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교양 구보의 산보 - 그때 그곳

새벽 4시 한양에선 어김없이 33번의 종이 울렸다

입력 2026. 06. 04   15:48
업데이트 2026. 06. 04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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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의 산책, 그때 그곳
서울 종로 보신각, 시계탑이던 곳

서울 종로 보신각 전경. 원래 대로변이었으나 일제가 안쪽으로 옮겼다. 네 번 불타고 여덟 번 중건된 보신각의 현 건물은 1979년 복원됐다. 필자 제공
서울 종로 보신각 전경. 원래 대로변이었으나 일제가 안쪽으로 옮겼다. 네 번 불타고 여덟 번 중건된 보신각의 현 건물은 1979년 복원됐다. 필자 제공


서울 종로 보신각은 600년간 시간을 알리는 종을 쳐온 곳이다. 한양 도성을 완성한 조선이 경복궁 서남 모퉁이에 있는 서십자각에 종루를 마련한 게 그 효시였다. 2층 5칸 규모의 누각이었다. 태조가 1396년 12월 7일 종루에 거둥해 광주에서 주조해온 종을 쳐보다 파열되자 재주조해 1398년 4월 15일 다시 달았다(『태조실록』). 1398년에는 물시계인 경루(更漏)도 함께 설치해 통행금지인 인정(人定)과 통금해제인 파루(罷漏)를 운용하는 체계를 갖췄다. 새벽 4시에 33번 쳐 문을 열게 했고, 밤 10시에 28번 쳐 문을 닫게 했다. 타종 수는 천체를 동서남북 4궁으로 나누고, 각궁을 다시 7등분한 별자리 28수(宿)와 관세음보살이 중생을 구하기 위해 33천(天)으로 분신하는 것을 담았다.

태종 13년(1413년)에 종루를 지금의 종각 사거리로 옮겼고, 세종 22년(1440년)에는 동서 5칸과 남북 4칸으로 규모를 키워 다시 지었는데, 위층에는 종을 달고 아래로는 사람과 말이 드나들게 했다. 종루는 도성의 통로이자 광장 역할도 겸했다. 사람들은 종루에서 4대문으로 통하는 길을 ‘종길’, 또는 ‘종로(鐘路)’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한양 백성의 하루는 종소리에 맞춰 돌아갔다. 시각 지키기는 엄해서 통행금지를 위반한 자는 구금됐다가 이튿날 위반 시간에 따라 곤장 10도·20도·30도를 차등으로 맞았다. 종소리는 단순한 음향이 아니라 국가 권력이 도시 공간 전체에 새기는 법이었다. 시간의 신뢰는 국가에 대한 신뢰와 직결됐다. 종각의 종이 제때 울리지 않으면 관원도 엄벌에 처해졌다(『왕조실록』 인조 18년 4월 12일, 영조 5년 10월 5일 등). 창덕궁이 법궁을 대신하면서 정문(돈화문) 문루에도 종과 북을 걸어 정오와 인정 때는 종을, 파루 때는 북을 쳤다. 돈화문의 타종과 타고를 기다려 종루도 동시에 타종을 실시했다(『신증동국여지승람』).

도성의 8문과 4산은 모두 병조에서 관할했는데, 유사시에는 종을 거듭 울려 종루에서 흥인지문까지 오위군(五衛軍)이 도열하도록 했다. 신숙주는 “그 위세를 보고 북쪽 오랑캐와 바다 건너 왜구가 복종하고 정성을 바치게 되었다”고 평했다(『경국대전』).

종각의 동종은 세조가 1465년 전국의 동 5만 근을 모아 주조했다. 높이 3.67m, 지름 2.23m, 무게 19.66톤의 규모였다. 경복궁에 놓였다가 1468년 정릉의 정릉사에 비치됐으나 그 절이 없어지면서 새로 지은 원각사(탑골 공원)로 옮겨갔다. 원각사가 중종 때 폐지되고 임진왜란 때 불타버리자 종도 풀에 덮인 채 방치됐다가 왜란이 끝난 후 소실된 종각 대신 숭례문에 걸렸다. 도성민들은 다시 마음의 평정을 찾았다. “새벽과 저녁으로 울리게 하니, 사람들이 슬퍼하면서도 기뻐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대동야승』).” 1597년 정유재란 때 명군 5만을 이끌고 한양에 온 지휘관 양호가 군 작전상 적절한 위치가 아니라고 판단해 종을 명례동(명동) 고개 위로 옮겼다. 동종은 광해군이 1619년 종각을 복원하면서 비로소 제자리를 찾았다(『옛 보신각 동종』).

