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군 2월 공세 분쇄한 결정적 전투
2010년 5월 지평리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열린 지평리 전투 재현 행사에서 미 2사단 23연대 장병 역을 맡은 국군 장병들이 치열 |
경기 양평군 지평리(현 지평읍)에서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던 1951년 2월 13일 에드워드 알몬드 미 10군단장은 헬기를 타고 급하게 23연대로 향했다. 지평리를 방어하던 23연대장 폴 프리먼 대령은 늦어도 14일에는 철수해야 한다고 다시 한번 알몬드 군단장에게 건의했다.
알몬드 군단장은 연대 전력을 감안할 때 철수는 불가피하다고 생각하고, 이를 리지웨이 미 8군사령관에게 보고했다. 하지만 리지웨이의 입장은 여전히 단호했다. 리지웨이 장군은 “적이 이번 공세를 성공시키려면 지평리를 꼭 점령해야 한다”며 “아군은 어떤 일이 있어도 지평리를 확보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프리먼 연대장의 구상
이 같은 상황에서 23연대장 프리먼 대령은 지평리에서 전후좌우를 모두 방어할 수 있는 사주방어선을 편성해 방어전을 펴는 것 외엔 대안이 없었다. 원래 지평리 주변 직경 5㎞ 내에는 300m 내외의 고지가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방어선을 펴기에 적합했다. 하지만 방어선은 둘레 18㎞에 달해 4개 보병대대만으로는 배치할 병력이 모자랐다.
결국 프리먼 대령은 길이 1.6㎞의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북쪽에 1대대, 동쪽 3대대, 남쪽 2대대를 배치했으며 서쪽에는 몽클라르 중령이 지휘하는 프랑스군 대대를 배치했다. 물론 이 진지도 둘레가 6㎞나 돼 4개대대로 완벽하게 방어하기엔 한계가 있었다.
프리먼 23연대장은 이런 사정을 고려해 예비대를 최대한 축소했다. 연대 전체 예비대로서 단 1개 중대만 확보하고, 각 대대의 예비대로 각 1개 소대만 할당했다. 그 외 병력은 모조리 방어진지의 제1선에 투입했다.
▶중공군의 포진
이에 앞서 2월 12일 중공군 총사령원 펑더화이로부터 작전지휘를 위임받은 덩화 부사령원은 126사단을 투입, 지평리 남쪽 곡수리를 점령해 여주 이포리와 이천으로 향하는 도로를 차단토록 했다. 116사단도 양평 단석리를 점령해 여주와 원주 문막리로 연결되는 도로를 막도록 조치했다.
이 같은 중공군의 계획에 따라 13일 주간 무렵에는 중공군 116사단과 126사단이 지평리 주변으로 연결되는 도로를 차례로 차단했다. 13일 오후 5시 30분부터 40군 119사단의 3개 연대, 42군 126사단의 2개 연대 등 총 6개 연대가 공격을 위한 이동을 개시했다. 해가 지자 지평리 주변의 중공군은 일제히 횃불을 올려 미군을 심리적으로 압박했다. 미군들로 하여금 “너희들은 완전히 포위됐다”고 심리적으로 압박할 의도였다.
▶13일의 대혈전
13일 저녁 해가 지자 중공군은 특유의 피리 소리에 맞춰 돌격을 감행해 왔다. 미군은 105㎜와 155㎜ 곡사포로 1문당 250발에 달하는 맹렬한 포격을 감행했으나 중공군은 좀처럼 공격의 파도를 멈추지 않았다. 격퇴했다 싶으면 또 어느새 접근한 중공군이 미군 진지로 접근해 수류탄을 던졌다.
그 와중에 중공군도 미 23연대 지휘소(CP) 주변에 300발의 포격을 감행해 프리먼 23연대장이 부상을 입었다. 프리먼 23연대장은 부상을 당한 상태에서도 부대 지휘를 계속했고, 평소 연대장을 믿고 따르던 23연대 장병들은 그런 상관의 모습에 오히려 더욱 힘을 내어 전투를 계속했다.
미군이 끈질기게 저항을 계속하자 중공군은 39군 115사단 소속 2개 연대를 추가로 투입했지만 진지 일부를 탈취했을 뿐 지평리 전체를 장악하는 데는 실패했다. 14일 아침 해가 떠오르고 미 공군의 근접항공지원이 재개되면서 23연대는 고비를 넘기게 됐다.
▶G중대의 위기
중공군의 덩화 부사령원은 14일 밤 계획을 일부 조정해 115사단 2개 연대, 119사단 3개 연대와 126사단 1개 연대 등 또다시 6개 연대 규모의 공격부대를 편성해 공격을 재개했다. 밤 10시 무렵부터 아군이 쏘는 조명탄과 중공군이 쏘아대는 신호탄이 전투 지역 상공을 온갖 색깔로 물들이는 가운데 대혈전이 벌어졌다.
