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MS급 소해정 (下)

입력 2018. 05. 09   18:17
업데이트 2018. 11. 20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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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인천상륙작전 디딤돌 ‘덕적도 탈환’서도 큰 공


해군기지 수복 참가 … ‘서해안 봉쇄’ 투입 맹활약

한국 해군 핵심전력으로 피란민 철수에서도 큰몫

 

JMS-308(토성정) 사진 = 해군본부
JMS-308(토성정) 사진 = 해군본부


YMS급과 해군 핵심 전력 ‘쌍두마차’


JMS급 함정은 6·25전쟁 발발 직전 YMS급과 더불어 한국 해군의 핵심 전력이었다. 우리 해군은 전쟁이 발발하자 예하 각 정대에 경계·경비태세 강화 명령을 하달하고, 수리 중인 함정을 최단시간 내 복구해 작전에 투입했다.

이에 따라 태백산정(JMS-304)과 두만강정(JMS-305)은 동해 38선 근해에서, 덕천정(JMS-310)은 목포 근해에서, 대동강정(JMS-309)은 제주도 근해에서, 단양정(JMS-306)·대전정(JMS-301)은 여수 근해에서 경비 임무를 수행했다. 통영정(JMS-302)과 단천정(JMS-307)은 서해에서 육군17연대의 철수를 지원했다.

 

1950624일 기준 정대별 예속 함정 현황

 

정대

척수

예속 함정

1정대(인천)

7

YMS-501·502·503·513, JMS-302·307, PG-313

2정대(부산)

7

YMS-506·509·510·516, JMS-304·305·306

3정대(목포)

6

YMS-505·514, JMS-301·303·309·310

훈련정대(진해,여수)

8

진해 : PC-701, YMS-515·518, JMS-308

여수 : YMS-504·507·512, LCI-105

진해통제부

9

PC-702·703·704, LST-801, AKL-901, YO-1, GB-22,

YMS-508·511

37

 

 

6·25전쟁 당시 한반도 해역은 한국 해군과 유엔 해군이 철저히 봉쇄하고 있었다. 서해 연안에서는 한국 해군이, 서해 외해에서는 영국·캐나다 해군이, 동해에서는 미 해군이 위력을 떨쳤다.


서해안 봉쇄 작전 투입 큰 공적 올려


북한 해군은 동해에서의 해상 침투가 실패하자 서해안 침투로 작전계획을 변경했다. 유엔 해군 함정이 활동하는 동해안보다는 해안선이 복잡하고, 도서가 많은 서해안이 침투하기 쉽다는 판단에서다. 북한은 서·남해안에서 소형 선박을 이용한 침투 또는 군수물자 수송을 집요하게 시도했다.

이에 따라 우리 해군의 역할도 중요해졌다. 특히 덩치가 작은 JMS급 함정은 이동이 용이한 장점을 살려 서해안 봉쇄 작전에서 수많은 공적을 세웠다. 


그 중심에는 대전정이 있었다. 


대전정은 1950년 7월 23일 군산 근해를 초계하다 줄포항에서 출항하는 적 범선 7척을 격침했다. 8월 7일에는 인천 근해에서 경주정(YMS-502)·김해정(YMS-505)과 함께 100톤급 적 발동선 1척, 화물선 2척, 범선 13척을 수장시켰다. 8월 12일에는 적 보급선 4척을 발견해 침몰시키고, 70명을 사살했다.

대동강정의 활약도 빼놓을 수 없다. 대동강정은 8월 11일 지리산함(PC-704)과 안마도에서 적 11명을 사살했다. 8월 15일에는 대전정·지리산함과 서해 낙월도에 상륙해 경찰관 4명을 구출했으며, 안마도 근해에서 적 28명을 사살했다.


JMS-303(대구정) 사진 = 해군본부
JMS-303(대구정) 사진 = 해군본부

 

덕적도 탈환, 해군기지 수복에 일조


JMS급 함정은 덕적도 탈환 작전에서도 맹활약했다. 해군은 8월 16일 서해안의 덕적군도를 비롯한 주요 도서를 탈환하는 작전에 돌입했다. 인천항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위치한 덕적군도는 장차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해 최우선적으로 확보해야 하는 중요한 도서였다. 


