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군함이야기<34> 충무급 구축함(中)
충무급 함정은 한국 해군 최초의 구축함이다. 최대 38노트(시속 70.4㎞)의 빠른 속력과 5인치 주포 5문, 사격지휘통제장치를 포함한 향상된 작전지속 능력 등 모든 면에서 기존의 함정을 능가했다. 충무함(DD-911)·서울함((DD-912)·부산함(DD-913)은 이를 바탕으로 전 해역을 누비며 맹활약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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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함, 막강 화력에 간첩선 전의 상실
그중에서도 충무함의 전과(戰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1965년 3월 4일 동해 북방한계선(NLL) 근해를 경비하던 충무함 레이더에 수상한 움직임이 잡혔다. 거진 동쪽 해상에서 고속으로 남하하는 의아선박을 포착한 것.
최영섭(대령 예편) 함장은 전투배치를 명령했다. 충무함은 전속으로 의아선박을 추격하며 정선(停船)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의아선박은 이를 무시하고 속도를 높였다. 충무함이 함수포로 위협사격을 가하자 의아선박이 응사했다. 간첩선이라는 것을 확인한 충무함이 5인치 주포를 발사했다. 전의를 상실한 간첩선이 ‘백기’를 들었다. 충무함은 간첩선을 나포하고 간첩 8명을 생포했다.
충무함은 1년 뒤에도 간첩선을 격침했다. 1966년 10월 10일 울릉도 북동쪽 해상에서 경비 임무를 수행하던 충무함이 북방한계선을 넘어 내려오는 의아선박을 발견했다.
충무함은 즉시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의아선박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북쪽으로 변침하면서 가속도를 붙였다. 충무함은 의아선박의 외형을 확인하기 위해 조명탄을 발사했다. 의아선박이 응사하며 도주를 시도했다. 충무함은 주포를 동원해 간첩선을 격침했다.
충무함은 1968년 8월 20일 제주 서귀포 해상에 침투한 간첩선을 격침하기도 했다. 이날 충무함과 경기함은 사전 정보에 따라 서귀포 해상경비에 투입됐다. 저녁 즈음 인근 해상에서 간첩선과 지상군이 교전 중이라는 통신이 들어왔다.
다음 날 해가 뜰 무렵. 간첩선에 접근한 충무함이 격파사격에 돌입했고, 간첩선에서 화염이 치솟았다. 충무함은 기동력을 상실한 간첩선에 검문 요원을 보내 간첩 3명을 생포했다. 간첩선은 침수가 심해 침몰했다.
충무함, 5인치 주포·빠른 속력 장점
해상경비·합동작전 지원 등 맹활약
부산함, 4시간 교전 끝 간첩선 격파
서울함, 격전으로 2명 전사하기도
합동·협동작전 ‘척척’…승전고 ‘둥둥’
충무함의 전공은 이뿐만이 아니다. 1969년 10월 13일에는 소흑산도 북쪽에서 해안으로 고속 접근하는 의아선박을 포착했다. 충무함은 즉각 추적에 나섰다.
빠르게 다가오는 충무함을 발견한 의아선박은 사격을 가하며 외해로 도주했다. 충무함은 공군기에 협조를 요청했고, 합동작전이 전개됐다. 하루를 넘긴 14일 오전 7시. 충무함은 제주도 서남쪽 해상에서 간첩선을 수장시키고 승전고를 울렸다.
구축함의 협동작전도 빛을 발했다. 1969년 6월 12일 충무함과 부산함은 대흑산도 근해에서 경비 임무를 수행했다. 자정에 가까운 시각, 인근에서 간첩선이 도피 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2척의 함정은 대흑산도와 영산도 사이로 도주하는 간첩선을 접촉하고 추적에 나섰다. 충무함의 함포가 먼저 불을 뿜었다. 부산함도 도주하는 간첩선을 따라가며 격파사격을 했다. 충무함과 부산함의 협동작전에 간첩선은 추진력을 상실했고, 결국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다.
충무함은 1974년 7월 20일 신성함(PCE-1001)과 인천함(DD-918)을 도와 간첩선을 무력화시켰다. 이 작전으로 해군은 간첩 10여 명을 사살하고, 간첩선을 나포했다.
부산함 사정권 안에 들면 ‘독 안에 든 쥐’
부산함의 활약도 빼놓을 수 없다. 1969년 9월 23일 서해 경비 임무를 종료하고 기지로 복귀하던 부산함은 임자도 서북쪽 해상을 지날 무렵 인근에서 불빛 없이 고속으로 항해하는 의아선박을 포착했다.
부산함의 존재를 눈치챈 의아선박이 ‘혼비백산’ 도주를 시작했다. 이상하게 여긴 부산함은 조명탄을 쏘며 추격에 나섰다. 의아선박이 감춰뒀던 화기를 꺼내 저항하자 부산함의 주포가 불을 뿜었다.
부산함이 사격하며 쫓아가면 간첩선은 도망가는 형국이 계속됐다. 비바람마저 몰아쳐 추격이 쉽지 않았지만 4시간가량 교전이 계속됐다. 그러나 간첩선은 구축함의 사정권을 벗어날 수 없는 독 안에 든 쥐였다. 간첩선은 부산함의 함포에 격침돼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로부터 약 2년이 흐른 1971년 5월 14일 새벽. 부산함 통신망에 낙동강함(PF-65)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낙동강함이 추격하던 의아선박이 부산함 방향으로 속도를 높이고 있다는 것.
부산함은 1시간 뒤 북방한계선 남쪽에서 북쪽으로 도주하는 이 선박을 발견했다. 부산함은 현장에 도착한 공군기를 유도해 조명탄을 투하하도록 했다. 의아선박은 공군기에 대공사격을 하며 빠져나가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아군 합동전력과 간첩선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이어졌다. 부산함이 이 추격전에 종지부를 찍었다. 간첩선 가까이 접근한 부산함이 모든 함포의 포문을 열었고, 직격탄을 맞은 간첩선은 화염과 함께 침몰했다.
서울함은 서해에서 ‘수호신’ 역할을 했다. 1969년 2월 25일 자정을 넘긴 시각. 서울함은 대연평도 남동쪽 해역에서 의아선박을 추격 중이라는 비안함(LSM-607)의 지원요청을 받았다.
서울함은 전투배치와 동시에 전속 기동했다. 서울함의 레이더에 의아선박이 잡힌 것은 약 1시간 뒤였다. 서울함이 숨통을 조여오자 의아선박이 방향을 바꿔 기습사격을 했다. 서울함이 응사하면서 총포탄이 오갔다. 서울함은 함수로 간첩선 함미를 들이받기도 했다. 서울함의 집중포화에 간첩선은 기동력을 거의 상실했다.
작전이 승리로 종료될 즈음 다른 북한 경비함이 남하했다. 서울함은 북한 경비함의 엄호를 받으며 북상하는 간첩선에 마지막까지 포탄을 퍼부었다. 간첩선은 화염에 휩싸인 채 북쪽으로 도주했다. 안타깝게도 이 작전으로 서울함 승조원 2명이 전사하고 9명이 부상했지만 서울함 승조원들의 투혼은 귀감이 되기에 충분했다.
사진=해군본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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