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군사 클래식과 함께하는 전쟁사

악마의 최후를 전한 나치독일 장송곡

입력 2026. 06. 16   16:20
업데이트 2026. 06. 16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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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과 함께하는 전쟁사』
  히틀러의 죽음과 종전, 그리고 안톤 브루크너

1945년 4월 베를린을 점령한 뒤 의회의사당에 붉은 기를 게양하는 소련군 모습. 필자제공
1945년 4월 베를린을 점령한 뒤 의회의사당에 붉은 기를 게양하는 소련군 모습. 필자제공


나치 독일군은 1943년 들어 대부분 지역에서 연합군의 공세를 받으며 수세에 몰렸다.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독일은 전쟁물자 보급과 병력 충원에 제한을 받은 반면 연합군은 미국의 가세로 이전보다 훨씬 원활해졌다. 1943년 중순부터 연합군 폭격기가 독일에 대한 전략공습을 시작했다. 1943년 말부터 1944년 초 연합군은 이탈리아 북부에 상륙한 뒤 남부로 진격했다. 그리고 6월 6일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함으로써 독일은 이제 서쪽으로는 미국과 영국 연합군, 동쪽으로는 소련군의 공격을 받게 됐다. 

베를린으로 향하는 소련군의 반격
스탈린그라드전투에서 패한 독일군은 우크라이나 방면으로 철수했다. 소련군은 1943년 중반부터 대대적인 공세로 전환했다. 첫 번째 결전지는 쿠르스크였다. 독일도 다시 총반격을 가해 동부전선의 주도권을 되찾고자 ‘치타델레(Zitadelle·요새안의 독립된 작은 보루) 작전’을 계획했다. 히틀러는 여기에 90만여 명의 병력과 약 2700대가 넘는 전차를 투입했다. 이는 당시 독일군 전차의 약 70%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그러나 작전이 5월에서 7월로 연기되면서 소련군은 8중의 종심 방어선을 구축, 독일 기갑부대를 최대한 소진시킨 뒤 역습한다는 계획을 발전시켰다. 이 개념은 적중했다. 독일군은 정면 돌파 과정에서 엄청난 피해를 받았다. 보급지원이 원활치 않아 추가 공격도 어려웠다. 

쿠르스크에서 패한 독일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1941년 10월 만든 레닌그라드 포위망도 배후가 차단될 우려로 풀어야만 했다. 주도권을 잡은 소련군은 공세로 전환, 우크라이나의 드네프르강을 건너 11월 키예프를 탈환하고 서부로 진격했다. 특히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시기를 맞춰 실시한 ‘바그라티온(나폴레옹 전쟁 당시 소련의 장군 이름) 작전’을 통해 벨라루스와 폴란드를 탈환함으로써 이제 베를린 입성은 시간문제가 됐다.

노르망디에서 엘베강으로 향하는 연합군
노르망디 상륙 후 8월 파리를 탈환한 미군과 영국군은 독일 방면으로 진격의 고삐를 당겼다. 하지만 독일군의 저항도 필사적이었고 연합군의 보급선이 길어지며 진격에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9월 네덜란드의 라인강 교량을 확보하기 위해 몽고메리 장군이 주도했던 ‘마켓가든작전(Operation Market Garden)’이 실패했고, 12월에는 독일군이 아르덴숲을 통해 마지막 대규모 반격을 감행함에 따라 공방전을 벌이면서 독일로의 진격 속도는 크게 둔화되고 지체됐다. 

1945년 3월, 미군과 영국군은 마침내 독일 국경지대의 라인강을 건너 독일 내륙으로 진출했다. 이어 독일의 군수 산업지대인 루르지역을 포위해 독일군을 무력화했고, 독일 서·남쪽 중요 도시를 점령해 나갔다. 그리고 1945년 4월 25일 독일 중동부 토르가우 엘베강다리 위에서 소련군과 만나면서 독일 협공을 위한 연합군의 큰 그림을 완성했다. 미군과 영국 연합군의 진격은 대체로 엘베강을 연하는 선까지였고, 베를린에는 소련군이 입성했다.

브루크너 동상 앞에서 그를 추모하는 히틀러. 필자제공
브루크너 동상 앞에서 그를 추모하는 히틀러. 필자제공


베를린 함락과 최후의 순간
1945년 1월부터 소련군은 폴란드를 통과해 독일 국경인 오데르강까지 진격함으로써 이제 베를린까지는 60~70㎞밖에 남지 않은 거리에 도달했다. 4월 16일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와 이반 코네프 원수가 이끄는 250만 명의 병력과 6000여 대의 전차·장갑차, 수천 문의 화포가 동쪽과 남쪽에서 베를린을 향해 대공세를 시작했다. 특히 4월 16일부터 19일까지 베를린 동쪽 약 90㎞ 지점의 젤로고지에서는 치열한 공방전이 펼쳐졌다. 젤로고지는 베를린으로 진격하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관문 역할을 하는 곳이라 독일군도 완강히 저항했으나 끝내 무너졌다. 

