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급 전투함 (中)

입력 2018. 06. 13   11:32
업데이트 2018. 11. 22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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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총 9척 획득 ... 6·25 때 수많은 작전 승리 견인


우리 해군은 총 9척의 PC급 전투함을 획득했다. 이 중 백두산함부터 지리산함까지 초기 4척의 함정은 6·25전쟁 당시 해군 핵심 전력으로 크고 작은 작전에서 맹활약했다.


PC급 전투함은 3인치(76㎜) 포를 장착해 37㎜ 포를 탑재한 YMS급이나 JMS급보다 화력이 뛰어났다. 이를 바탕으로 해전에서부터 상륙작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작전에서 승리의 밑거름이 됐다.

 

금강산함(PC-702)이 항해하는 모습. 사진 = 해군본부
금강산함(PC-702)이 항해하는 모습. 사진 = 해군본부

 

6·25전쟁 당시 해군 핵심전력 활약


6·25전쟁 발발 당일 새벽.

해군본부는 동해안 옥계 등지에서 무장병력을 태운 북한 함선들이 출현하자 백두산함을 급파했다. 백두산함은 대원들을 소집하고, 유류 등의 물자를 적재해 6월 25일 오후 3시 구월산정(YMS-512)과 함께 진해 군항을 출항했다.

이날 저녁 8시12분 부산 동북방 30마일 해상. 백두산함 당직사관 최영섭(대령 예편) 소위가 우현 견시로부터 수평선 부근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른다는 보고를 받았다. 확인 결과 검은 연기의 정체는 10노트의 속력으로 남쪽을 향해 기동 중인 선박이었다.

 

백두산함장 최용남(소장 예편·1998년 작고) 중령은 동해안을 따라 부산으로 왕래하는 큰 선박이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해 함수를 미식별 선박 쪽으로 향하도록 했다.

저녁 8시30분.

백두산함은 미식별 선박을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한 거리에 도착했다. 선체를 검은색으로 칠한 미식별 선박은 선명도, 국적을 나타내는 국기도 없었다. 백두산함은 미식별 선박과 같은 방향으로 기동하며 기류·수기·발광 신호 등을 보냈다. 그러나 묵묵부답. 백두산함은 미식별 선박에 대해 해군본부에 보고하고, 전투준비에 돌입했다.

밤 10시30분.

백두산함의 신호를 무시한 미식별 선박이 방향을 바꿔 속력을 높였다. 백두산함은 미식별 선박 우현 100m까지 접근해 탐조등을 비췄다. 미식별 선박은 함포와 중기관총을 천으로 덮어놓았으며, 갑판에는 북한 인민군 복장을 한 병력이 있었다. 백두산함은 이 같은 상황을 해군본부에 전했고, 해군본부는 이를 국방부에 보고했다.

대한해협해전 승리 해상전투 자신감 얻어

밤 11시.

국방부는 “의아 선박이 적 함정으로 판단되면 쏘라”는 지시를 내렸다. 사격 명령을 받은 백두산함은 6월 26일 새벽 0시30분 무장 선박을 향해 첫 번째 위협사격을 가했다. 무장 선박도 57㎜ 주포와 중기관총으로 대응사격을 했다.

 

적선이라는 게 명확해지자 백두산함은 거리를 좁혀가며 3인치 포탄을 발사했다. 구월산정도 37㎜ 포로 지원사격을 했다.

 

새벽 1시10분.

마스트와 기관실이 피폭된 적선의 선체가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백두산함은 35발을 발사한 3인치 주포가 고장을 일으키자 적선에 더 가까이 접근해 중기관총을 퍼부었다.

 

그 순간 적의 57㎜ 포탄 한 발이 백두산함 조타실 왼쪽 밑부분을 관통하면서 4명의 승조원이 중상을 입었다. 복부와 흉부에 파편이 박힌 김창학 삼등병조와 전병익 이등병조는 안타깝게 전사했다. 두 전사자는 현재 400톤급 유도탄고속함(PKG) 김창학함과 전병익함으로 부활해 조국의 바다를 지키고 있다.

새벽 1시35분.

백두산함은 적선의 침몰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탐색작전을 벌여 옷·기름 등의 부유물을 발견했다. 북한군 무장 선박이 침몰된 것으로 판단한 백두산함은 해군본부 명령에 따라 다시 동해안으로 북상했다.

백두산함의 대한해협해전 승전으로 해군은 북한의 후방 침투 기도를 차단하고, 군수물자와 증원병력이 들어올 부산항을 안전하게 지켰다. 특히 미군 전력이 도착하기 이전 단독작전으로 이룬 쾌거였으며, 우리 해군은 이를 계기로 해상전투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됐다.

 

 

삼각산함(PC-703) 승조원들이 함포 운용 능력을 숙달하고 있다. 사진 = 해군본부
삼각산함(PC-703) 승조원들이 함포 운용 능력을 숙달하고 있다. 사진 = 해군본부


가장 큰 성과는 인천상륙작전 성공 밑거름


지리산함과 삼각산함의 활약도 빼놓을 수 없다. 서해안 봉쇄작전을 수행하던 지리산함은 1950년 8월 11일과 13일 안마도에 상륙작전을 감행해 적 23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삼각산함은 1950년 8월 17일 통영상륙작전에서 맹위를 떨쳤다. 삼각산함은 해병대 상륙 이후 통영항으로 돌입해 적진에 포격을 가했고, 남망산에 주둔하고 있던 북한군에게 치명타를 입혔다. 해병대는 8월 18일 삼각산함의 막강한 화력 지원 속에 통영 시내의 모든 적을 소탕했다.

당시 삼각산함 포술장 고경영(소장 예편) 중위는 이날을 회상하며 “우리가 쏜 포탄은 목표하는 지점에 정확하게 떨어졌다. 지금 생각해도 우리 배가 포를 너무 잘 쏜 것 같다”고 말했다.

PC급 전투함의 가장 큰 성과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기여한 것이다. 백두산·금강산·삼각산·지리산함은 1950년 9월 15일 YMS급 7척, JMS급 4척과 함께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됐다. 백두산함은 작전 전날인 9월 14일 양동작전의 일환으로 군산지역에 포격을 가했다.

 

작전 당일 4척의 PC급 전투함은 공격부대 ‘TF90’에 편성돼 함포 사격을 집중했다. 이를 통해 성공 확률이 5000분의 1에 불과했던 상륙작전이 ‘완전 작전’으로 막을 내리는 데 디딤돌을 놓았다.

백두산함은 1951년 2월 10일 제2차 인천상륙작전에도 참가했다. 1951년 ‘1·4 후퇴’로 인천지역이 다시 북한군 수중에 들어갔다. 1951년 2월 2일 백두산함은 북한군 정보를 획득하기 위해 인천항으로 돌격했다. 월미도 전방 1000m 지점에 도착한 백두산함은 북한군 포대와 초소에 포격을 가했다.

이어 인천을 탈환하기 위해 덕적도에 주둔하던 해병대 병력을 인천에 기습 상륙시키기로 했다. 백두산함은 JMS급 함정에서 특공대를 선발해 2월 10일 인천기계제작소에 상륙시켰고, 다음 날에는 덕적도 주둔 해병대원들이 상륙을 완료했다. 특공대와 해병대원들은 적과 치열한 교전 끝에 인천을 장악했다.

 

글=윤병노 기자

 


 


 

윤병노 기자 < trylover@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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