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해사 생도 순항훈련 주축함…기동전술 능력 UP!
▶베트남전쟁 해상수송작전을 완벽히 수행한 PF-66 임진강함. 사진=해군본부 제공
이성호 준장, PF급 호위함 순항훈련 투입 요청…박옥규 총장 승인
간첩선 나포 및 격침 전과 올려…공군과 함께 해·공합동작전 전개
해군사관학교 생도의 해외 순항훈련은 9기생부터 시작됐다. PF급 호위함은 초기 순항훈련의 주축함이었다.
1954년 7월 19일 이성호(중장 예편·5대 해군참모총장) 준장 지휘 아래 두만강·대동강·낙동강·임진강함 등 4척의 PF와 1척의 유조함 부전함(O-3)이 9기 사관생도들을 태우고 장도에 올랐다. 당시 순항훈련 실습단대는 32일 동안 4563마일을 항해하면서 필리핀 마닐라, 타이완 기륭을 거쳐 진해항으로 무사히 귀항했다.
▶1967년 4월 17일 PF-63 대동강함의 공격을 받아 침몰하는 간첩선. 사진=해군본부 제공
해사 생도 9~12기까지 순항훈련에 참가
당시 PF는 항해 장비가 없어 천문 항법으로 함정의 위치를 측정했다. 이로 인해 함정 간 거리가 수십 마일 벌어질 때도 있었고, 장비 고장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생도들은 해군의 주력 전투함에서 필요한 전문지식과 실무적응 능력을 배양할 수 있었다.
PF급 호위함은 1957년 12기생까지 4회의 순항훈련에 참가했다. 1955년 10기생은 PF 2척과 유조함 1척으로 필리핀 마닐라와 홍콩을, 1956년 11기생은 PF 3척과 유조함 1척으로 이전과 같은 국가를, 1957년 12기생은 PF 3척과 유조함 1척으로 태국 방콕, 베트남 사이공, 대만 기륭을 방문했다.
PF급 호위함이 순항훈련에 투입된 것은 박옥규(중장 예편·2대 해군참모총장·1971년 작고) 참모총장과 이성호 준장의 노력이 컸다. 당시 한국함대 부사령관으로 재직 중이던 이성호 준장은 사관생도 순항훈련이 꼭 필요하다고 믿었다. 해군을 이끌어갈 생도들이 더 넓은 세상을 체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판단에서다.
▶1954년부터 해군사관학교 생도 해외 순항훈련에 참가한 PF-65 낙동강함. 사진=해군본부 제공
1954년 첫 대양 항해 나서…현재까지 시행
이성호 준장은 순항훈련 계획을 구체화해 1954년 초 박옥규 총장에게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박 총장은 “PF 4척을 순항훈련에 모두 가져가면 우리 바다는 누가 지키나?”라고 질문했다.
이에 대해 브리핑을 담당했던 함명수(중장 예편·7대 해군참모총장·2016년 작고) 대령은 “PC함으로 평시 경비 소요를 충당할 수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대양 항해 경험이 없다는 것도 문제였다. “우리는 대양 예인선도 없는데, 항해 중에 고장이 나면 어떻게 하느냐”는 박 총장의 질문에 이성호 준장은 “함정끼리 끌어야죠. 그게 훈련입니다”라고 답변했다.
박 총장은 당장 전투력 공백 문제 등을 고려할 때 순항훈련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해 재검토를 지시했다. 미 해군 군사고문관들도 부정적 의견이었다.
이성호 준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계획을 보완해 다시 보고했고, 박 총장은 순항훈련을 승인했다.
이렇게 시작된 해사 생도 순항훈련은 1958년만 거르고 매년 꾸준히 시행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해상 도발한 무장간첩선의 ‘천적’ 역할
PF급 호위함은 간첩선의 ‘천적’이었다. 임진강함은 1958년 7월 10일 동해 북방한계선(NLL) 근해를 경비하던 중 속초 동북방 34마일 해상에서 무장간첩선 1척을 나포해 7명의 간첩을 생포하고, 다량의 무기를 노획했다.
