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배우 엄 기 준

입력 2010. 07. 08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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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초 군 생활 `지금의 나' 이룬 버팀목


이제까지 수많은 뮤지컬과 연극 무대를 통해 깔끔하고 지적인 이미지만을 보여 준 엄기준. 스크린 데뷔작 ‘파괴된 사나이’
에서 잔혹한 유괴범 ‘최병철’ 역으로 분해 관객들에게 뜨거운 호응을 받고 있다.                      데이지엔터테인먼트 제공


첫 스크린 데뷔작부터 범상치 않다. ‘연기본좌’로 불리는 김명민과 맞대결을 펼치는 것도 모자라 상습적으로 아이를 유괴하는 악역이다.

지난 1일 개봉한 영화 ‘파괴된 사나이’에서 사이코패스 역할을 맡은 엄기준은 뮤지컬 배우로 두터운 팬층을 거느린 스타. 안방극장에서 만난 그의 캐릭터는 다소 엉뚱한 엘리트 아나운서(시트콤 ‘김치치즈 스마일’)부터 냉소적인 PD(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까지 흔한 역할이 대부분이었다.

쉽게 마주칠 수 있는 평범한 역할부터 무대를 휘어잡는 폭발적인 카리스마를 갖춘 그지만 한때는 연기를 포기할 만큼 힘든 순간을 겪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 치열했던 고민의 시간들은 20대 초반 군 복무 시절에 있었는데 이제는 “일찌감치 다녀온 군대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고. 그 숨겨진 뒷이야기를 들어봤다.

“저 군대 말뚝 박으려고 했던 거 아세요?”

 생각보다 작은 키라고 여겼는데, 일어서서 인사하는 모습을 보니 탄탄한 근육이 겉옷 위로 드러날 정도로 훤칠하다. 목사의 어린 딸을 유괴한 후 8년이나 가둬 키워놓은 영화를 먼저 봐서일까. 왠지 모를 거리감이 곧 그의 선한 눈매에서 사르르 녹아버린다.

 “배우라면 누구나 뼛속까지 악역을 한 번쯤 꿈꾸는데 ‘파괴된 사나이’가 그 한을 풀어줬어요. 연극부터 뮤지컬, 방송도 호흡이 빠른 시트콤부터 쪽 대본이 나오는 드라마까지 모든 장르를 겪어봤지만, 캐릭터에 대한 갈증은 해소되지 않더라고요. 첫 스크린 데뷔작부터 평소 하고 싶었던 역할을 맡아서인지 현장에서 힘든지도 모르고 신나게 날아다녔죠. (웃음)”

 선배 배우이자 연기 완벽주의자로 불리는 김명민이 “기초가 잘돼 있어서인지 말도 잘 통하고 이해력이 빠르다. 그 어떤 배우보다 단시간에 친해질 수 있었다”고 했던 칭찬은 거짓이 아니었다. 여러 장르를 거치며 다져진 다양한 경험은 실감 나는 연기력으로 김명민의 카리스마에 결코 뒤지지 않을 정도로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98년도 제대를 앞두고 병으로 전역 후 4년간 부사관 근무를 할까 심각하게 고민했어요. 제가 95군번이라 그 당시 26개월 복무 중에 집안이 기울어서 연기를 계속할 상황이 아니었거든요. 하사 마치면 돈도 제법 모으니까 군에 남겠다 했더니 어머니가 엄청 우시더라고요.”

 그렇다고 단순히 군대를 도피처로 생각한 건 아니었다.

강원도 최전방에서 근무수당을 받으며 복무했던 을지부대에 대한 남다른 애정도 한몫을 했다. 전방이었기에 더욱 대원들을 배려해 주고 구타도 없었던 화기애애한 부대 분위기가 막연히 강압적일 거라 여겼던 군대에 대한 선입견을 사라지게 했던 것. 집안의 막내로 자랐지만, 누나와 부모님을 누구보다 생각했던 그가 평생 꿈이었던 배우의 길을 접을 생각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했던 순간이다.

 “제가 배우가 된다고 했을 때도 저희 어머닌 흔쾌히 허락하실 만큼 연세에 비해 깨어 있으신 분이셨어요. ‘그 각오로 나와서 하고 싶은 거 해라. 너한테 평생 원망 듣고 싶지 않다. 대신 밀어주진 못한다’며 돌려 말씀하시는데…. 그때의 굳은 결심이 지금의 저를 있게 만들었죠.”

 같이 연기한 후배가 군대에 입대할 때 누구보다 사실적인 조언을 해주는 것도 엄기준의 몫이다. 올해 초 종영한 드라마 ‘히어로’에서 친해진 이준기의 입대가 정해졌을 때도 3일 가까이 함께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 것도 그였다.

 “공통적으로 해주는 얘기는 하나예요. 이왕 가는 거면 최대한 빨리 갔다 오라고. 사실 동기나 고참이 나보다 어리면 불편하긴 하잖아요. 속으로는 안쓰러운데도 준기한테 ‘너보다 7~8년 어린 고참한테 당해봐라’며 놀리긴 했지만(웃음) 그때의 경험은 배우로서 분명히 자양분이 되니까 후회 없이 갔다 오라고 말해줬어요.”

 지금에야 군 복무 기간이 좀 단축되긴 했지만, 국방의 의무가 사라지기보다는 지금보다 기간이 줄어들었으면 하는 것도 군대를 다녀온 입장에서 갖는 작은 바람이기도 하다며 웃는 그의 모습엔 다양한 인간군상을 연기로 표현해 내는 배우로서의 긴장감은 그대로 간직한 채 약간의 여유가 묻어났다.

 “요즘엔 고참이 혼내거나 벌주는 일도 별로 없다면서요? 저 때는 원산폭격도 당하고 혼도 많이 나 봐서 알지만 요즘 군대 많이 좋아진 만큼 제대로 군 복무하는 후배들이 많이 늘어났으면 좋겠어요.”

 <이희승 씨티신문기자 rochaz@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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