4월 21일에는 1벨로루시 전선군이 베를린 외곽에 진입했고, 25일에는 도시를 완전히 포위했다. 이후 베를린 시내에서는 치열한 시가전이 전개됐다. 이제 히틀러의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결국 4월 30일, 그는 베를린 시내 총통관저 지하벙커에서 아내 에바 브라운과 함께 자살을 택했다. 히틀러의 전쟁이 종말을 맞는 순간이었다. 베를린 주둔 독일군은 5월 2일 항복했다. 이어 독일이 9일 항복문서에 서명함으로써 전쟁은 종식됐다.

히틀러의 죽음을 알리는 브루크너의 교향곡 7번 2악장
1945년 5월 1일 아침부터 독일 라디오에서는 종일 안톤 브루크너(1824~1896)의 ‘교향곡 7번’ 2악장이 흘러나오며 히틀러의 죽음을 알렸다. 2악장은 브루크너가 바그너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작곡한 음악이다. 낭만주의 음악을 꽃피운 브루크너와 바그너는 교류가 많았다. 브루크너는 바그너를 정말 좋아했고 존경했다. 그런 이유로 히틀러도 브루크너 음악을 좋아했고 감동받았다. 히틀러의 고향이 오스트리아 북부의 린츠(Linz)와 가까운 곳이었는데 공교롭게도 브루크너의 고향도 린츠 인근이어서 각별함을 갖고 있었다. 나치는 브루크너 음악의 부흥을 시도했다. 그의 음악이 독일 대중의 시대정신을 표현하고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 린츠의 브루크너 사립대학은 1932년 브루크너음대로 바뀌었고, 린츠의 교향악단도 브루크너 오케스트라 린츠가 됐다. 

히틀러는 1937년 독일 남부 레겐스부르크의 발할라(국가 영웅묘원)에 브루크너의 흉상을 세우고 기념식을 거행했다. 브루크너가 묻힌 린츠의 성플로리안 수도원을 브루크너의 원고 보관소로 개조할 계획까지 세웠다. 이렇게 오스트리아에 공을 들인 것은 정치적 목적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나치가 1938년 3월 오스트리아를 병합함에 따라 오스트리아 국민의 거부감을 완화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히틀러와 브루크너의 고향이 같은 린츠 지역이라는 점을 최대한 활용하려고 했다.

음악을 선전선동 수단으로 활용한 나치
브루크너의 7번 교향곡은 그의 11개 교향곡 중 하나로 1883년 완성됐다. 당시 많은 작곡가가 바그너의 영향을 받았다. 이를 바그네리안(Wagnerian·바그너 음악 숭배자들)이라 불렀다. 낭만주의 시대 음악을 이끌던 말러, 슈트라우스, 리스트 등이 이에 해당한다. 브루크너의 7번 교향곡은 전통적인 4악장으로 단조가 아니라 장조의 곡이다. 그럼에도 2악장이 바그너의 죽음을 애도하는 비장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은 매우 특징적이다. 브루크너는 이 곡을 발표한 뒤 극찬을 받았다. 

바그너와 브루크너 외에 당시 나치 정권이 정치적으로 활용한 작곡가가 있었다. 후기 낭만주의 작곡가로 잘 알려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1864~1949)다. 그는 뮌헨에서 태어나 베를린에서 주로 활동했고, 교향곡과 오페라 작곡 등을 통해 음악계에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나치 정권은 1930년대 그를 제국음악원 총재로 임명했다. 1936년에는 베를린 올림픽의 송가를 작곡하고 지휘했다.

하지만 그는 친나치주의자가 아니었기에 때로는 대립하고 갈등도 있었다. 다만 그의 모호함은 며느리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나치 정권의 탄압으로부터 며느리와 손자를 보호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었나 한다. 후대의 평가도 대부분 이를 인정한다.

필자 서천규(군사학 박사) 전 국방부 군비통제검증단장은 2작전사 작전처장과 육군대학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성대 특임교수와 한국군사문제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필자 서천규(군사학 박사) 전 국방부 군비통제검증단장은 2작전사 작전처장과 육군대학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성대 특임교수와 한국군사문제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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