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 비행학교⑸

입력 2011. 07. 08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6:58
0 댓글

이응호, 현대 한국항공사 비행선시대 열다


한국인 최초의 파일럿인 이응호로 추정되는 인물.(맨 왼쪽) 제1차 세계대전
에서 이응호의 활약상을 주요 기사로 보도한 ‘스탁튼 데일리 레코드’ 1918년
 12월 18일 자는 그를 ‘Young Lee’로도 부르고 있다.

 한국인 최초의 파일럿 이응호(미국명 George Lee)의 제1차 세계대전 중 행적은 신한민보를 통해서도 엿보이는데, 이를 통해 확인되는 이응호의 행적과 존재로 인해 현대 한국항공사는 비행선 시대부터 출발하게 된다.

 또 이응호를 필두로 그 시대에 공군력을 수단으로 독립전쟁을 준비했던 다른 한인 청년들과 이 같은 움직임을 조직화했던 임시정부 비행학교 때문에, 한국항공사는 민간이 선도한 항공을 군사력에 활용했던 미국·프랑스 등 항공선진국과 달리 군항공이 선행하고 민간항공이 뒤를 따르는 독특한 양상을 띠게 됐다.

 신한민보 1918년 12월 26일 자는 ‘한인 비행가 이 조지 씨… 6개월 동안 경력’이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이 조지 씨는 이번 전쟁에 비행가로 종군해 저명한 터이라 유럽에 건너가 6개월 동안 공기선을 타고 공중비행으로 법덕 양계를 주행하다가 이번 휴전조약 이후에 그 부친께 근친차로 돌아와 이번 15일에 당지에 도착하여 그 부친께 근친하고 유럽전쟁의 큰 경력담을 진술하였다더라”고 보도했다. 법덕 양계란 프랑스-독일 국경지대를 말한다.

 신한민보 1919년 1월 2일 자는 ‘스탁튼 데일리 레코드’(Stockton Daily Record: 1918년 12월 18일 자)를 주로 인용하면서 이응호가 “…(전략)…프랑스로 건너가 3개월 동안 비행연습하다가 바로 휴전조약하기 전에 공기선을 타고 156회를 실수 없이 비행하였음으로…(후략)…”라고 쓰고 있다. ‘이응호가 공기선을 탔다’는 내용은 원래 미국신문 기사에는 없던 것으로 신한민보가 자체적으로 추가한 것이다.

 위 두 신한민보 기사에 등장하는 ‘공기선’은 ‘비행선’(airship)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응호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처음에는 비행선 조종사였다가 나중에 비행기(airplane) 조종사로 전환했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끝까지 비행선 조종사였던 것 같다.

 이와 관련, 미군 항공사에 정통한 로버트 존슨 미 공군 중령(예)은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비행선이 정찰기로도 사용됐다. 당시 미군에서는 비행선 파일럿이 전투기 파일럿이 되기도 했기 때문에 조지 리의 행적은 더 조사해 봐야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응호가 전투기 조종사로도 활약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그가 비행선 조종사였다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에 현대 한국항공사는 비행선 시대에 시작됐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스탁튼 데일리 레코드’는 1918년 12월 18일 자에서 이응호의 계급을 상사(Sergeant)라고 쓰고 있다. 그러나 미군에서 ‘서전’은 한국군에서 하사~상사를 통칭하는 용어이기도 해서 이응호의 미군 제대 당시 계급은 아직 정확하지 않다.

 이응호의 계급과 관련, 존슨 중령은 “미군은 제1차 세계대전 때 비행부사관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초까지만 해도 비행부사관이 소수 있다가,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장교만이 조종사가 됐다”고 확인하고 “조지 리가 그 기간에 156회나 출격했다면 하늘에서 살다시피 해도 모자랄 경이적 기록”이라고 덧붙였다. 미국 연방항공청 고위관리이자 미국 국방대학재단이사이기도 한 체스터 장 박사도 “제1차 세계대전 때 미군에 비행부사관들이 있었다”고 확인했다.