14일 자정이 다가오면서 진지 남쪽을 담당하고 있는 23연대 2대대 G중대 정면으로 중공군이 맹렬한 육탄 돌격을 거듭했다. 철조망이 모자라 G중대 정면에만 철조망을 설치하지 못했는데 중공군이 이를 알고 집중적으로 노린 것이다.
G중대에 인접한 프랑스군 대대쪽으로도 중공군은 마치 인명의 손실을 신경 쓰지 않는 듯한 태도로 반복적으로 병력을 투입해 공격을 거듭했다. 15일 새벽 2시 G중대의 일부 진지가 마침내 붕괴되기 시작했다. 새벽 3시에는 G중대 진지 전체가 중공군에 점령됐다.
▶프랑스군의 분전
프리먼 대령은 병력 부족으로 대부분의 병력을 최일선에 배치하고 예비대는 소규모로만 보유했기 때문에 G중대 진지의 붕괴는 곧 전체 방어선의 붕괴로 연결될 위험이 있었다. 프리먼 대령은 2개 소대 규모의 예비대를 투입했지만, 이렇게 적은 병력으로 이미 빼앗긴 G중대의 진지를 되찾을 수는 없었다. 결국 G중대 잔존 병력과 예비대들은 G중대 후방 200m에 새로운 진지를 편성해 저항을 계속했다.
G중대가 후방으로 물러나자 바로 옆에서 방어전을 펴던 프랑스군 대대도 위기에 빠졌다. 정면뿐만 아니라 측면에서도 중공군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프랑스군은 중공군 나팔에 대응해 사이렌을 울리는 등 조금도 굴하지 않고 의연하게 방어선을 지켰다. 실제 계급은 중장이면서도 대대급 부대를 지휘하기 위해 중령 계급으로 한국에 파병된 몽클라르 프랑스군 대대장은 부하들과 함께 소총에 착검을 하고 백병전으로 중공군에 맞섰다.
백병전을 불사하면서 버텨내는 미 23연대와 프랑스군 대대의 결사 항전에는 중공군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결국 15일 아침 중공군은 또다시 공격을 멈추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5기병연대의 도박
미23연대가 지평리에서 혈전을 계속하자 리지웨이 8군사령관도 초조해졌다. 미23연대의 방어전은 단순한 1개 연대의 방어전이 아니라 유엔군이 과연 중공군의 포위 공격에 버텨낼 수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시험대였다. 의도적으로 철수를 승인하지 않은 23연대가 적에게 포위 섬멸될 경우 아군에게 미칠 심리적 악영향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리지웨이 8군사령관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23연대를 구원하도록 지시했다. 몇 차례의 구출 시도가 실패한 상태에서 마지막으로 구출 책임을 맡게 된 부대는 미 5기병연대였다. 5기병연대장 마르셀 크롬베즈 대령은 사력을 다했으나 15일 정오께 지평리에서 6㎞ 정도 떨어진 양평 곡수리에 겨우 도달했다.
크롬베즈 대령은 현재의 진격 속도로는 15일 해가 질 때까지도 23연대로 향하는 길을 뚫을 수 없다는 점 때문에 고민했다. 해가 지면 중공군은 또다시 공격을 재개할 것이고 16일 새벽까지 23연대가 버틸지는 아무도 몰랐다. 고민하던 크롬베즈 대령은 전차 23대에 병력 160명을 탑승시켜 적진을 돌파하기로 했다. 한국처럼 도로 주변에 산이 많은 지형에서 전차를 일렬 종대로 돌격하는 것은 무모한 작전이었으나 달리 대안이 없었다.
▶지평리 전투의 의미
15일 오후 3시 45분 미 공군의 근접항공지원을 받으며 크롬베즈 대령이 지휘하는 전차 종대는 돌격을 시작했다. 중공군은 박격포와 로켓포 사격을 퍼부으며 전차들의 돌격을 저지하려 했다. 하지만 이런 무기로는 전차 위에 탑승한 보병들만 제압할 수 있었을 뿐 전차 자체를 막을 순 없었다.
결국 이날 오후 5시 크롬베즈 대령이 지휘하는 전차 23대는 위풍당당하게 23연대의 방어진지에 도착, 23연대의 전차와 합세해 진지 주변의 중공군에게 맹렬한 전차포 사격을 가했다. 미군 증원 병력이 도착하자 15일 밤 중공군은 더 이상 공세작전을 포기하고 포위망을 유지하다 다음날 철수하고 말았다. 지평리를 결전장으로 삼은 리지웨이 미8군사령관의 결단이 중공군 2월 공세를 결국 무산시킨 것이다.
지평리 전투의 승리는 중공군 참전 이후 사기가 떨어진 미군이 자신감을 되찾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인천상륙작전, 중공군 2차 공세에 이어 6·25 전쟁의 흐름을 다시 바꾼 결정적 전투가 됐다. 전선 붕괴의 위기 속에서 미 8군사령관으로 부임한 리지웨이 장군의 입장에서도 자신의 지휘 능력을 입증한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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