조선은 종루를 신성시했다. ‘신이 시간을 관장한다’고 여겼을 것으로 구보는 유추한다. 선조의 꿈 일화에도 담겼다. 신룡(神龍)이 종루에서 일어나는 꿈을 꾸고선 그곳을 살피게 했더니 정무수(1562~1622)가 서 있었다. 선조가 벼슬을 내리고 기룡(起龍)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갈암집』). 정기룡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충의공 시호를 받았다.

조선 사대부들은 종루에 연관시켜 유행어도 만들었다. ‘시간을 알리는 종은 울리고 물시계의 물방울은 다 떨어졌다’는 종명누진(鐘鳴漏盡)의 준말로 ‘종루(鍾漏)’와 ‘누야행(漏夜行)’이라는 표현을 써 ‘늙어서도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고 탐욕을 부리는 것’에 대한 경계로 삼았다(『승정원일기』 영조 16년 3월 21일).

옛 보신각 동종. 1985년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되고 있다. 사진=국가유산청
옛 보신각 동종. 1985년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되고 있다. 사진=국가유산청


나라에 민의를 전할 때도 종루가 자주 이용됐다. 중종 때 ‘김안로가 권력을 독점해 나라를 그르치고 있다’는 글이 종루에 나붙었고(『계곡집』), 태종 때 가뭄이 지속되자 불교식 기우제를 금하던 하륜을 비난하는 불가의 대자보가 종루에 붙었다(『태종실록』, 7년 6월 1일). 영조는 가뭄으로 민심이 나빠지자 환궁 길에 종루에서 내려 대령하던 죄수들을 모두 풀어주는 해프닝도 벌였다(『승정원일기』 영조 1년 7월 1일, 영조 3년 7월 27일 등). 구보는 『영조실록』에 유독 ‘종루’에 대한 기록이 많은 점으로 미루어 영조가 종루를 통해 자주 민의를 살폈음을 확인한다. 종루의 신성한 장소성이 역할을 한 것일 터였다.

종루가 ‘보신각’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1895년 3월 15일, 고종이 현판을 내리면서다. 이때의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지붕이었다. 편액의 글씨는 서예가 김규진이 썼다. ‘보신(普信)’이라는 이름은 오상 ‘인의예지신’ 중 ‘신(信)’에서 따왔다. 동서남북 사대문에 ‘인의예지’를 넣고 ‘신’자는 도성 한가운데 자리한 종각에 넣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895년부터 타종은 정오와 자정에만 실시됐고, 1908년 4월부터는 포(砲)를 쏘는 것으로 대체됐다. 1915년에는 일제가 도로를 확장하면서 위치를 종로 대로에서 안쪽으로 옮겼다. 도성의 시간을 알리던 종소리가 멈춰졌다가 해방 후 타종이 재개되면서 도성의 맥박이 다시 뛰기 시작했으나 6·25전쟁 때 종각이 다시 파손됐다. 1953년 중건하고, 1979년 철근 콘크리트 구조의 2층 종루로 복원했다. 지붕은 청기와 2만여 장을 사용해 조선 전기의 건축 양식을 살렸다(문화재청). 현재의 편액은 1953년 이승만 대통령이 썼다(『보신각』). 동종은 몸통에 금이 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기고, 국민 성금으로 주조한 새 종을 1985년 8월 14일 보신각에 걸어 이튿날 광복절에 처음 타종했다. 새 종은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을 본떠 만들었다.

네 번 불타고 여덟 번 중건된 보신각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12월 31일 자정의 타종이었다. 이 ‘제야의 타종’은 1927년 도쿄방송국이 기획한 일본의 송년 행사였는데, 1929년 경성에도 도입됐다. 경성방송국이 남산 일본 사찰의 종소리를 녹음해 방송했는데 해방 후 폐지됐다가 1953년부터 재개됐다(『제야의 종』). 보신각종을 직접 치고 그것을 라디오와 TV로 생중계했다. 새해의 시간에 대한 간절한 기원이 공감을 얻은 까닭일 것으로 구보는 여긴다. 주요 행사 때마다 보신각은 민족의 시간이 힘차게 흐르고 있음을 알리는 종을 울려왔다.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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