 이와 관련, 장태한(UC Riversideㆍ소수인종학ㆍ‘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 소장) 교수는 “당시 미국은 인종차별이 합법적이었다. 이응호가 파일럿임에도 아시아계라서 장교 계급을 주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한민보 1919년 1월 2일 자는 “이응호가 장차 뉴욕에 사는 약혼자의 아버지가 소유한 고무공장에서 일하며 작은 가정을 이룰 것”이라는 요지로 보도하고 이 기사의 제목을 ‘비행가 이윤호(이응호의 오기) 씨는 다시 평민생활을 시작’이라고 붙였으나 막상 기사 내용에는 제대 여부에 대한 언급이 없어, 이응호는 이때를 전후해 제대한 것으로 보인다.

 이응호가 파일럿이 되기 위해 여러 차례 끈질긴 시도 끝에 미군에 입대한 직접적 동기는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당시 미군에 갔던 재미동포 청년들이 “전쟁술을 배워 조선 독립에 기여하겠다”는 시대정신을 공유했던 사실에 비춰볼 때 그도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추정을 뒷받침하는 유력한 근거는 신한민보 1919년 6월 7일 자로 이 신문은 “리 조지 씨는 장차 우리 국가에 유공한 도움이 되고자 전기기계학을 공부할 차로 6월 3일 뉴욕을 향해 출발했다더라”고 보도했다. 이응호가 전쟁이 끝나자 군복을 벗고 조국 독립에 보탬이 되도록 전기공학을 전공하기로 하고 부인이 기다리고 있던 뉴욕으로 떠났다는 얘기다.

 실제로 1920년에 작성된 미국 연방정부 인구조사자료도 이응호를 뉴욕 거주자로 기록하고 있으며, 신한민보 1920년 7월 8일 자는 “리 조지 씨는 작년에 미국 여자와 더불어 성혼해서 지금 뉴욕 성시에 거주하는데 거월 27일에 생남했다더라”고 보도했다.

 이응호의 조국 사랑은 아버지 이두형의 독립운동에 대한 열정과 인품으로부터도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의 원래 이름은 이원형으로 하와이 이민국 출입자 명단에도 그렇게 돼 있으나 나중에 미국에서 개명했다.(신한민보 1910년 2월 16일, 인천내리교회 자료)

 인천 내리교회 자료에 따르면, 이두형은 1903년 3월 30일 6∼7세 된 아들 이응호를 데리고 미국으로 갔다.

 이응호가 미군에 입대할 무렵 “이두형의 농토가 300에이커”라는 신한민보 보도(1917년 3월 8일)나, 이두형이 1913년 8월 안창호를 자기 집으로 초대하면서 “왕복 여비는 못 드려도 편도 여비는 부담하겠으며, 오시면 마차로 마중하겠습니다”는 요지의 편지를 띄운 것으로 봐서 이두형은 살림이 풍족한 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이두형은 대한인국민회 회원으로서 성실히 봉사하면서 소액이나마 기부도 오랜 기간 계속하고 한인 2세들을 위해 한글학교에서 봉사도 할 뿐만 아니라 3ㆍ1절 2주년 때는 혼자 있게 돼 다른 동포들과 함께 기념식을 치르지 못하자 “새벽 4시에 혼자 책상에서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해 만세삼창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인물이다.(신한민보 1921년 3월 17일)

 이두형은 앞서 인용한 편지에서 개인적으로 안창호의 자택방문을 초청하면서 안창호의 자녀에 대해 안부를 묻는 것으로 봐서 안창호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 같다.

 이응호의 한국이름과 관련, 신한민보는 이응효로 쓰기도 하고 이윤호로 쓰기도 하는 등 일관성이 없었으나, “1920년 2월 6일 자에 ‘본보 제517호 잡보란에 비행가 이윤호 씨는 이응호 씨로…(중략)…정오함’이라는 정정기사가 게재돼 있기 때문에 그의 한국이름은 이응호가 확실하다”고 홍윤정 박사(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는 밝혔다. 

<한우성 재미언론인 wshan416@stanford.edu>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0 댓글

오늘의 뉴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