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희 독자마당] 군사우편

입력 2020. 01. 13   14:11
업데이트 2020. 01. 13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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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성 희 
수필가
박 성 희 수필가
“오늘도 웃음이 있었다. 그대가 보내준 편지로 인해 웃음이 있었다.”

군인 아저씨가 쓴 편지 구절은 아직도 나를 달뜨게 한다. 흰 봉투에 또박또박 쓴 주소, 우표 대신 찍힌 군사우편, 깨끗한 종이 위에 써내려간 세련된 필체. 두 손에 그 편지를 꼭 쥔 나는 마냥 가슴이 콩닥거린다. 이번엔 또 뭐라고 썼을까. 봉투를 조심스럽게 뜯어 곱게 접힌 편지를 읽는다. 시와 그림이, 꿈과 낭만이 가득 들어있다.

보고 싶다, 만나자, 사랑한다고도 서슴없이 쓰여 있었다. 총 메고 포탄 터뜨리며 일촉즉발 위기를 모면하면서 하루하루 군사훈련에 힘들었을 그다.

땅 위에서 물 위에서 공중에서, 걷고 뛰고 구르고 매달리고 떨어지고…. 나는 그런 용맹을 사랑했다. 이 땅,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씩씩하게 분투하는 그를 사랑했다.

이름과 계급이 ‘이○○ 하사’라고 했다.

어느 날, 우리 동네와 아랫동네에서 며칠간 군사야영훈련이 벌어졌다. 밤마다 ‘땅땅’ 총포 소리와 군인들의 발소리로 요란했다. 아랫마을 사는 운자가 그들이 준 주소를 들고 와, 반 친구들에게 나눠줘 알게 된 사람이다. 처음엔 아저씨라고 했다가 오빠라고 했다. 그러곤 점차 편지 왕래가 길어지면서 ‘그’라고 내 가슴에 썼다.

우린 매일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 누구의 편지보다 그의 편지가 빛난 것은, 멋진 글씨와 편지글 때문이었다. 더구나 운자의 말에 따르면, 키도 장대같이 크고 얼굴도 잘생겼다는 것이다. 점점 그가 내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아갔다. 소녀는 군복 입은 군인이 멋졌고, 군인은 교복 입은 소녀가 예뻤다. 친구들은 부러워했고, 나는 행복에 겨웠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어느 날부터 꼬박꼬박 배달되던 편지가 오질 않는다. 식구들한테 내 편지 못 봤느냐고 물어보고, 우체부 아저씨한테도 왜 내 편지 없어요, 라고 수시로 따졌다.

기다림에 목메던 어느 날, 부엌에서 고소한 냄새가 풍겨온다. 엄마가 아궁이에 뭔가를 비밀리에 태우고 있다. 하얀 종이 위에 총총히 써내려간 까만 글자들. 군사우편 찍힌 내 편지였다. 이미 뭉텅이 편지들은 불구덩이에서 활활 타들어 갔고, 그동안 나 몰래 모아온 편지를 들켜버린 엄마는 “네가 지금 남자랑 편지질할 나이니?” 하고 꽥 소리치며 미안한지 싱글싱글 웃는다. 그날 난 엄마와 된통 싸우고 속이 상해 엉엉 울었다.

다시 그에게 편지를 보내고 또 보냈다. 그러나 벌써 많은 시간이 흘러, 부대 주소가 바뀐 것인지, 제대한 것인지, 아무 소식이 없다. 제대하면 손잡고 걸어보자는 약속도, 바다에 가보자는 약속도, 카페에 데려가겠다던 약속도, 다 거짓말이 되었다.

까마득한 세월이 흐르고 흐른 지금, 그의 편지는 여전히 내 가슴속 창고에 고이고이 간직돼 있다. 가끔 텔레비전이나 신문 지상에서 ‘이○○’이라는 사람이 나오면 혹, 그가 아닐까 하고 생긋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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