대전정과 대동강정은 차출한 상륙반 1개 중대를 덕적도 남동쪽 해안 진리로 상륙시켰다. 이들은 적 26명을 사살하고 7명을 포로로 잡았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한국 해군은 함정과 육전대를 활용해 여수·목포·묵호·군산 등의 해군기지를 수복했다. 여수 탈환 작전에는 대전정과 단천정이, 목포 탈환 작전에는 대전정이 참가했다.

중공군 침공 이후 전세가 역전되자 북한의 많은 주민이 피란길에 올랐다. JMS급 함정은 피란민 철수 작전에서도 단단히 한몫했다. 통영정은 서해 용매도 청년의용군의 항전을 지원했으며, 대구정·태백산정·대동강정은 1951년 1월 5일 황해도 해안지대에 고립된 주민을 인근 도서로 대피시켰다.

 

6·25전쟁 발발 직전 한국 해군의 핵심 전력이었던 JMS급 단천정의 항해 모습. 사진=해군본부
6·25전쟁 발발 직전 한국 해군의 핵심 전력이었던 JMS급 단천정의 항해 모습. 사진=해군본부


제2차 인천상륙작전 성공 디딤돌


1951년 2월 황해도 옹진군 동남면에 주둔한 1개 소대 규모의 북한군이 선도에 침입하기 위해 연일 총탄을 퍼부었다. 이 섬에는 2000여 명의 피란민과 주민이 청년의용군의 보호를 받으며 생활하고 있었다. 


단양정은 수로를 따라 깊숙이 진입한 뒤 적진에 함포를 집중해 적의 기도를 분쇄했다. 또 흥미면 주민을 구출하기 위해 용호도 청년의용대를 상륙시키고, 함포 지원 사격을 했다. 단양정과 용호도 청년의용대는 북한군 보병 23여단장 일행을 사살하고, 주민 96명을 무사히 구출했다.

1951년 2월 10일 대전정·통영정·단양정·덕천정은 백두산함(PC-701)과 함께 제2차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됐다. 당시 각 함정에서 선발된 70명은 통영정에, 덕적도에 주둔하던 해병대는 덕천정에 승함해 인천기계제작소 전방 암벽에 상륙했다. 특공대원들은 대규모 병력인 것처럼 고함을 지르고, 노획한 전차에 701이라는 글씨를 쓰고 돌격해 인천 재탈환의 디딤돌을 놨다.

임성채 해군역사기록관리단 군사편찬과장은 “JMS급 함정은 6·25전쟁 중 수심이 얕아서 유엔 해군의 대형 함정이 수행할 수 없었던 연안·도서 근해의 작전을 도맡았다”며 “특히 우리 해병대 대부분이 주요 지상 전투에 투입된 관계로 연안·도서에서 상륙작전이 필요할 경우 JMS급 함정에서 승조원을 차출해 육전대 또는 특공대로 편성·투입했다. JMS급 함정과 승조원들은 그야말로 일당백이었다”고 설명했다.


두만강정, 유엔 해군 오인 피격 침몰


포탄이 쏟아지는 전장을 누빈 만큼 안타까운 사례도 있다. 두만강정은 1950년 6월 29일 새벽 경비작전 임무를 마치고 묵호항으로 복귀하던 중 정체불명의 군함으로부터 포격을 받았다. 두만강정은 지그재그 항해로 회피하면서 응사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두만강정은 37㎜ 포가 파괴되고, 기관실과 함수가 손상되는 등 회복 불능 상태가 됐으며, 8명이 전사하고 4명이 부상했다. 당시 승조원들은 포격 함정이 소련 군함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군함의 정체는 미 해군의 주노함(CLAA-19)이었다.

주노함은 한국 해군이 38도선 이남으로 완전히 철수했다는 정보를 접수했기 때문에 두만강정을 적성(敵性) 함정으로 오인해 포격했다며 사과했다. 그리고 부상자를 치료하고, 약품과 군수물자를 제공했다. 그러나 두만강정은 포항으로 예인되던 6월 29일 오후 4시30분쯤 침몰했다.

한국 해군은 이 사건을 계기로 유엔 해군 함정에 연락장교를 파견했다. 이들은 함정 실습을 병행해 최신 장비 운용술과 항해술, 전술교리 등을 습득했다.


윤병노 기자 < trylover@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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