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모에서 미사일까지〈42〉국산 무기개발 비화

입력 2002. 08. 14   00:00
업데이트 2013. 01. 04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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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 ㎜자주포 K-9 ②


“거스 히딩크의 성공을 많이 이야기하는데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국 대표팀의 역대 감독들이 한 역할이 히딩크 성공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동시에 우리 팀이 보여준 놀라운 체력도 국력의 뒷받침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강한 국력을 만들어 낸 기성세대의 피와 눈물과 땀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체력과 선전이 가능했습니다.”

국방과학연구소장을 역임한 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원장·과학기술부장관을 지낸 서정욱(徐廷旭) 박사가 지난 6월22일 무역협회가 주최한 `동북아 비즈니스 중심국가 프로젝트' 토론회에 참석, 당시 화두로 꼽히던 히딩크의 성공 사례와 관련해 일침(一針)을 가하듯 한 말이다.

서박사는 어떤 한 개인의 핵심적·주도적 역할을 높이 평가하기에 앞서 현재의 훌륭한 결실이 가능하게끔 과거로부터 쌓고 다져 온 역량과 기반을 강조하고 있다.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 는 사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원인 없는 결과 또한 없는 것이고 보면 오늘 우리가 `업적'이라고 부르는 것들의 근원을 뒤돌아보는 것 또한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K-9 자주포 역시 마찬가지. K-9은 20세기를 마감하는 시점에서 우리의 국방과학기술이 10여 년에 걸쳐 빚어낸 주요 업적 중 하나이다. 그러나 K-9사업에 참여한 현재 국방과학연구소 연구인력과 그들만의 과학기술로 개발에 성공한 것은 아니다. 비록 국과연 주도의 개발사업이었다 할지라도 100여 개의 시제(試製)·협력업체, 그리고 대학 등의 연구소 인력이 K-9 개발을 위해 힘을 모았다. 또한 1970년대 박격포 등을 모방 개발한 시기까지 더한다면 K-9이 탄생하기까지에는 10년이 아닌 30여 년의 세월과 노력이 들어갔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할 것이다.

돌이켜볼 때 우리나라 무기체계 역사에서 가장 자랑할 만한 것으로 `화포'를 빼놓을 수 없다. 고려 말 최무선이 흑색화약을 개발하는 데 성공하고 1377년에는 국가 공인 화약 ·화기 제조기구로 화통도감을 설치, 화포시대를 열었다. 특히 1555년에는 구경 130㎜, 무게 300㎏의 천자총통을 제조하는 등 오랜 화포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현대에 와서는 70년대까지 우리 손으로 제대로 만들어 낸 총포류는 하나도 없었다. 창군 이후 우리 군은 105㎜ M3 곡사포를 시작으로 70년대 중반까지 155㎜ 곡사포 ·평사포, 8인치 자주 ·견인곡사포, 175㎜ 무포탑형 자주곡사포 등으로 무장해 전투종심을 증가시킬 수 있는 포병화력을 구비했으나 대부분 미국의 군원 또는 베트남전 참전 대가로 인수한 것들이었다.

국산 화포가 등장한 것은 국과연 창설 이후. 71년부터 추진된 `번개사업'에 의해 개발한 60㎜ 박격포(M19), 81㎜ 박격포(M29)가 시초를 이루며 4.2인치 박격포 ·105㎜ 견인곡사포가 그 뒤를 잇는다. 물론 견본 장비를 획득한 후 이를 역설계하거나 장비의 기술자료(TDP)를 미국으로부터 도입, 한국화해 방산업체가 생산하는 전형적인 모방 개발 방식에 의한 것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국과연은 이때 미국 무기체계의 도면을 소화해 설계 ·제작할 수 있는 연구인력 ·기술력 ·개발 경험, 그리고 `독자적으로 무기체계를 개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쌓을 수 있었다.

70년대 말 우리 군은 북한에 비해 현저히 열세에 놓여 있던 포병능력을 보강하고자 사거리 20~30㎞ 급의 화포를 갈망하고 있었다.
국과연은 여기에 발맞춰 155㎜ KM114A2 견인곡사포를 국내 모방 개발하는 한편 설계에서 양산까지 독자적인 105 ·155㎜ 곡사포 개발에 돌입한다. 이것이 KH178 ·KH179 개발사업으로 국산 화포 개발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이루게 된다.

〈신인호 기자 idmz@dapis.go.kr〉

신인호 기자 idmz@dapis.go.kr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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