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정신 담아 우리 기술로 완성한 첫 군함
<1> 충무공정 (PG-313)
우리 해군은 1945년 11월 11일 오전 11시 서울 관훈동 표훈전에서 해방병단(海防兵團) 결단식을 거행함으로써 공식 출범했다. 당시 군함이 한 척도 없었던 해군은 함정 건조를 위해 1946년 2월 27일 조함창(造艦廠)을 설치했다. 그리고 1년 뒤 첫 열매를 맺었다.
1947년 2월 7일 자체 조함(군함을 설계해 만드는 것) 기술로 경비정(PG: Patrol Gunboat)1척을 완성했다. 해군은 이 경비정의 함명을 ‘충무공’으로 명명하고, 선체 번호 ‘313’을 부여했다.
1947년 2월 7일 자체 조함 기술로 완성
충무공정은 본래 1944년 9월 14일 일본이 운영하던 진해 공창에서 착공됐다. 어뢰발사기 4문과 5톤짜리 기중기를 갖춘, 비행기 구조 겸 어뢰 발사 함정으로 설계됐지만 일본의 패망으로 제작이 중단된 후 방치돼 있었다.
조함창은 1946년 7월 15일 다시 이 함정의 건조에 착수했다. 당시는 골격만 있을 뿐이어서 조함창으로서는 새로운 함정을 만드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조함창 기술진은 밤낮을 잊은 채 구슬땀을 흘려 7개월 만에 건조를 완료했다. 이로써 우리 손으로 만든 최초의 군함이 탄생했다.
1947년 2월 7일 해군사관학교 1기 졸업식과 병행해 명명식을 개최함으로써 국민에게 첫선을 보였다. 초대 정장에는 박홍철 중위가 임명됐다.
공식적으로는 ‘정(艇)’급이었지만 해군의 전신인 ‘조선해양경비대’는 국내에서 건조한 첫 번째 함정이자 기함(旗艦)인 만큼 지휘관 호칭을 ‘정장’이 아닌 ‘함장’으로 격상해 불렀다. 이 같은 호칭은 충무공정이 퇴역할 때까지 이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편대훈련 기함 참가…시민들 환호로 화답
충무공정은 1947년 6월 22일 마산 수로에서 시행한 첫 편대훈련과 1947년 8월 17일 광복 2주년 기념 해상 편대훈련에 기함(旗艦)으로 참가해 시민들로부터 환호를 받았다.
충무공정은 1947년 10월 15일 설치된 부산 제1특무정대에 배치돼 연안·도서 경비, 불법 조업 어선 규제, 밀수선 단속, 조난 선박 구조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맥아더 라인(McArthur Line) 경비 임무 땐 월선하는 일본 어선을 단속하기도 했다. 1949년 2월 14일에는 해군 조직 개편에 따라 제1정대(인천)로 배치됐으며, 군산 이북의 서해 해역을 경비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949년 8월 17일 국군 최초의 응징·보복작전인 몽금포작전에서는 부상한 함명수(전 해군참모총장·중장 예편·2016년 작고) 소령을 인천으로 이송하는 데 공을 세웠다. 당시 충무공정에는 군의관이 동승했으며, 전임 정장인 함명수 소령의 혈액형을 알고 있던 승조원들은 수혈에 적극 동참하는 전우애를 발휘했다.
충무공정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강화도 하류 지역 경비 작전에 투입됐다. 이후 우리 해군 최초의 전투함인 백두산함(PC-701)과 함께 팔미도~강화도 간 경비작전을 펼쳤다. 이 작전에서 충무공정은 어선으로 남하하는 피란민을 검색해 위장 침투하는 인원을 색출했다.
특히 8월 14일에는 덕적도 인근 해상을 봉쇄하던 중 적의 소형 연락선을 발견해 격침하고, 4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8월 20일에는 대이작도를 공격해 인민의용군 24명을 생포하고, 적 7명을 사살함으로써 8월 21일 섬을 완전히 탈환하는 데 디딤돌을 놨다.
이것만이 아니다. 충무공정은 한국은행 금·은괴 이송 작전에도 참여했다. 6·25전쟁 발발 후 국방부는 한국은행 소유의 금·은괴를 진해통제부로 이송했다. 이어 낙동강 전선이 위험해지자 해군은 충무공정을 이용해 금·은괴를 부산으로 옮겼다.
수리부속품도 직접 제작…1956년 퇴역
조함창은 충무공정 건조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함정을 건조했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2월 18일 착공해 1951년 5월 7일 준공한 이 함정은 1951년 8월 31일 ‘제2충무공정(PG-315)’으로 명명됐다.
제2충무공정은 1951년 12월 29일 서해안 석도 근해에서 경비작전을 수행하던 중 적정 수집을 위해 기습 상륙한 우리 측 유격대를 지원하는 함포 사격을 했다.
제1충무공정과 제2충무공정은 일제 부속품 조달이 여의치 않았다. 이로 인해 직접 부속을 만들어 사용하는 등 정비에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운용에 애로가 많아 1956년 3월 15일 동시 퇴역했다.
글= 윤병노 기자
■ 제1·2 충무공정 제원
배수량 : 287톤 (만재)
전장 : 46.6m
전폭 : 6.7m
속력 : 13노트 (시속 24km)
무장 : 40mm 대공포 1문
20mm 기관포 2문
cal.50 13mm 중기관총 2정
승조원 : 60명
■ 전문가 해설
임성채 해군역사기록관리단 군사편찬과장
우리 해군은 창설 때부터 충무공 정신을 계승하는 심혈을 기울였다. 우리 기술로 만든 첫 번째 함정을 ‘충무공정’으로 명명한 것도 거북선을 창제해 왜선을 물리친 충무공의 정신을 본받기 위함이었다.
초대 해군참모총장을 역임한 고(故) 손원일(중장 예편·1980년 작고) 제독은 1947년 11월 11일 해군 창설 2주년 기념식에서 "직공들이 오로지 조국 재건을 위하여 공창과 운명을 같이 하겠다는 열성을 기울여 지난 2월 7일에는 해방 후 첫 공든 탑 ‘충무공호’를 내어 놓았습니다.… 우리의 각오와 포부는 충무공 정신을 계승하여 일단 유사시에는 일당백(一當百)이 아니라 일당천(一當千)으로서 오로지 조국 광복과 융성의 초석이 될 것을 서약하는 바입니다"라고 역설했다.
일본은 충무공정을 유사시 일본으로 도망칠 때 사용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의도를 간파한 배화상·윤태운 등 한국인 기술자들이 준공을 지연시켰다. 일본 항복 1개월 전에는 전면 파업으로 건조 작업을 중단했다.
그 결과 일본은 건조 중이던 함정을 남겨두고 도망갔다.
충무공정은 미국·일본으로부터 인수한 함정과 달리 처음부터 태극기를 게양했다. 이로 인한 승조원들의 자부심은 하늘을 찌를 듯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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