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교양 패션의 역사

역사의 변화 맞춰 직조해온 실루엣... 세계衣 질서를 걸치다

입력 2026. 06. 08   16:24
업데이트 2026. 06. 08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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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예술
시대를 관통한 남성복의 서사 

권력·계급 드러내기 위한 과시형 의복
산업혁명·전쟁·금융산업 성장 겪으며
효율·쾌적함 갖춘 도시적 유니폼 진화
남성성의 사회적 인식 변화 복합적 반영

1990년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공식 광고 캠페인에서 ‘언컨슈트’를 착용하고 있는 남성들. 필자 제공
1990년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공식 광고 캠페인에서 ‘언컨슈트’를 착용하고 있는 남성들. 필자 제공


남성복은 인류의 일상 속에서 권력과 계급, 시대의 기술적 진보를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구조물이다. 어깨를 강조하는 재킷의 패드나 활동성을 보장하는 바지의 봉제선은 단순한 미적 취향의 결과물이 아니라 당대 복식 양식과 사회적 질서가 개인의 신체 위에 투영된 형태다. 고대의 조각상에서 엿볼 수 있는 느슨한 튜닉에서부터 현대 도시인의 체형을 빈틈없이 감싸는 테일러드 슈트에 이르기까지 남성이 몸을 가리고 치장하는 방식은 늘 그가 속한 세계의 주도권을 묻는 지표였다.

철갑과 사슬이 전장의 생존을 위한 원초적 도구였다면 남성들의 일상복은 고도화된 자본주의 공간에서 개인이 자신의 위치를 규정하고 군중 속으로 기꺼이 편입하기 위해 입는 사회적 피부라고 할 수 있다. 시대를 관통하며 남성복이 취해온 단단하고도 유연한 실루엣의 변화는 인류가 물리적 제약을 극복하고 전 세계적 상업망을 직조해 온 거대한 서사 자체다. 

기원전 3000년경 미노아 문명을 기점으로 태동한 서양 고대 문명과 기원전 1600년경 상나라로 대표되는 동양 고대 문명에서 남성 의복은 대체로 직물을 자르지 않고 몸에 두르는 드레이퍼리 형식을 취했다. 로마 공화정·제정 시기 토가는 묵직한 모직물을 수십 미터씩 몸에 감아 늘어뜨림으로써 육체 노동으로부터 철저히 면제된 상류층의 특권과 권위를 과시하는 거대한 조형물이었다.

그러나 476년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유라시아 대륙의 패권이 북방 유목민에게 넘어가면서 남성복의 지형도는 급격히 뒤집힌다. 말을 타기 위해 고안된 바지와 몸에 밀착되는 튜닉은 농경 제국의 해체 이후 철저한 군사력과 실용성이 지배하는 중세 질서에 완벽히 부합하는 복식이었다. 십자군 전쟁을 거치며 이슬람 문명권으로부터 정교한 직조 기술과 재단법이 유입되면서 서유럽의 남성복은 비로소 인체의 곡선을 따라 천을 자르고 꿰매는 테일러링의 영역으로 진입했다.

15세기에 이르러 남성 복식은 상반신을 극단적으로 부풀리고 하반신은 타이츠로 조여 다리 근육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과시적 형태로 발전했다. 이는 중앙집권적 영토국가의 기틀을 다지며 무력을 과시하고자 했던 봉건 귀족의 호전적인 심리를 고스란히 반영한 것이었다.

1492년 콜럼버스의 대서양 횡단으로 본격화된 해양 개척과 세계 무역망의 확장은 남성복 소재와 장식기법을 크게 변화시키며 새로운 패션 문화를 형성했다. 신대륙에서 유입된 염료와 아시아의 비단은 유럽 궁정 문화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근세 남성복은 레이스, 리본, 화려한 자수로 장식된 사치와 권위의 상징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1789년 프랑스 혁명은 이러한 장식 중심의 복식 문화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었다. 귀족 계급의 몰락과 함께 화려한 실크와 벨벳은 점차 사라졌다.

디올 옴므의 에디 슬리먼이 파리 2007 SS 컬렉션에서 선보인 스키니 실루엣 남성복. 필자 제공
디올 옴므의 에디 슬리먼이 파리 2007 SS 컬렉션에서 선보인 스키니 실루엣 남성복. 필자 제공


그 자리는 산업화로 대량 생산돼 실용적인 ‘무채색 울 직물’이 대신했다. 이른바 ‘위대한 남성성 포기’를 통해 남성들은 화려한 외적 장식을 내려놓고 합리성과 절제, 생산성을 중시하는 근대적 남성상을 구축해 나갔다. 이러한 변화는 근대 자본주의의 발전과 맞물리며 새로운 젠더 정체성 형성으로 이어졌다.

19세기 산업혁명과 대영제국의 세계적 패권은 ‘무채색 울 슈트’를 근대 남성복 표준으로 정착시키는 결정적 배경이 됐다. 특히 런던 새빌로의 재단사들은 사회적 권위와 실용성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복식을 개발했다. 이들은 시각적 품격을 유지하면서도 마차와 기차 이용에 적합하도록 앞자락의 길이와 형태를 조정한 모닝코트와 프록코트를 선보이며 근대 남성복의 전형을 확립했다.

