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격' 조정했을 뿐인데… 2016년까지 예산 600억 원 절감되네
‘규격 하나 바꿔 예산 600억 원을 절감한다.’ 거짓말처럼 들리지만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국방부는 지난 5월 “국방규격 조정을 통해 우수한 상용품 도입을 확대하겠다”며 중장비 수송 차량의 국방규격 조정 전환 사례를 공개했다.
◆ 중장비 수송차량의 사례
무게 수십 톤의 전차 같은 무거운 장비를 옮기려면 전용 중장비 수송차량(Heavy Equipment Transporter:HET)이 필요하다. 무게 51톤이 넘는 K1 계열 전차를 너끈히 실을 수 있는 군용 HET의 가격은 11억 원. 이에 비해 비슷한 탑재 능력을 가진 상용 차량의 가격은 3억4000만 원에 불과하다.
군용과 상용의 가장 큰 차이점은 등판 능력이다. 등판 능력이란 자동차가 올라갈 수 있는 비탈면과 수평면 사이의 각도를 의미하는 용어. 군용은 등판능력을 28%를 요구하는 데 비해 상용은 20%였다.
국방부와 군은 작전에 미치는 영향을 면밀하게 검토한 끝에 국방규격의 등판 능력을 20%로 줄였다. 정부가 국도 건설에 고려하는 기준이 보통 10~17% 정도라는 점 등 여러 요소를 고려한 끝에 나온 결론이다.
무거운 장비를 쉽게 옮길 수 있지만 대당 1억4000만 원 정도의 장착 비용이 드는 윈치(Winch)도 국방규격에서 배제했다. 구난전차나 이미 윈치가 달린 차량을 활용하면 임무 수행이 가능하다는 판단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이 같은 국방규격 조정으로 상용 차량을 구입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군은 시험평가를 거쳐 지난달 29일부터 상용 중장비 수송차량을 막 배치하기 시작한 상태다.
육군 3군수지원사령부의 수송계획장교인 박상일 대위는 “상용 차량 도입으로 경제적 군 운영에 기여하면서 군의 궤도 장비 수송 소요도 충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방부가 오는 2016년까지 구입하려던 군용 중장비 수송차량의 물량은 80대 내외, 대당 가격 차이는 7억6000만 원이었으므로 전체적인 예산 절감 예상액은 600억 원이 넘는다.
◆ 규격의 딜레마
중장비 수송차량의 사례는 국방규격의 미묘한 측면을 잘 보여준다. 군 관계관은 “원래 국방규격이란 특수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며 “군의 무기와 장비는 국민의 생명과 국가의 운명을 걸고 언제 어떤 상황에서 사용할지 모르기 때문에 상용품보다 엄격한 기준과 규격을 적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미군 장비 중에는 우리 돈으로 500만 원이 넘는 노트북도 있다. 초고성능의 중앙처리장치(CPU)가 달렸다거나 테라바이트(TB) 수준의 메모리가 달려 가격이 비싼 것이 아니다. 90cm 높이에서 떨어트려도 부서지지 않고 극한 기온에도 잘 작동하며 방수 성능도 가지고 있다.
어떤 경우에도 안정적으로 노트북을 사용할 수 있도록 각종 신뢰성 향상 설계를 했고 그 때문에 비싸진 것. 미군들이 북극부터 중동 사막까지 세계 곳곳에 파견되므로 이 같은 엄격한 군사 규격은 어찌보면 불가피하다.
하지만 비용 대 성능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국방규격의 엄격함’이 때로는 짐이 되기도 한다. 지난 9월 19일 국정감사 첫날 ‘민간 판매 제품보다 90배가 넘는 가격’이라는 주장이 나와 논란이 됐던 군용 저장장치(USB 메모리)가 대표적이다.
이 문제를 질의한 국회의원에게 김관진 장관은 “예산을 절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답했다. 간접적 화법이었지만 국방규격 조정을 통해 우수 상용품 도입을 확대할 수 있도록 예산 절감 차원에서 관심을 기울이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것이다.
