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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민주·애국의 길을 걷다] 단풍잎 묘역… 파란 눈 영웅 여기 잠들다…검은 눈 후손 함께 기리다

맹수열

입력 2026. 07. 14   16:45
업데이트 2026. 07. 14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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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민주·애국의 길을 걷다 - ‘상생과 연대’의 부산

6·25전쟁 당시 ‘피란수도’ 부산 
치열한 삶의 역사는 여전해
생면부지 땅서 전사 2300여 명 영웅
세계서 유일한 묘지 ‘유엔기념공원’

모든 것이 불확실한, 하루하루를 이어 가는 것조차 힘겨웠던 시절. 6·25전쟁 당시 ‘피란수도’였던 부산은 수많은 이의 아픔과 희망이 뒤엉킨 ‘삶의 용광로’였다. 1950년 8월 18일부터 1953년 8월 15일 서울 환도까지 1023일. 부산시민과 피란민들이 힘겨운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힘은 서로를 향한 믿음과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희망이었다. 전쟁을 이겨 내고 지금의 눈부신 대한민국의 발전을 이룬 원동력인 ‘상생’과 ‘연대’의 힘을 부산에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글=맹수열/사진=한재호 기자

 

부산 유엔기념공원 캐나다군 묘역에서 바라본 묘역 전경. 캐나다 한국참전기념사업회가 조성한 조형물 뒤로 유엔기와 6·25전쟁 참전국들의 국기가 나부끼고 있다.
부산 유엔기념공원 캐나다군 묘역에서 바라본 묘역 전경. 캐나다 한국참전기념사업회가 조성한 조형물 뒤로 유엔기와 6·25전쟁 참전국들의 국기가 나부끼고 있다.


인도주의적 원조의 역사가 그대로

피란수도 부산은 전쟁 당시 대한민국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이자 국제사회의 인도적 지원이 시작되는 관문이었다. 특히 부산 중구는 미국대사관 겸 미국공보원을 중심으로 한 ‘재건’의 중심이었다.

 

현재는 부산근현대역사관 별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의 역사부터 파란만장하다. 원주인은 1929년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 일제의 대표적인 경제수탈기구였던 이 건물은 광복과 함께 미군이 차지했다. 미군은 부산에 진주한 장병들의 숙소로 이 건물을 이용하다가 전쟁 이후 한미 소통창구인 미국대사관으로 활용했다. 미국대사관은 유엔과 세계 각국을 연결하며 전쟁을 극복하고 대한민국을 재건하기 위한 외교 허브 역할을 했다. 소통과 교류를 위한 미국공보원도 같은 건물에 있었다. 근대 합리주의 양식이 도입된 이 철근 콘크리트 건축물의 역사를 되짚어 보며 ‘쓰임새’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미국대사관의 존재는 이 일대를 재건의 장으로 만들었다. 대표적인 게 ‘구호의 성지’로 불리는 대한성공회 부산주교좌성당. 미국대사관에서 2차로를 건너 골목 안에 자리 잡은 성당은 전쟁 당시 고아원을 개원해 전쟁고아들을 돌봤다. 구호금을 모금하고 구호소를 설치·운영하기도 했다. 성당은 피란민의 보금자리이기도 했다. 성직자들은 부산으로 몰려온 피란민을 위해 종탑과 다락방까지 내주는 것은 물론 이들의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국방부 허가를 받아 ‘성공회 의용봉사단’을 결성하기도 했다. 성당은 모두가 힘들었던 그 시절 ‘아낌없이 주는 나무’ 역할을 했다. 

중구가 미군을 중심으로 돌아갔다면 부산진구는 유엔의 흔적이 진하게 남아 있다. 현재 부산시민공원으로 운영되는 하야리아기지는 유엔 기구의 국제협력 활동 장소였다. 1930년대 경마장으로 조성됐던 이곳도 광복 후 미군이 접수해 장교클럽으로 활용했다. 미국 플로리다주 하야리아시티의 경마장을 닮아 하야리아기지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피란수도 시기 하야리아기지는 미군·유엔군의 주둔지이자 유엔한국위원회, 유엔한국재건단 등 여러 기구가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부산 유엔기념공원 상징구역에서 육군53보병사단 장병들이 오후 4시를 기해 유엔기를 내리고 있다.
부산 유엔기념공원 상징구역에서 육군53보병사단 장병들이 오후 4시를 기해 유엔기를 내리고 있다.


시장과 비석문화마을에서 치열한 삶을 읽다


부산시민·피란민들이 생계를 이어 가던 삶의 현장도 여전하다. 그 유명한 국제시장과 부평깡통시장이 대표적인 곳. 길 하나를 사이에 놓고 펼쳐진 이 대규모 시장통은 무질서하고 시끌벅적하다는 뜻에서 ‘도떼기시장’으로 불리기도 했다. 물류의 중심인 부산에서도 가장 먼저 미군 물자 등을 확보할 수 있었던 두 시장은 피란민들이 정착한 삶의 공간이기도 했다.

