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CI 서울정

입력 2018. 04. 25   17:05
업데이트 2018. 11. 20   13:03
0 댓글

해군 첫 군함, 대한민국 수도 이름으로 의미 부여


미군이 상륙정 …서울정·진주정 이후 4척 추가 인수

부속품 없고 고장 잦았던 노후해 전쟁 중 부산항서 식당으로 변신도

 

진해 인근 해역을 항해하고 있는 청진정(LCI-105).
진해 인근 해역을 항해하고 있는 청진정(LCI-105).


대한민국 해군의 함대 세력표(Fleet List)에 등록된 최초의 군함은 상륙정(LCI: Landing Craft Infantry) ‘서울정’이다.


해군 함대 세력표에 등록된 최초의 군함

조선해안경비대는 1946년 9월 14일 미 해군이 사용하던 387톤급 LCI 2척을 인수하기 위해 선박을 운용해본 경험이 있는 대원 20명을 긴급 소집했다. 다음날 부산으로 이동한 이들은 LCI를 인수한 뒤 미 군사고문단의 도움을 받아 진해에 입항했다.

조선해안경비대는 인수한 LCI를 조함창에서 정비한 뒤 1946년 10월 29일 오후 진해 군항 3부두에서 의미 있는 행사를 거행했다. 2척 중 먼저 정비를 마친 1척을 ‘서울정’으로 명명한 것. 다른 한 척은 같은 해 11월 11일 ‘진주정’으로 명명됐다.

이후 조선해안경비대는 1946년 11월 24일 2척(춘천정·청주정), 12월 31일 2척(청진정·진남포정)의 LCI를 추가 인수했다. LCI 6척 중 5척은 미 해군이 제2차 세계대전 중 대량으로 운용한 LCI-351급 상륙정이며, 1척(진남포정)은 이보다 구식 모델인 LCI-1급 상륙정이었다.

 

1947년 1월 22일 열린 진남포정(LCI-106) 명명식 기념 사진.
1947년 1월 22일 열린 진남포정(LCI-106) 명명식 기념 사진.

조선해안경비대원 교육훈련에 큰 발자취

LCI는 조선해안경비대원들의 교육훈련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교육훈련은 서울정을 인수한 1946년 9월 15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으며, 4명의 미 고문관에 의해 이론·실습으로 진행됐다.

그 결과 서울정 이희정(소장 예편·1976년 작고) 정장은 1946년 11월 6일 미 고문관의 감독 아래 일본인 승조원 80여 명을 진해에서 부산까지 이송하는 임무를 완수했다.

 

춘천정 김충남(소장 예편·1999년 작고) 정장은 1946년 12월 초 미 고문관이 편승하지 않은 채 진해 부두에서 약 1마일 떨어진 부도(釜島)를 돌아 부두에 성공적으로 계류했다. 이 임무는 다음 날 조선해안경비대 회보에 ‘대망의 부도 단독 항해 성공’이라는 기사로 보도되기도 했다.

LCI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과의 인연도 남다르다. 이승만 박사가 미국에서 귀국 후 1946년 가을 마산에서 연설하던 날, 손원일 제독은 조선해안경비대원·사관생도 200여 명을 LCI 함정 등에 태우고 마산으로 갔다. 이날 이승만 박사는 연설 내용의 대부분을 해군 이야기로 구성했다.

“악조건을 무릅쓰고 해군을 건설하겠다는 젊은이들의 노고를 높이 치하합네다. 내가 미국에 있을 때 미국의 해군을 무척 부러워했는데 우리도 하루빨리 훌륭한 해군을 키워야겠습니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여서 특히 해군을 강화해야 합니다.…시민 여러분! 맨 앞줄에 있는 우리 해군 용사들을 보시오. 비록 군복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남루한 옷차림을 했지만 빛나는 눈빛과 씩씩하기 이를 데 없는 기상을 볼 때 우리의 바다를 안심하고 맡길 수 있겠소이다.”

함상 결혼식 유행…LCI 예식장도 생겨

그러나 LCI는 대부분 노후한 상태였다. 또 미 고문관과의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어 장비 운용법을 습득하는 게 쉽지 않았다. 8개의 디젤 엔진을 장착한 LCI는 고장이 잦았고, 수리 부속품도 턱없이 부족했다. 한국에서 구할 수 없는 수리 부속품은 미 군정청을 통해 받았지만 이마저도 2~3개월 후에나 수령이 가능했다.

