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곁에, 예술
옛 그림 속 숨은 이야기 <18>동래부사접왜사도(東萊府使接倭使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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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넘어 굽이굽이 이어지는 길이 바다를 만난다. 다시 바다를 낀 길을 따라 깃발을 앞세우고 행차를 알리는 음악소리와 함께 화려한 의장대가 등장한다. 이들 뒤를 따르는 가마와 말을 탄 사람들의 긴 행렬이 한창이다. 이들은 동래성(東萊城·현재 부산)에 있는 초량왜관의 바깥문인 설문(設門)을 통과하고 있다. 뒤따르는 행렬의 일원으로 곱게 치장한 기생들이 말을 탄 모습도 보인다. 곧이어 도착한 초량객사 안에는 바다 건너 일본에서 온 왜사(倭使)가 인사를 올리고, 뒤이어 연대청(宴大廳)에서는 조선의 관리와 일본에서 온 손님들이 앉아 식사하며 연회를 즐기고 있다.
동래부에서 왜국의 사신을 맞이한다는 내용의 기록화로 ‘동래부사접왜사도(東萊府使接倭使圖)’는 사신 맞이를 위한 동래부사의 행차와 일본 사신의 조우, 그리고 이들을 위해 향연을 베풀어주는 조선 후기 외교 현장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1592년 부산진성이 무너지며 임진왜란이 시작된 지 20일도 안 돼 왜군은 한양으로 입성했다. 이전에는 한양에서 조선의 국왕을 알현했던 일본의 국왕사(國王使)가 지나던 길은 그대로 일본군 진군로(進軍路)가 돼버렸다. 마침내 전쟁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1598년 전쟁이 종결되면서 임진왜란의 참상을 직접 겪은 광해군(재위 1608~1623)은 1609년 6월에 일본의 새로운 에도 막부 수장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수교 요청으로 기유약조(己酉約條)를 체결하며 일본과 외교관계가 재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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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부터 다시 조선에서 일본으로 통신사(通信使)를 보내거나, 일본의 사신들이 조선에 도착했다. 하지만 일본의 사신들은 예전처럼 한양으로 올라오지 못하고 지금의 부산인 동래부에서 동래부사를 만나 왜관에서 조선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에 인사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왜관은 무역과 외교를 위해 조성된 공간으로, 당시 일본의 조선에 대한 외교창구는 대마도주가 관할했고, 대마도에서 동래부로 사절단을 보내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왜관은 일본인이 조선에서 거주하며 물품을 거래하며 무역과 숙박, 사신 접대를 하는 여러 기능이 있었다. 특히 1678년 완공된 초량왜관(현 부산의 봉래초등학교)은 약 10만 평의 크기로 용두산을 중심으로 서관에는 대마도에서 파견된 사절단의 숙소로 이용되고, 동관은 왜관과 관련한 일본인들의 거주 및 무역 공간으로 활용됐다. 기록에 따르면 조선 후기 왜관에는 500여 명의 대마도 남성이 거주했다. 조선인 역시 외교업무와 통역·행정 등에 필요한 150여 명이 거주하기도 했다. 초량왜관에서는 일본에서 구리, 납, 놋쇠 등의 물품과 일본을 통해 동남아시아에서 수입한 물소뿔, 후추, 단목, 명반 등을 비롯해 왜관에서 자체적으로 만든 도자기를 조선에 수출했다. 조선에서는 왜관에 인삼과 중국에서 수입한 생사, 비단을 수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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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외교는 크게 중국에 대한 사대(事大)정책과 중국 이외의 나라, 왜의 막부(幕府)와 여진(女眞)·대마도(對馬島)·유구(琉球)를 총괄하는 교린(交隣)정책으로 나누었다. 외교문서인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에는 이러한 국가 사신을 접대하는 예식과 의식에 대해 자세히 기술하고 있어 그림과 함께 보면 몰랐던 사실들을 알게 된다. 예나 지금이나 외교에는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사나운 힘겨루기가 있다. 이러한 모습은 절차나 의식에 반영되는데, 기록화에서도 그 흔적을 볼 수 있다.
그림의 주제가 되는 장면은 일본 사신들이 조선왕의 전패에 예를 올리는 ‘왜사숙배식(倭使肅拜式)’이다. 그림의 8폭을 보면 초량객사 안에 촛불을 켜고, 향을 피우고, 왕의 전패가 모셔졌다. 그리고 사신들이 인사하는 ‘숙배(肅拜)’ 장면을 묘사했다. 이러한 행사는 모두 정해진 절차가 있었다. 이를 살펴보면 행사를 주관하는 조선의 동래부사와 부산첨사는 흑단령 차림으로 객사 안으로 나아가 동쪽 벽에서 서쪽을 향해 두 손을 마주 잡고 서고, 통역관 역시 흑단령을 입고 서쪽 벽에 나아가서 동쪽을 향해 선다고 적혀 있다. 이러한 장면은 그림에서 그대로 재현됐다.
그림에 보이는 객사의 뜰에 있는 일본의 사신을 보면 크게 세 부류로 나뉘어 있다. 먼저 왼편에 빨간 자리를 깔고 앉아 일본 사무라이의 머리모양인 촌마게를 하고, 각자 왼편에 긴 칼 두 자루를 끼고 있는 관리가 가장 높은 등급의 사신으로 보인다. 그리고 너른 자리에 머리에 검정 둥근 형태의 에보시(烏帽子)를 쓰고 푸른색 예복을 입고, 무릎을 꿇고 앉아 허리를 숙이고 있는 관리들과 그들 뒤로 긴 칼 한 자루를 오른손으로 잡고 일렬로 서 있는 무사의 뒷모습을 볼 수 있다. 초량객사 문밖에는 왜국의 의장대가 문 양쪽으로 마주 보며 도열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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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을 보면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일본 사신에 대해 경계하며 엄격한 제한을 두었다. 수교가 다시 이뤄진 직후인 1609년 일본의 사신들은 부산성 밖에서 말에서 내려 걸어서 부산진 객사까지 와야 했다. 1636년에는 일본에서 숙배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자 조선에서는 뜰 가운데 판자를 깔아 그 위에서 예식을 진행하게 하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1637년 일본 사신들은 조선의 통신사가 에도(지금의 도쿄)에 와서 자신들의 쇼군을 만날 때 건물 안에서 직접 마주 보며 만난다는 점을 들며 예식의 불평등한 점에 대해 항의했다. 1647년에는 심지어 조선의 일본어 역관들도 건물 위에서 의식을 수행하는데, 왜의 사신만 건물 아래 뜰에서 의식을 행하는 것을 불만으로 토로하며 이를 시정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60년 된 관례라 하며 단호히 거절했다.
이렇듯 의전 절차와 예식에 대해서는 완강한 조선이었지만 연회에서는 일본 측 요구를 들어주기도 했다. 『증정교린지』의 연향에 관한 의식에서 “꽃을 꽂고 풍악을 울리며 기생의 정재(呈才: 연향에 올리는 춤과 노래)놀이를 한다”고 했지만 원래 일본 사신을 위한 연향에는 아이들이 일어나 춤을 추었다고 한다. 다만 1612년 일본 측의 강력한 요구로 기생들의 춤으로 대체됐다.
전쟁 이후 일본에 대해 대의와 명분이 중요했던 조선의 역사적 순간은 이렇게 시각적으로 기록됐다. 여러 기록을 살펴보다가 만만치 않았던 일본의 항의에 당시 조선의 관리는 어떻게 이들을 회유하고 달랬을지 궁금하다. 기록되지 않은 이들의 뒷이야기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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