두 시장이 가진 가장 강렬한 인상은 바로 ‘생명력’. 오랜 시간이 지나 상권의 중심에서 한 발 비켜 날 법하지만 여전히 국제시장과 부평깡통시장은 발 디딜 틈 없이 번잡하다. 다만 방문 목적만은 달라졌다. 과거 생활을 위해 시장을 찾던 이들에서 부산의 명물을 확인하기 위한 관광객으로 바뀐 것. 미국대사관 앞에서 만난 국제시장 상인 이옥주(66) 씨는 “유행이야 돌고 도는 것이지만, 그래도 국제시장은 여전히 건재하다”며 “시장의 젊은 상인들이 (발전을 위한) 새로운 길을 찾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씨의 말에서 ‘어떻게든 살아남는다’는 국제시장 상인들의 정신이 7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함을 느낄 수 있었다.


산비탈에 자리 잡은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의 삶은 한층 더 처절했다. 구한말 일본인 거류민단이 들어오면서 빈민촌이었던 이곳은 일본인의 공동묘지가 됐다. 전쟁 이후 밀려 들어온 피란민들은 더 이상 자리 잡을 곳이 없자 묘지 위에 그대로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이곳에서는 지금도 묘지 비석 등이 계단, 담장, 옹벽, 주춧돌 등 여러 형태로 남아 있다. 심지어 액화석유가스(LPG)통 받침대로 사용되는 비석도 있다. 비석 한쪽에 쓰인 ‘다이쇼(大正)’ ‘쇼와(昭和)’ 등의 문구는 비석 주인이 언제 사망했는지를 알게 한다.

도로 정비가 불가능했던 그 시절 쪽방촌답게 비석문화마을은 구불구불한 좁은 길이 미로처럼 이어져 있다. 탐방지도를 들고도 목적지를 찾지 못해 헤맬 수밖에 없었다. 기어이 도착한 마을의 끝. 하늘과 맞닿은 이곳에서 피란민들은 어떤 꿈을 꿨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6·25전쟁 당시 ‘재건’의 중심지였던 미국대사관 겸 미국공보원.
6·25전쟁 당시 ‘재건’의 중심지였던 미국대사관 겸 미국공보원.

 

피란민들을 수용하던 대한성공회 부산주교좌성당.
피란민들을 수용하던 대한성공회 부산주교좌성당.

 

전쟁 당시 피란민과 부산시민들의 삶의 터전이 된 국제시장.
전쟁 당시 피란민과 부산시민들의 삶의 터전이 된 국제시장.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에 지어진 주택.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에 지어진 주택.


‘세계 유일’ 유엔기념공원

세계 유일의 유엔군 묘지인 유엔기념공원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상생의 상징이다. 대한민국의 평화와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친 2300여 명의 유엔군 호국영웅이 잠든 이곳은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월 전사자 매장을 위해 유엔군사령부가 조성했다. 같은 해 4월 묘지가 완공된 뒤 개성, 인천, 대전, 대구, 마산 등 각지에 가매장됐던 유엔군 전몰장병의 유해가 줄이어 이곳에 도착했다.

유엔기념공원은 살아 돌아간 자들의 마지막 귀환처이기도 하다. 고국으로 돌아간 참전용사들이 안장지로 선택하는 경우가 늘면서 생긴 현상이다. 2015년 5월 프랑스 참전용사인 고(故) 레몽 베르나르를 시작으로 지난 5월 프랑스 참전용사인 고 앙드레 다차리·자크 그리졸레가 생전 뜻에 따라 이곳에 잠들면서 사후 안장자는 현재 37명으로 늘었다.

이런 이유로 유엔기념공원을 찾는 외국인 유가족도 많다. 기자가 방문한 지난 6일에도 ‘검은 눈의 이방인들’이 눈에 띄었다. 공원 한편에 마련된 기념관에서 각국의 활약상을 유심히 살펴보던 한 무리의 가족이 그들. 이 가운데는 아직 솜털이 보송보송한 어린이도 있었다. 자신을 11세 앨런이라고 소개한 이 어린이는 외증조부가 호주군 참전용사인 동시에 부계는 한국에서 건너간 이민자 가족이었다.

“호주에서도 K팝이 유명해지면서 한국에 관심이 아주 많아요. 저에게는 할아버지의 나라이기도 하고요. 부모님과 한국여행을 왔는데, 어머니가 ‘부산에 외증조부가 묻혀 있다’고 해 들렀어요.”

앨런에게 묘역은 어떤 이미지로 다가왔을까? 기자의 질문에 그는 씩씩하게 답했다.

“제가 호주에서 즐겁게 살 수 있는 힘이 된 것 같아요. 외증조부께서 이 나라를 위해 싸워 주시지 않았다면 할아버지께서 호주로 오실 수 없었을지 모르잖아요. 이 멋진 나라를 지켜 준 외증조부에게 너무 감사드립니다.”

생면부지의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전사한 참전용사들을 기리고자 각국은 묘역에 다양한 조형물을 설치했다. 눈길을 끈 것은 캐나다가 조성한 동상. 조각된 군인은 모자도, 무기도, 부대 표시도 없는 소박한 군복을 입고 있다. 격식 없이 자연스럽게 웃는 이 캐나다 군인의 곁엔 한국인 소년·소녀가 두 나라를 상징하는 무궁화, 단풍잎 꽃다발을 들고 있다. 꽃과 단풍잎 수는 총 21개. 아직 찾지 못한 캐나다군 실종자 21명을 상징한다. 다정한 표정의 군인과 옅은 미소를 띤 소년·소녀. 포화 속에서도 서로에게 기대며 희망을 잃지 않았던 상생과 연대의 힘을 동상에서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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