대동강함은 1962년 3월 27일부터 사흘간 무장간첩선 나포작전인 ‘흑진주 작전’을 수행했으며, 3월 29일 12톤급 간첩선 금성호를 나포했다. 1967년 4월 17일에는 격렬비열도 서방 해상에 침투한 간첩선을 발견한 뒤 산둥반도(山東半島) 동방 40마일 해상에서 격침했다.
특히 간첩선 추격과 동시에 공군기를 요청해 효과적인 해·공 합동작전을 전개했다. 이 작전에서 대동강함은 무장간첩선 복덕호를 격침하고 10명 사살, 5명 생포라는 전과를 거뒀다.
두만강함은 1962년 6월 7일 동해 거진 해상에서 북상 중인 15톤급 무장간첩선도 격침해 2명을 사살하고 5명을 생포했다.
베트남전쟁 발발 당시 해상수송작전 수행
베트남전쟁이 발발하자 우리 정부는 미국·남베트남 정부의 요청으로 1964년 7월 15일 ‘파월한국군군사원조단’을 파병했다. 이 군사원조단의 수송은 한국 해군이 수행했다.
전세가 악화되자 미국은 1964년 12월 18일, 남베트남은 1965년 1월 2일 추가 파병을 요청했다. 우리 정부는 국회 의결을 거쳐 군사원조단과 건설지원단을 파병했으며, 수송은 한국 해군이 맡았다. 이후 해상 수송임무가 계속 증가하자 우리 해군은 ‘수송단대’를 편성·운용했다.
낙동강함은 1966년 2월 1일 베트남으로 향하는 운봉함(LST-807)·덕봉함(LST-808)·가덕함(LSM-605)·비안함(LSM-607)을 호송했다.
임진강함은 1966년 8월 1일 비봉함(LST-809)·기린함(LSM-610)·울릉함(LSM-613)을, 8월 21일에는 한국으로 향하는 수영함(LST-813)·가덕함(LSM-605)·비안함(LSM-607)을 호송했다. 이 작전에서 수영함에 원인불명의 기관 고장이 발생하자 임진강함이 해상에서 수리를 완료하기도 했다.
글 = 윤병노 기자
[전문가 해설]
임성채 해군역사기록관리단 군사편찬과장
2300톤급 PF함 도입… 해군 작전수행 능력 ↑
레이더·대잠무기 발사대 등 장착
‘근해방어 해군력’으로 일보 전진
PF급 호위함은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우리 해군에 들어왔다. 전쟁 발발 이전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은 백두산함(PC-701) 구매 후 남은 돈으로 PF함을 구매하려고 했다.
그런데 PF급 이상 전투함은 다른 국가에 팔거나 양도할 수 없다는 미 국무부의 대외정책 때문에 구매할 수 없었다. 그런 PF함이 유엔 해군 호송작전에서 한국 해군의 역할이 요구돼 5척이나 양도된 것이다.
2300톤급의 PF함은 기존 주류함이었던 450톤급 PC함보다 약 5배 크다. 레이더, 음탐기, 대잠무기 발사대 등을 장착해 우리 해군의 작전수행 능력이 크게 증대됐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 해군은 ‘근해방어 해군력’으로 일보 전진했다.
해방병단 시기의 ‘상징적 해군’에서 출발한 한국 해군이 조선해안경비대 시기의 ‘경찰 해군’, 정부 수립 시기의 ‘내해방어 해군력’을 거쳐 ‘근해방어 해군력’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PF급 호위함의 도입으로 우리 해군은 대공·대잠·호송 등 다양한 진형에 필요한 기동전술 능력을 갖추게 됐다.
■ 기사 원문
국방일보 ‘대한민국 군함이야기’, 윤병노 기자,
2018년 8월 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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