◆ 합리적 조정이 해법
국방부도 이 같은 인식 아래 군 임무 수행에 지장이 없는 범위 내에서 국방규격을 적극적으로 조정, 민간의 우수한 상용품 구매를 대폭 확대하겠다는 정책 방향을 정한 상태다. 국방경영 효율화 10대 과제 중 하나로 ‘국방 규격 조정을 통한 우수 상용품 구매 확대’를 선정한 것도 그 흐름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를 위한 ‘군수품 상용화 확대 추진 태스크포스(Task Force)’도 지난 6월 만들어져 현재 가동 중이다.
신상범 육군준장(진)은 국방부 총수명주기관리팀장 재임 당시 상용품 적용 확대 정책을 설명하면서 “군수품의 상용품 적용을 확대하면 우수 상용기술의 군 접목 확대, 신규 개발 투자비 절약과 양질의 군수품 획득, 후속 군수지원과 전시 동원의 용이함 등 이점이 많다”고 밝혔다. 여기에 “국가 차원의 중복 투자 예방”이라는 국가적 차원의 이득이 덧붙여진다.
사실 국방부는 1999년부터 국방규격 조정을 추진해 왔다. 이제는 국방경영 효율화가 핵심 정책으로 떠오른 만큼 합리적이고 신속하게 국방규격을 조정할 수 있는 체계적인 시스템과 컨트롤 타워를 만들어 국방규격 조정에 더욱 속도를 올리겠다는 것이 국방부의 복안이다.
지난 10월 14일에는 이용걸 국방부차관이 주재한 ‘국방규격 조정위원회’의 첫 번째 공식 회의가 열렸다. 육·해·공군, 방위사업청, 국방기술품질원과 지식경제부 등 정부 유관부서의 관계자는 물론이고, 민간 전문교수까지 참여한 위원회는 앞으로 종합적인 관점에서 국방규격 조정의 적절성을 검토하게 된다.
상용품 적용 확대 과정에서 국방부와 합참, 방사청, 각군, 기품원, 국방과학연구소 등이 맡을 역할에 대해서도 조정이 끝났다. 이에 따라 기존 국방규격 제품을 조정해 상용품으로 전환하는 것뿐만 아니라 신규 품목 획득 때도 상용품을 선택할 수 있고, 무기와 비무기체계 구분 없이 상용품 구매 확대를 추진할 수 있게 됐다.
방사청의 규격검토위원회도 개발 단계부터 별도의 군용품을 개발하지 않고 상용품을 적용할 수 있는지 검토할 수 있는 체계로 주목받고 있다. 방사청이 오는 2013년까지 민ㆍ군기술정보교류사업 일환으로 국방표준종합정보시스템에 상용품 정보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사업도 지난 5월 시작됐다.
상용품 구매로 전환이 가능한 품목에 대한 목록화와 검토 작업도 강도 높게 진행하고 있다. 국방부 관계관은 “자주 구매하는 다빈도 대량조달 품목은 연내 검토를 마칠 계획”이라며 “내년부터 상용 전환을 위한 세부 계획도 마련하고 기타 품목에 대한 검토 작업도 동시에 진행한다”고 밝혔다.
■ 미국의 국방규격 개혁과 그 교훈-성능과 비용 사이 적정수준의 무기·장비 선택
미군들도 군 장비 도입과정에서 전통적으로 성능을 중시했다. 하지만 1970년대 이후 국방관련 지출이 폭발적으로 늘면서 비용이 변수로 떠올랐다.
성능 위주의 획득 개념에서 벗어나 비용도 독립변수로 보는 관점에서 나온 것이 바로 독립변수비용(CAIV:Cost As an Independent Variable) 개념이다.
CAIV를 적용한 획득 개념은 비용을 독립변수로 두고, 비용의 변화에 따른 성능 변화를 고려해 적정 수준의 무기나 장비를 선택하게 된다.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미국의 페리 국방장관은 1994년부터 ▶성능형 국방규격 제도 도입 ▶민간 규격 도입 확대 등을 추진했다. 민간 분야 규격 도입 확대는 국방규격 조정을 통한 상용품 도입 확대와 유사한 부분이 많다.
미국은 이런 개혁을 통해 합동정밀직격탄(JDAM) 개발에서 7000만 달러를 절감하고, 생산에서는 15억 달러를 줄였다. 밀스타(Milstar) 위성통신체계에서도 2억3600만 달러의 비용을 줄이는 성과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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