1840년 1차 아편전쟁을 계기로 동아시아가 서구 중심의 국제 질서에 편입되면서 세계는 본격적인 근대화의 격동기에 접어들었다. 이 시기 남성복은 귀족적 취향의 산물에서 벗어나 산업화와 군사 체제가 요구하는 기능성과 효율성을 중심으로 재편됐다. 특히 대량생산 체제의 확립과 근대 전쟁의 경험은 현대 남성복 형태를 결정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1차 세계대전의 참호전에서 영국군이 착용하던 방수 외투는 이후 토머스 버버리에 의해 일상복인 트렌치코트로 발전했다. 미 해군의 방한복이던 피코트 역시 민간복으로 확산되며 현대 남성복의 대표적인 아이템으로 자리 잡았다. 이처럼 군복은 기능성과 실용성을 바탕으로 현대 패션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1818년 창립된 미국 브룩스 브라더스는 맞춤복 중심의 전통적 복식 체계를 대량생산 기성복 체제로 전환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미국 남북전쟁 시기 군복 생산을 통해 축적한 신체 치수 데이터를 활용해 누구나 즉시 구매하고 착용할 수 있는 기성복 슈트를 보급함으로써 현대 패션산업과 대중 소비문화의 기반을 마련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세계 패권이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동하면서 남성복 중심 역시 미국으로 옮겨갔다. 리바이스가 대중화한 데님 팬츠는 전후 미국 경제 성장과 영화, 텔레비전 등 대중매체를 통해 세계로 확산됐고, 자유와 실용성을 상징하는 현대 자본주의 문화의 대표적 복식으로 자리매김했다.

1980년대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어깨패드와 심지를 제거하는 등 전통 슈트의 딱딱하고 각진 구조적 요소를 과감히 축소한 언컨스트럭티드슈트(Unconstructed Suit)를 선보이며 남성복의 새로운 전환점을 제시했다. 부드럽고 유연한 실루엣은 금융산업 성장과 함께 등장한 글로벌 전문직 계층의 세련된 권력 이미지를 상징했다. 이어 2000년대 에디 슬리먼은 디올 옴므를 통해 극도로 슬림한 스키니 실루엣을 제안하며 남성복의 미적 기준을 새롭게 정의했다. 이는 정보화 사회로의 전환 속에서 육체적 힘보다 개성과 감수성, 자기표현이 중요해진 시대적 변화를 반영한 결과였다. 이처럼 근대 이후 남성복의 역사는 단순한 의복 양식의 변화가 아니라 산업화, 전쟁, 자본주의, 글로벌 패권, 그리고 남성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 변화가 복합적으로 반영된 문화사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2026년 현재 글로벌 공급망의 재편과 복합적인 경제 불확실성 속에서 남성복은 또 한 번의 전환기를 맞고 있다. 최근 남성복 시장에서는 실제 어깨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흐르는 여유로운 테일러드 재킷과 하체를 따라 곧게 떨어지는 와이드 스트레이트 팬츠가 주요 실루엣으로 자리 잡고 있다. 과거 울 중심의 무거운 질감 대신 가볍고 매끄러운 합성섬유가 활용되며, 은은한 광택과 높은 활동성을 갖춘 소재가 선호되고 있다. 또한 전통적인 드레스 셔츠보다 부드러운 니트웨어를 활용한 스타일링이 확산되면서 편안함과 실용성을 중시하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오늘날 글로벌 시장에서 높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브랜드 유니클로의 디자인 철학과도 맞닿아 있다. 유니클로는 근대 남성복이 구축한 슈트의 외형적 질서를 유지하면서도 내부를 첨단 소재와 기능성 원단으로 대체하는 전략을 전개하고 있다. 전통의 장인 기술보다는 섬유 공학 발전과 효율적인 생산 시스템을 기반으로 구김이 적고 세탁이 용이한 의복을 통해 실용성을 극대화하고 있다. 이는 노동과 휴식, 업무와 일상의 경계가 점차 희미해지는 현대사회 변화와도 밀접하게 연결된다.

오늘날의 남성복은 과거 계급적 권위나 사회적 위신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보다는 다양한 생활 환경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편안함과 기능성을 제공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그 결과 현대 남성에게 의복은 권위를 상징하는 제복이 아니라 효율성과 쾌적함을 중심으로 설계된 새로운 형태의 도시적 유니폼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의복은 시대라는 거대한 중력이 인간의 나약한 피부 위에 내려앉은 결과물이다. 남성복이 수천 년에 걸쳐 지나온 치열하고도 조용한 실루엣의 역사는 곧 인류의 복잡한 세계 질서가 끊임없이 직조해 온 무언의 질서와도 같다. 우리는 매일 아침 그 질서를 입고 문을 나선다.

필자 이상희는 수원대 디자인앤아트대학 학장 겸 미술대학원 원장, 고운미술관 관장, 패션디자인학과 학과장으로 재직 중이며 (사)한국패션디자인학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필자 이상희는 수원대 디자인앤아트대학 학장 겸 미술대학원 원장, 고운미술관 관장, 패션디자인학과 학과장으로 재직 중이며 (사)한국패션디자인학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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