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중 서울 사수 해병대 장단·사천강지구 전투

입력 2011. 10. 17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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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형·병력 등 불리한 여건 불구 중공군 격퇴


중동부전선에서 용맹을 떨친 한국 해병1연대는 1952년 3월 17일 오전 6시 미 해병대1사단과 도솔산(강원 양구군)을 떠나 그날 밤 10시30분쯤 서울 북방 29마일(약 46.7㎞) 지점의 장단·사천강 전선에 투입됐다. “수도 서울을 빼앗기는 치욕의 역사를 되풀이할 수 없다. 한미 해병대를 서부전선으로 이동시켜 서울을 지키게 하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가 반영된 부대 재배치였다. 자랑스러운 승전(勝戰)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해병대의 장단·사천강지구 전사(戰史)를 소개한다.

장단·사천강 전투지역을 방문한 쉐퍼드 미 해병대사령관이 김동하 전투단장과 악수를 하고 있다. 맨 왼
쪽은 공정식 전 해병대사령관.

1953년 7월 해병 제1전투단 장병들이 장단·사천강지구 전투에서 전사한 776명의 호국영령을 추모하는
조총을 발사하고 있다.

한국전쟁 유공으로 미국 정부로부터 두 번째 수여받은 전투 동성무공훈장.


■ ‘상륙 공격군’ 방어 임무를 맡다

 유엔군사령부는 한미 해병대의 서부전선 이동·배치를 앞두고 서울 방어력 보완을 위한 ‘믹스마스터’(Mixmaster) 계획을 수립했다. 휴전회담이 열릴 판문점과 협상 대표단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한 계획이었지만 이 대통령의 요청대로 한미 해병대를 서부전선으로 이동시키는 게 핵심 포인트였다.

 미 해병대는 판문점을 중심으로 오른쪽을 맡았고, 병력과 장비를 보강해 해병 제1전투단으로 부대를 재편성한 한국 해병대는 왼쪽에 자리를 잡았다. 동·남쪽으로 임진강이, 서쪽으로 사천강이 흐르는 이 지역은 북고남저(北高南低)의 지형으로 아군의 작전행동에 제한이 따르는 불리한 곳이었다.

 사천강 너머의 중공군은 제19병단 예하 65군단 소속의 193·194·195보병사단과 8포병사단 등 4개 사단 4만2000여 명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아군의 병력과 장비 이동을 훤히 내려다보는 고지에 진을 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화천에서 인해전술 하나로 전투를 벌이던 ‘오합지졸’이 아니었다. 적은 최신식 화력과 현대적 전술교리로 무장한 중공군 최정예부대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휴전회담 때문에 여러 가지 제약까지 따랐다. 판문점 지구의 안전을 위해 회담장 반경 100m 이내, 양측 대표단 기지인 문산과 개성 반경 3마일(약 4.8㎞) 이내, 개성~문산을 잇는 도로 양쪽 200m 이내에서는 어떠한 적대행위도 금지된 상태였다. 사격은 물론 포탄이 떨어져도 안 된다는 규약도 있었다. 이 같은 제약은 양측에 똑같이 적용됐지만 제공권이 없는 적에겐 유리하게 작용했다.

 특히 상륙 공격군인 해병대 특성에 비춰 방어는 공격보다 더욱 어렵다. 또 각 부대가 위치한 곳을 기준으로 군사분계선을 설정하자는 논의가 진행돼 서울로 통하는 장단·사천강지구에서 중공군의 공세는 집요했다. 

■  무적 해병대 신화 차곡차곡

 중공군은 우세한 병력과 전술상 유리한 지형을 등에 업고 유개호(有蓋壺)를 구축한 뒤 끊임없이 위협을 가해 왔다. 5000여 명에 불과한 해병 제1전투단은 정찰대를 조직하고 중공군 전초진지에 잠입해 폭파를 시도하는 등 ‘무적해병’이라는 신화를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전투가 치열해 혼마저 빠져 달아났다는 ‘혼비고지’(魂飛高地) 별명을 얻은 36고지 전투를 비롯해 67·87고지 등에서 중공군과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하지만 병력의 열세는 극복하기 힘든 난관이었다. 해병 제1전투단은 중공군의 제1차 추기(秋期) 공세 때 전진기지에서 물러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밀고 밀리는 공방전은 휴전회담이 조금씩 진척되면서부터 진지쟁탈전으로 바뀌었다.

중공군은 작심한 듯 제2차 추기 공세를 전개했다. 한국 해병대는 31고지 전투에서 당한 쓰라림을 설욕하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최후 수단인 진내(陣內) 사격과 아군 진지 10m 상공에서 터지는 ‘박스 마인’(Box Mine) 포격까지 감행했다. 실탄이 떨어져 2겹, 3겹 개미떼처럼 돌격해 오는 중공군과 백병전을 벌였다.

 한국 해병대는 수많은 전사상자를 냈다. 대부분의 소대원을 잃은 3대대 11중대 3소대장 김용호 소위는 면목이 없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해병대원들은 동서를 막론하고 찾아볼 수 없는 안타까운 사건에 절치부심했다. 이곳이 뚫리면 수백만 명의 시민들이 피난길에 오르는 절망이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는 비장한 결의와 임진강이 우리의 무덤이라는 한결 같은 다짐은 결국 적군을 물리치고 수도 서울을 사수하는 쾌거를 낳았다.

  
장단·사천강지구 전투 의의 -수도 서울 지켜낸 쾌거…`불패신화' 국민 전폭 신뢰

한국 해병대는 휴전협정이 발효된 53년 7월 27일까지 16개월 동안 진행된 장단·사천강지구 전투에서 776명이 전사하고 3214명이 부상을 입었다. 중공군은 전사 1만4000여 명, 부상 1만1000여 명이라는 막대한 타격을 받았다. 해병대원들이 흘린 피 덕분에 군사분계선을 고착시킨 것이다.

 고수(固守) 방어로 전승을 거둔 한국 해병대는 이 전투에서 뚜렷하고 의미 있는 공적을 남겼다. 서울에서 휴전협정을 하겠다는 중공군 총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의 야욕을 보기 좋게 꺾었다. 또 약 8년이라는 기간 동안 파주 도라산 일대를 철벽 방어함으로써 수도 서울을 지켜냈다. 세계 전사에서 동일한 전선을 이처럼 장기간에 걸쳐 성공적으로 방어해 적을 격퇴시킨 사례는 한국 해병대가 유일하다.

 장단·사천강지구 전투는 ‘해병대 7대 작전’ 중 하나로 꼽히고 있으며, ‘불패신화’는 국민들로부터 전폭적인 신뢰를 받는 초석이 됐다.

 한국 해병대는 55년 1월 15일 경기 파주군 금촌면에서 제1상륙사단을 창설했다. 그리고 59년 3월 12일 수도 서울 절대 사수라는 위업을 완성하고 현재 위치인 포항으로 이동했다. 해병대는 2008년 10월 28일 이 지역에서 전사한 호국영령을 추모하는 승전탑 ‘해병대 파로비’(破虜碑)를 건립한 뒤 전우들의 고귀한 넋을 추모하고 있다.


윤병노 기자 < trylover@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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