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 개혁 단행하고 금관가야 합병 영토 확장

입력 2020. 10. 14   17:06
업데이트 2020. 10. 14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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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신라 법흥왕 ① 

 
병부 설치 군사조직 일원화
상대등 임명 재상 정치 열어
가야 혼란에 김해평야 장악
불교 공인…이념 기초 닦아
황제 칭하고 건원 연호 선포

경북 경주시 선도산에 있는 신라 법흥왕릉. 가야를 합병해 제국 신라를 건설한 영명한 군주다.  필자 제공
경북 경주시 선도산에 있는 신라 법흥왕릉. 가야를 합병해 제국 신라를 건설한 영명한 군주다. 필자 제공

법흥왕은 고구려·백제·가야의 국내 사정과 외교 관계 정보를 신속히 입수해 능동적으로 대처했다. 변방국 침공에 전쟁으로 대응하기보다 유연성 있는 외교술로 사전 방비함을 국익의 우선 과제로 삼았다. 왕 2년(515) 왜에 사신을 은밀히 파송해 백제가 왜와의 군사동맹 체결을 위해 보낸 문귀(생몰년 미상) 장군 파면을 요청해 성사시켰다. 백제가 오경(五經) 박사 고안무(낙랑계통인·생몰년 미상)를 다시 파견해 왜를 회유했지만 왜는 불응했다. 왕은 호전적인 백제 무령왕(25대·재위 501~523)에게 우호 사절을 보내 충돌 위기를 무마했다.

이즈음 한반도 국제 정세는 매우 복잡다단했다. 4국(신라·고구려·백제·가야)은 자국 내 정정 불안과 국가 이익에 따라 동맹·적대 관계가 수시로 표변했다. 중원(중국) 제국(諸國)들도 4국 사이 충성 경쟁을 유발해 분열을 조장했고, 이 간극을 파고든 왜의 등거리 외교는 4국 간 긴장을 더욱 가중시켰다. 치열한 외교전의 패배로 왕이 교체되는가 하면, 사소한 과잉 대응이 전쟁 발발의 단초가 되기도 했다. 고구려는 중원 국가에 매달 사신을 파송해 지지를 요청했고 백제도 자주 보냈다.

법흥왕은 내치에 주력하며 조정 개혁을 단행했다. 왕 4년(517) 병부를 새로 설치해 군사 행정 체계를 일원화했다. 사병 형태로 군권을 장악 중이던 장군과 지방 군주들을 중앙 관부로 편입시켜 왕권 도전 세력을 사전 차단했다. 왕 7년(520)에는 율령 반포와 대신들의 공복 색깔을 구분해 조정 내 위계를 확립했다.

신라 왕은 국사를 논의하는 조정 신료 회의와 왕실 현안을 숙의하는 귀족 회의를 주재해 왔다. 귀족 회의는 왕실 혼사·왕위 승계자 문제 등을 협의하며 왕과 첨예하게 대립했다. 법흥왕은 국공 시절부터 귀족 회의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왕 8년(521) 상대등(재상·조선시대 영의정)을 임명해 귀족회의를 주관토록 했다. 왕 대신 귀족들을 통제할 새 관직을 설관해 왕의 권위를 제고하고 신라 최초로 재상 정치 시대를 열었다.

한반도 각국 왕실에서는 금상의 잦은 피살로 왕권 교체가 빈삭(頻數)했다. 고구려는 조정 대신들 간 권력 싸움으로 3대 왕이 유명을 달리했다. 22대 안장왕에 이어 23대 안원왕(재위 531~545)이 즉위했으나 왕권 유지가 위태로웠다. 백제에서도 24대 동성왕이 심복 백가(생몰년 미상)에게 살해당하고 25대 무령왕이 등극했다. 무령왕은 웅진(공주) 백제시대 전성기를 구가했으나 뒤를 이은 26대 성왕(재위 523~554)이 옛 영토를 거의 빼앗겼다. 성왕은 538년 사비(부여)로 천도하며 국호를 남부여로 바꾸었다.

법흥왕은 고구려·백제의 정국 추이를 면밀히 탐색하며 임박해진 가야 연맹 붕괴에 대비했다. 백제와 가야는 백제의 임나가야(경남 함안) 강점으로 원수지간이었다. 왕 8년(521) 가야의 9대 겸지왕이 죽고 10대 구형왕(재위 521~532)이 즉위했다. 구형왕은 가야(금관가야)의 국운이 쇠했음을 감지하고 신라에 의탁키로 마음을 굳혔다. 즉위 이듬해(522) 법흥왕에게 혼인 동맹을 요청하자 왕이 이에 응해 이찬 비조부(생몰년 미상) 누이동생을 보냈다.
법흥왕릉 앞의 금천교.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경계다.  필자 제공
법흥왕릉 앞의 금천교.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경계다. 필자 제공

가야 위기가 신라에는 기회였다. 법흥왕은 철령(강원도 회양군 하북면과 함경남도 안변군 신고산면 경계에 있는 고개·높이 685m) 이남까지 북방 영토를 확장했고 남서쪽으로는 가야를 압박했다. 왕 11년(524) 구형왕이 자진해 법흥왕 상면을 앙청했다. 양국 왕은 상견 석상에서 가야의 투항 조건을 협의했다. 이후 구형왕은 백제·왜와는 거리를 두며 신라에는 우호적이고 관대했다. 가야 백성들은 구형왕 내심을 금세 알아챘다.

