특별판이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에 걸려 있다. 연합뉴스

문정희 시인의 ‘겨울사랑’에서 발췌한 2009년 겨울편(위).  필자 제공
문정희 시인의 ‘겨울사랑’에서 발췌한 2009년 겨울편(위). 필자 제공

나태주 시인의 ‘들꽃’을 인용한 2012년 봄편  광고 글판.   필자 제공
나태주 시인의 ‘들꽃’을 인용한 2012년 봄편 광고 글판. 필자 제공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며 피었나니”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에서, 2004년 봄 게시)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에서, 2009년 가을 게시)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문정희 시인의 ‘겨울사랑’에서, 2009년 겨울)

“지금 네 곁에 있는 사람,/ 네가 자주 가는 곳, 네가 읽는 책들이/ 너를 말해 준다” (괴테의 명언 변용, 2010년 가을)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정현종의 ‘방문객’에서, 2011년 여름)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나태주 시인의 ‘들꽃’에서, 2012년 봄)

“다시 런 런 런 넘어져도 괜찮아. 또 런 런 런 좀 다쳐도 괜찮아.” (방탄소년단의 노래 ‘RUN’에서, 2020 여름1).

“때론 지치고 아파도/ 괜찮아 니 곁이니까// 너와 나 함께라면 웃을 수 있으니까” (BTS의 노래 ‘A Supplementary Story: You Never Walk Alone’에서, 2020 여름2)

1991년, 서울 광화문의 교보빌딩 건물 외벽(가로 20m×세로 8m)에 웅장한 글판이 등장했다. “우리 모두 함께 뭉쳐 경제 활력 다시 찾자”라는 ‘경제 활력’ 편(1991년 1월)이 처음 나왔을 때만 해도 이 캠페인이 30년 이상 계속될 것이라고 누구도 예상치 못했으리라. 초기에는 명언이나 격언에 경제 개념을 담아 표어 스타일로 전달하는 내용이 많았다. 외환위기 때부터는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가 주로 등장했다. 1998년 봄에 고은 시인의 ‘낯선 곳’이 등장하면서부터 시어(詩語) 위주로 내걸렸다. 글판의 교체 빈도는 초창기에 연 1~3회 정도 부정기적으로 바꾸다가, 2003년부터는 계절의 변화에 맞춰 연 4회씩 정기적으로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시적 표현이 인상적인 광화문 글판은 순수문학의 성격을 띠지만, 실은 교보생명의 브랜드 이미지 관리에 이바지하고 있다. 조금 전문적인 용어를 써보면, 광화문 글판은 기업의 공유가치창출(CSV·Creating Shared Value)에 기여하는 기업 커뮤니케이션 활동이다. 공유가치창출이란 사회적인 요구와 문제를 해결하며 경제적 성과를 창출하려는 장기적 관점의 기업 활동이다. 공유가치를 창출하려면 먼저 기업의 경영철학과 비전을 정립해 알려야 하는데, 광화문 글판은 교보생명의 경영철학과 가치를 소비자들에게 굳이 설명하지 않고도 인지시키는 역할을 했다.

교보생명의 경영철학과 가치를 알리려고 텔레비전 광고를 했더라면 아마도 천문학적인 광고비가 들어갔을 터. 그렇게 하지 않고서도 기업이 좋은 평판을 유지하고 있으니, 비용 대비 효과를 중시하는 광고 효과성 측면에서도 광화문 글판의 가성비가 높다고 평가할 수 있다. 30주년을 맞이해 교보생명에서 글판의 역대 문안을 엮어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2020)를 출간한 것도 기업에 대한 호감도를 확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옥외광고가 디지털 사이니지[디지털 정보 디스플레이(DID·digital information display)를 이용한 옥외광고]로 진화하면서 마치 동영상 광고처럼 휘황찬란해지는 추세와는 달리 글판은 전통적인 간판 스타일의 틀을 유지하고 있다. 디지털 사이니지가 청량음료를 마시는 기분이라면, 광화문 글판은 숭늉을 마시는 것 같다. 더욱이 글판은 문학작품에서 내용을 변용해 새 의미를 창출하고 우리말의 깊은 맛을 살려내는 것은 물론 한글 서체의 품격을 높이고 있다. 따라서 광화문 글판은 브랜드를 알리기 위한 보통의 옥외광고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수준 높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희망과 응원의 메시지를 25자 안팎에서 보여주는 광화문 글판은 일상에 지친 사람들에게 사색의 창(窓)이라는 여유를 잠시나마 갖게 한다.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도 기꺼이 연탄 한 장이 되는 것”(안도현 시인의 ‘연탄 한 장’에서, 2006년 12월)이 아닐까? 세상 사람들 모두가 저마다의 삶을 한 줄의 감동적인 시처럼 노래하는 세상이 바로 광화문 글판의 지향점인 듯하다. 글판의 메시지가 지나온 30년을 넘어 다가올 30년 동안에도, 저마다의 삶에 힘이 되는 시 하나, 노래 하나로 다가가길 바란다.

<김병희 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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