 

이로 인해 LCI는 출동 중 회항하는 경우가 많았고, 임무를 교대하지 못하는 사례도 빈번했다. 너무 자주 고장이 나다 보니 미 고문관들 중에서 “어디가 나쁩니까?” “다 좋습니까?”라는 우리말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결국 LCI 6척 중 5척(서울정·진주정·춘천정·청주정·진남포정)은 1949년 1월 20일부로 함대 세력표에서 제외됐다. 이 함정들은 1953년 12월 1일 보조선으로 전환됐고, 몇 척은 6·25전쟁 당시 부산항 1부두에 계류돼 식당으로 운영됐다.

이 식당에는 유엔군 장교와 외국인이 자주 초대됐다. 이곳에서 일했던 요리사 중에는 일류 요리사가 돼 유명한 식당을 차린 사람이 많고, 서울에서 ‘LCI’라는 클럽을 경영한 이도 있었다.

LCI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함상 결혼식이 열리기도 했다. 흥남철수작전 때 미군을 설득해 10만여 명의 피난민을 미국 함정으로 남하시키는 데 공헌한 ‘한국의 쉰들러’ 현봉학(1922~2007) 박사는 6·25전쟁 당시 결혼식장을 구하지 못해 고심했다. 그러다가 동생인 해군사관학교 1기생 현시학(소장 예편·1989년 작고) 제독의 도움으로 1951년 10월 20일 LCI 함상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 후 함상 결혼이 유행처럼 번졌고,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 LCI라는 이름의 예식장이 문을 열었다. 지금도 영업 중인 명동컨벤션도 LCI웨딩홀이 명칭을 바꾼 것이다.
                                                                                                   

글=윤병노 기자

사진=해군본부


■ 전문가 해설

 

LCI 계기로 자주국방 고취…해군 위상도 한 단계 격상

 

LCI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모함(母艦)에 탑재돼 상륙군을 해안에 상륙시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미 해군은 전쟁 종료 후 일본·필리핀 등지에 거의 방치 상태로 뒀던 LCI를 우리 해군에 양도하기로 했다.

비록 미 해군에 의해 무장이 철거된 함정이지만 우리 해군은 처음으로 보유하게 된 군함인 만큼 1번 LCI를 대한민국 수도인 ‘서울’로 명명했다.

해군이라는 군대는 군함이 있어야 존재가치를 발휘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LCI 도입은 ‘우리의 바다는 우리 손으로 지킨다’는 범국민적 자주국방 의식을 일깨웠고, 우리 해군과 국민에게 큰 희망을 안겨줬다.

조선해안경비대는 LCI를 보물처럼 여기며 조심스럽게 다뤘다. 특히 장차 정식 해군으로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밤낮으로 LCI 함상에서 함정 운용, 정비기술 등을 습득하고 교육훈련을 하는 데 매진했다.

이처럼 LCI 확보를 통해 우리 해군은 함정을 운용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했고, ‘상징적 해군’에 불과했던 위상이 한 단계 격상된 ‘경찰 해군’으로 발전했다.

 


임성채 <해군역사기록관리단 군사편찬과장>


■ LCI 서울정 제원


배수량 : 387톤 (만재)

전장 : 48.46m

전폭 : 7.32m

속력 : 12노트 

무장 : cal. 50 12.7mm 중기관총(HMG) 4정

승조원 : 80명 

 

■ 해군 함대세력표에 등재된 LCI 목록


 

※ 우리 해군은 상륙정인 ‘서울정’의 명명식이 있었던 1946년 10월 29일 이래로 고유명사로 된 함정명만을 사용해 오다 1948년 8월 30일부로 아라비아 숫자의 함정 번호를 부여해 고유명사와 병행 사용했다. 또한 6·25전쟁 이전 인수한 함정 번호에는 ‘4’ 자도 사용했다. 그러나 이후 인수한 함정에는 ‘4’ 자를 붙이지 않고 있다.

윤병노 기자 < trylover@dema.mil.kr >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0 댓글

오늘의 뉴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