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사람, 그리고 세계문화유산
르네상스 도시 시에나 성벽 유적 - 화약무기 시대 성채의 모형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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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를 여행한다고 하면 통상 사람들은 수도인 로마 외에 피렌체, 베네치아, 밀라노 등지를 연상한다. 하지만 15~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기에 명성을 떨친 도시 가운데 중북부 토스카나 지방에서 성장한 시에나(Siena)를 빼놓을 수 없다. 인접한 피렌체와의 힘겨루기에서 밀린 데다 결정적으로는 무려 반세기 동안(1494~1559) 이탈리아반도에서 프랑스와 스페인이 격돌한 전쟁의 여파로 르네상스 말기에는 힘을 잃었지만, 그전에는 나름 존재감을 드러낸 도시다. 오늘날 시에나는 도시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문화유산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런 시에나의 흥망성쇠를 엿볼 수 있는 유적이 바로 199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시에나 성벽이다.
이탈리아 중부의 언덕 도시 시에나는 중세 후반기 당시 단순한 도시가 아니라 하나의 정치·군사적 유기체였다. 그 생명체의 외피 격인 핵심 시설이 바로 시에나 성벽이었다. 이는 단순한 방어 시설을 넘어 도시 공동체의 정체성과 생존 전략, 시대적 군사혁신의 궤적을 함축하고 있는 구조물이었다. 특히 15세기 말 이탈리아 전쟁 발발과 함께 이 성벽은 전통과 혁신의 조화, 도시의 정치적 운명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렇다면 이 성벽은 언제부터 모습을 드러냈을까? 시에나 성벽은 단기간에 완성된 방어 시설이 아닌, 약 3세기에 걸쳐 단계적으로 확장 및 강화된 결과물이었다. 기원은 도시가 빠른 인구 증가와 상업적 번영을 경험한 12세기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시에나는 주변의 피렌체, 피사 등과 경쟁하며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 지방의 주요 도시국가로 성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위상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외부 위협에 대한 도시 방어체계의 구축을 요구했다.
초기에 성벽은 비교적 단순한 석조 방벽과 탑으로 도시 중심부를 둘러싸는 형태로 지어졌다. 본격적인 확장은 13세기 말에서 14세기 초 시에나가 정치·경제적으로 절정에 달한 시기에 이뤄졌다. 이때 시에나는 피렌체 등 경쟁 도시국가들과 치열한 패권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그 정점은 1260년 피렌체와 벌인 몬타페르티전투였다. 이런 군사적 긴장 상황은 도시 방어시설의 보강을 불러왔다. 결국 승전으로 얻은 군사적 자신감에 힘입어 기존 성벽을 확장해 새로운 주거지와 상업 구역을 성벽 내부로 편입했다.
르네상스기에 들어서면서 성벽은 중세의 틀에서 벗어나 점차 화포에 대응할 수 있는 구조로 진화했다. 직접적 계기는 1494년 프랑스 국왕 샤를 8세의 이탈리아반도 침공으로 불붙은 이탈리아 전쟁(1494~1559)이었다. 프랑스군이 강력한 공성포를 동원, 기존의 중세 성벽을 무력화하는 새로운 전쟁방식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다행히 시에나는 직접 대규모 포격을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주변 지역에서 벌어진 공성전 사례를 통해 위협의 본질을 간파했다. 특히 피렌체와 나폴리 등 주요 도시들이 프랑스군의 빠른 기동력과 강력한 화력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모습을 목격하며 시에나는 기존 방어체계를 근본적으로 개선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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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변화에 시에나는 어떻게 대응했을까? 시에나는 성벽의 취약한 부분을 신속하게 보강했다. 무엇보다 방어용 포병 운용에 필요한 플랫폼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기존 성탑은 포대를 설치할 수 있도록 개조됐고, 성벽 상부에는 대포를 배치하기 위한 일명 ‘능보(bastion)’라는 성형(星形) 공간이 마련됐다. 화약무기 시대에 걸맞게 기존의 높고 얇은 중세식 성벽 구조를 낮고 두꺼운 수평적 형태로 대폭 개수한 것이었다.
시에나 성벽의 방어 능력이 가장 극적으로 표출된 사건은 1554~1555년 벌어진 시에나 공방전이었다. 이는 프랑스와 스페인이 이탈리아반도 패권을 놓고 벌인 이탈리아 전쟁 중 당시 프랑스 편에 서 있던 시에나를 스페인군이 포위 점령하면서 벌어졌다. 인근 피렌체공국과 연합한 스페인군이 대규모 병력과 화포를 동원해 시에나를 포위했다. 이때 시에나 시민들은 성벽에 의지해 공격군의 포격을 견디며 도시 안에서 결사 항전을 이어갔다. 성벽 덕분에 적의 도시 진입을 지연하며 그 틈에 다방면으로 대응책을 마련할 수 있었다. 비록 시에나는 1555년 항복 이후 독립 도시국가의 지위를 상실하고, 피렌체의 지배 아래 편입됐지만 거의 1년간이나 포위를 견뎌낸 성벽은 시에나의 방어 능력과 저항 의지의 상징이었다.
그러면 시에나 성벽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었을까? 오늘날까지 나름 온전하게 남아 있는 약 7㎞의 성벽은 중세 후기 도시 방어체계의 모범 사례로 평가된다. 근본적으로 이 성벽은 어느 일정 시기에 계획적으로 축조된 것이 아니라 약 12세기 후반부터 16세기 중반에 걸쳐 단계적인 확장과 개수를 통해 형성된 살아 있는 구조물이었다.
성벽은 단순한 직선 구조가 아니라 시에나 특유의 구릉 지형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곡선형 방어 구조다. 이는 애초 도시가 언덕 위에서 형성됐기에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 구릉지라는 자연 지형과 성벽이라는 인공 구조물이 결합한 복합 방어체계인 셈이다.
전체적으로 성벽은 외곽 방벽, 방어탑 및 포대, 성문 등 세 부분으로 이뤄졌다. 물론 이것들은 각각 독립적으로 기능하면서도 상호 유기적으로 결합해 하나의 방어체계를 형성했다. 하부는 석재, 상부는 벽돌을 혼합한 구조인 성벽 본체는 평균 10~15m 높이에 벽체 하단 폭이 약 2.5~4m에 달했다. 성벽 상부 보행로는 병력 이동과 방어 활동의 핵심 공간이었다. 또한 성벽에는 평균 높이 15~20m인 30여 개 이상의 방어탑이 일정 간격으로 배치됐다. 15세기 이후 일부 탑은 포대를 설치할 수 있도록 개조됐다. 기존의 높은 탑은 포격에 취약했기 때문에 상부를 낮추는 대신 넓은 평탄 공간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변경됐다. 이외에 문루 높이가 12~18m에 달하는 독립된 요새형 성문이 다수 설치돼 방어력을 높였다.
오늘날 시에나 성벽은 도시 내 역사지구의 핵심 유적으로 보존되고 있다. 그 규모나 보존 상태만으로도 충분히 인상적이지만 진정한 가치는 그 내부에 층층이 쌓인 시간의 층위에 담겨 있다. 성벽은 수 세기에 걸친 전쟁의 경험과 기억이 축적된 장소이며 인간 공동체가 생존을 위해 어떻게 공간을 조직하고 방어했는지를 보여주는 집약적 산물이다. 특히 이탈리아 전쟁이라는 거대한 격변 속에서 화약무기의 등장으로 대변되는 시대적 변화에 슬기롭게 적응하며 중세와 근세를 잇는 경계선 역할을 했다. 오늘날에도 그 흔적은 또렷하게 남아 세계인들을 맞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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