법흥왕 19년(532) 구형왕이 세 왕자(김노종·김무덕·김무력)와 귀족들을 대동하고 신라에 항복했다. 이 중 김무력이 신라 삼국 통일의 주역 김유신(595~673) 장군의 할아버지다. 신라의 금관가야 합병은 나머지 가야 소국 정복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구형왕 항복 후 왕의 일족은 신라 귀족으로 편입됐고 금관가야를 식읍으로 받아 호강을 누렸다. 반면 금관가야 백성들은 신라 천민으로 전락해 온갖 수모와 차별 속에 구차한 목숨을 연명했다.

신라는 금관가야를 합병하며 낙동강 하류와 남해안 곡창인 김해평야를 장악했다. 그러나 가야 연맹국 모두가 멸망한 건 아니었다. 경북 고령지역을 중심 삼은 대가야가 후기가야(5세기~562) 종주국을 자처하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법흥왕은 대가야 왕실과의 혼인 동맹으로 적대 관계를 무력화했다. 대가야 귀족들에게는 신라 관직을 수여해 신라 조정과 동질감을 증대했다. 24대 진흥왕 23년(562) 대가야도 신라에 항복했다. 신라는 경상남·북도와 강원도 전역을 아우르며 고구려와 대등한 제국을 건설했다.

법흥왕은 한반도 각국의 중원 외교가 북조 5국(북위·동위·북제·서위·북주) 중 북위에 치중돼 있음에 주목하고 국제 정세를 살폈다. 왕은 북조 대신 남조 4국(송·제·양·진) 중 양(梁)의 흥성을 예견하고 왕 21년(534)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양과의 통교가 신라의 역사·문화 발전에 끼친 영향은 심대하다. 양나라 승려 원표(생몰년 미상)가 신라에 입국하며 신라 왕족들이 그의 설법을 듣고 불교를 수용했다. 귀족들이 불교를 반대하자 법흥왕 근신(近臣) 박이차돈(506~527)이 순교해 불교가 공인되었다.

가야를 병합해 영토를 확장하고 국력을 신장시킨 법흥왕은 자신감을 얻었다. 왕 23년(536) 스스로 황제를 칭하고 건원(建元)이란 연호를 선포했다. 독자적 연호 사용은 중원 국가와 동격의 나라임을 선언한 자주의식 발로라는 점에서 획기적이다. 중원 국가들은 자국 천자들만 연호를 쓰고 번국 왕에겐 사용을 금지했다. 법흥왕이 칭제건원한 뒤 신라 중기 이후 대부분의 왕이 자기 연호를 지어 사용했다.

불교를 공인해 중앙 집권 국가의 이념적 기초를 다진 법흥왕은 말년에 승려가 돼 법운(法雲)이란 법명으로 사찰에서 소일했다. 재위 27년(540) 7월 왕이 승하하자 조정에서는 ‘불법을 흥성시켰다’는 뜻을 담아 법흥(法興)이란 시호를 봉정했다. 애공사(寺) 북쪽 봉우리에 장사지내니 현 경북 경주시 효현동 산 63번지다. 건좌(북에서 서로 45도) 손향(남에서 동으로 45도)의 동남향으로 주역 괘에 해당하는 좌향에 능을 조영했다. 선도산에서 서쪽으로 흘러내린 동쪽의 양지바른 경사면인데 좌청룡(남자·관직)을 우백호(여자·재물)가 환포했다.

풍수 고서에는 건좌손향에 곤향(坤向·남에서 서로 30도)이 함몰되면 여난(女難)을 피하기 어렵다고 명기돼 있다. 법흥왕릉이 이에 해당한다. 법흥왕 당시부터 신라 왕실에 닥친 여난은 가늠하기조차 힘들다.
한반도 동남부(현 경상북도·강원도 남부)에 위치한 소국 신라는 23대 법흥왕(재위 514~540) 대에 이르러 왕정 통치제도를 완비하고 대국으로 발돋움했다. 법흥왕은 21대 소지왕 재위 시 국공(國公) 신분으로 당시 부군(副君)이던 부왕(22대 지증왕)과 함께 국정 실무를 익혔다. 신라의 부군은 주상에게 왕자가 없을 경우 차기 왕위를 잇는 계승권자였고, 국공은 부군 유고 시 그 지위를 승계하는 태자 신분과 동일했다. 신라 조정은 부군·국공 제도를 통해 후계자 궐위로 인한 국정 혼란을 미연에 방지했다.

<이규원 『조선왕릉실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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