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비와 수적 열세는 6·25전쟁의 전선이 남쪽으로 밀리는 원인이 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군이 계속 남하하자 1950년 7월 1일 목포에서 해군 함정을 이용해 부산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목포경비부사령관 정긍모(중장 예편·제3대 해군참모총장·1980년 작고) 대령은 대통령 일행을 수송하기 위해 길주정(YMS-514)과 대동강정(JMS-309)을 긴급 호출했다. 연료와 보급품을 적재한 길주정은 7월 1일 오후 4시 대통령 일행을 태우고 목포항을 출항했다. 대동강정은 그 뒤를 호위했으며, 다음 날 오전 11시 부산에 입항했다.
함정에서 내리기 전 이승만 대통령은 승조원들에게 “참으로 훌륭했어. 그만한 항해술이면 공산당 놈들 얼마든지 무찌를 수 있겠어. 정말 고생들 많았어”라고 격려했다.
여도 탈환 작전 성공 발판 만든 ‘김해정’
1950년 7월 24일 북한군이 목포 시내로 진입했다. 해군본부는 목포경비사령부에 목포항을 사수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목포경비부사령관 정긍모 대령은 김해정(YMS-505)과 대동강정을 직접 지휘해 목포항 세관 부두에 5명의 특공대원을 상륙시켰다. 이를 발견한 적들이 세관 부두를 향해 사격을 가했고, 김해정과 대동강정은 즉각 응사했다. 이후 상황이 급박해지자 대동강정이 먼저 부두를 이탈했다. 김해정은 상륙했던 대원 2명을 태우고 뒤늦게 출항했다.
이때 함께 세관 부두에 상륙했던 대원 중 3명은 안타깝게 전사했다. 생존한 2명은 한국은행 목포지점에서 현금을 수령해 가져왔다. 이 현금은 7월 25일 부산 제1부두에서 정부 관계자에게 인계됐다.
우리 해군은 1951년 2월 6일 영흥만 도서 가운데 가장 크고, 만의 입구에 위치한 여도를 탈환하는 작전을 전개했다. 여도는 다른 도서를 확보하기 위해 반드시 점령해야 하는 요충지였다.
해군은 김해정과 상륙함 용화함(LST-801) 등을 투입했다. 김해정은 1951년 2월 13일 여도 근해에서 적 고지에 위협사격을 가한 후 해병대 수색대원들을 상륙시켰다.
이어 용화함에 탑승한 해병대원들의 상륙을 도왔다. 이는 1950년 2월 14일 여도를 완전히 탈환하는 밑거름이 됐다.
패천고지서 적 섬멸작전 완수한 ‘길주정’
원산봉쇄작전을 수행하던 길주정은 1951년 3월 15일 유엔군의 요청으로 갈마반도에 침투해 적과 치열한 포격전을 벌였다. 3월 20일에는 호도반도 근처에 추락한 유엔 항공기 조종사를 구출했다.
다음 날에는 적진 깊숙이 침투해 정보활동을 전개하던 유엔 정보원을 지원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길주정은 미 구축함 젤러스함(DD-777)과 상봉해 정보장교 3명을 태우고 목적지인 통천지구로 향했다. 통천지구는 적이 점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길주정은 동해 외해로 우회해 3월 22일 새벽 1시35분 통천군 칠보리 앞바다에 닻을 내렸다.
길주정은 육지에 대기 중이던 정보원에게 무기와 식량을 공급하고, 이들이 수집한 정보를 입수했다. 그 정보에 의하면 칠보리에서 1.5마일 남쪽인 패천 고지 중턱에 북한군 270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길주정은 기습·섬멸작전을 세운 뒤 즉시 실행했다. 패천 남쪽 입구까지 진입한 길주정은 화력을 집중해 적을 섬멸하고, 포대를 파괴하는 전과를 거뒀다. ‘승전고’를 울린 길주정은 젤러스함에 미 정보장교들을 내려놓고 원산 봉쇄 임무에 복귀했다.
영화 제작된 기적 같은 생존 능력 ‘개성정’
개성정(YMS-504)은 영화의 소재가 됐을 정도로 기적 같은 생존 능력을 발휘했다.개성정은 1950년 10월 삼각산함(PC-703) 등과 함께 목포 수복 작전에 참가했다. 목포 인근의 투묘지로 향하던 중 ‘꽝!’ 하는 폭발음과 함께 커다란 물기둥이 치솟았다.
개성정의 우현 프로펠러에 계류 기뢰 줄이 감기면서 2발의 기뢰가 폭발한 것. 당시 목격자는 물기둥의 높이가 개성정보다 더 높아 마스트까지 완전히 가려질 정도였다고 전했다.
엄청난 폭발이었지만 개성정은 7명의 경상자 외에 큰 피해가 없었다. 일부 침수가 있었으나 삼각산함에서 지원한 펌프로 물을 빼내 위기를 넘겼다.
개성정이 접촉한 기뢰는 중국제 구식 계류 기뢰였다. 접촉점의 재질이 유리로 만들어진 이 기뢰는 유리가 깨지면 바닷물이 유입되고, 폭발이 일어나는 방식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개성정이 기뢰를 어느 정도 통과한 후 폭발해 무사할 수 있었다.
1963년 이만희 감독이 만든 전쟁영화 ‘YMS-504의 수병’(아래 포스터 사진)의 소재가 개성정이었다. 이 영화는 해군본부 정훈감이 실제 체험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편거영 작가가 시나리오를 썼다고 알려졌다. 영화는 개성정에서 근무하는 장병들이 갈등을 이겨내고, 부여된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는 내용을 담았다.
글 = 윤병노 기자
사진 = 해군본부
● 전문가 해설
임성채 해군역사기록관리단 군사편찬과장
‘덩치’ 큰 美 함정 대신 소해작전 도맡은 해군
긴박한 상황서 바다 기뢰 제거 해양통제권 회복 디딤돌 역할
6·25전쟁 발발 이전까지 우리 해군이 획득한 YMS급 함정은 19척이었다. 이는 창설 초기 우리 해군이 보유했던 46척의 함정 중 41%로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했다.
YMS는 JMS(일본에서 건조) 함정의 선체와는 달리 목재로 만들어졌다. 자기감응기뢰에 피격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럼에도 2척이 6·25전쟁 때 기뢰 접촉으로 침몰하고, 40명이 전사하는 아픔을 겪었다. ‘덩치’가 큰 미 해군 함정들을 대신해 연안에서의 소해작전을 도맡았기 때문이다.
6·25전쟁 당시 유엔군은 막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해양 통제권을 확보하고, 전투력을 투사했다. 이를 통해 바다에서 원하는 작전을 언제든지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예기치 않게 북한이 동·서해에 대량의 기뢰를 부설함으로써 얼마 동안 해양 통제권을 상실했고, 이로 인해 지상·해상 작전이 차질을 빚게 됐다.
이를 극복하는 작전을 주도한 함정이 우리 해군의 YMS급 소해정이었다. 언제 기뢰와 부딪칠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에서 수많은 인명 피해를 감수하면서 바다에 부설된 기뢰를 제거함으로써 아군이 해양 통제권을 회복하고, 전세를 유리하게 이끄는 데 디딤돌을 놨다.
특히 YMS급 함정의 희생은 기뢰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생소한 분야인 소해작전과 전술을 습득하는 단초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