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교양 K-pop 스타를 만나다

에스파의 새 맛은 ‘쇠콤달콤’한 레몬

입력 2026. 06. 01   16:25
업데이트 2026. 06. 01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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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팝 스타를 만나다
새 앨범 ‘레모네이드’로 돌아온 걸그룹 에스파

 

걸그룹 에스파 ‘레모네이드’ 콘셉트 사진. 사진=SM엔터테인먼트
걸그룹 에스파 ‘레모네이드’ 콘셉트 사진. 사진=SM엔터테인먼트


“날 닮은 너, 너 누구야?” 

‘슈퍼노바(Supernova)’의 불길한 예언이 현실로 성큼 다가왔다. 무엇이든 만들 수 있지만 어디에도 소속될 수 없는 원색의 크로마키 위에서 나를 닮은 그 존재는 미지의 세계나 상상 속 두려움으로부터 인간의 얼굴을 찢고 나타나 기괴한 정체성으로 자아를 잠식한다.

지난 5월 29일 공개된 에스파의 두 번째 정규 앨범 ‘레모네이드(LEMONADE)’의 ‘컴플렉시티(Complæxity) 트레일러’에 등장하는, 무언가로 정의할 수 없는 생경한 존재이자 그 어떤 것과도 다른 종이자 자유자재로 과거 그룹의 모습을 바꿔가며 정체를 숨기는 이단자들이다. “그들은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갔지만 우리에게 속한 자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속하였다면 우리와 함께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끝과 시작의 최후 전쟁터 ‘아마겟돈(Armageddon)’을 알린 사도 요한의 첫 번째 편지에서 등장하는 불신자들이 낯설고 불온한 존재로 자신을 다시 정의하고자 하는 그룹의 강렬한 욕망을 대변하고 있다. 앨범 발매에 앞서 발표한 선공개 곡의 이름이 ‘홀 디퍼런트 애니멀(Whole Different Animal· WDA)’인 까닭이다.

SM엔터테인먼트의 야심 찬 세계관 SM 컬처 유니버스의 첨병으로 등장한 에스파는 그들을 둘러싸는 설정 변화에 따라 큰 폭으로 새로운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그룹이다. 처음에는 낙관적이었다. 무한해질 가능성의 디지털 공간 ‘광야’에서의 모험을 떠나는 신인류, 인간의 디지털 데이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아이(ae)와 그를 돕는 인공지능 프로그램 나비스가 둘의 연결을 끊고 혼란을 부르려는 악당 블랙 맘바에 맞서 싸우는 활극이 에스파의 주된 이야기였다.

상황은 많이 달라졌다. SMCU를 설계한 이수만 프로듀서는 회사를 떠났다. 인간 세계를 유익하게 도울 것만 같았던 인공지능 프로그램은 이제 인간의 사고까지 대리하면서 보는 눈과 들을 귀조차 앗아가고 있다. 한때 8인조 걸그룹이라는 농담 반 진담 반의 콘셉트는 더 이상 등장할지, 등장하지 않을지 모르는 설정으로 격하됐다.

의심과 불확실성, 흔들림은 새로운 세계의 작동 질서로 다듬어졌다. 그 정체는 공포다. 내 안에서 피어난 나의 얼굴을 한 무엇과 사투를 벌였던 ‘드라마(Drama)’로부터 결국 그들이 지구를 지배하게 돼버린 비극적 시대를 차갑게 고찰한 ‘슈퍼노바’와 ‘아마겟돈’의 숭고, 기술 복제 시대의 다크 히어로를 자처하며 저항을 시작한 ‘위플래시(Whiplash)’의 가장 깊은 곳에는 에스파가 어떤 그룹이고, 어떤 식으로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한 불안이 있다. ‘WDA’ 속 에스파와 아이-에스파의 만남은 반가운 조우라기보다 도플갱어 미신처럼 여겨진다. 이 생경함이 자칫 부유할 수 있는 에스파의 서사에 설득력을 부여하며, 그룹이 갈고 닦아온 거친 일렉트로닉 사운드와 차가운 힙합의 ‘쇠맛’ 음악과 함께 그룹의 성공을 견인한 핵심 요인이다.

‘레모네이드’의 목표는 에스파의 서사를 뾰족하게 다듬어 그룹의 새 시대를 안정적으로 선언하는 것이다. 티저 영상과 뮤직비디오, 콘셉트 포토 등 시각적인 요소는 흥미롭다. 음악은 그렇지 못하다.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가장 큰 문제는 콘셉트를 수행하는 멤버들의 가창이 매끄럽지 않다는 데 있다. 앨범을 소개하는 첫 곡 ‘WDA’에서 매우 거칠고 냉소적인, 혹은 완전히 다른 세계의 존재처럼 여겨져야 하는 멤버들의 랩과 노래의 표현 방식이 평이하다. 노련한 지드래곤의 참여가 난해한 재치와 낡은 유희에도 불구하고 베테랑으로의 존재감을 과시하는 이유는 아주 잘 벼려져야 할 칼날 같아야 할 에스파의 퍼포먼스가 무디기 때문이다. 곡에서 강조하는 특이점과 글리치를 만들기 위해 필수적인 팽팽한 긴장감과 서늘한 공포 대신 다른 존재로의 인정만이 유일한 목적처럼 들린다.

타이틀 싱글 ‘레모네이드’도 반전을 만들기에는 부족하다. 팝스타 셰어(Cher)의 여성주의적 인터뷰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지난해 발표 곡 ‘리치 맨(Rich Man)’의 노선을 이어받아 이번에는 ‘삶이 레몬을 준다면 레모네이드를 만들라’는 영미권의 유명한 격언을 빌려왔는데, 10년 전 비욘세가 발표한 팝의 명반 ‘레모네이드’와 동일한 영감으로 소재 선정은 타당하나 표현의 방식이 평이하다.

강렬한 일렉트로닉 비트 위 랩으로 서사를 풀어가는 방식이 미니멀한 가창이 곁들여졌던 ‘위플래시’만큼 효과적이지 않았고, 구호를 외치는 훅은 ‘슈퍼노바’만큼의 중독성을 갖추지 못했으며 ‘리치 맨’이 선명한 주제의식에도 미약하게 들렸던 단점을 개선하지 못했다. 타이틀의 모순은 보컬 디자인을 이해한 다른 앨범 수록곡에서 더 두드러진다. 거친 일렉트릭 기타가 주도하는 ‘캔트 헬프 마이셀프(Can’t Help Myself)’에서 윈터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곡에 활기를 불어넣거나, 아기자기한 ‘롤(Roll)’과 ‘마이 플랜(My Plan)’이 매력적으로 들리는 찰나의 순간은 콘셉트를 수행하는 아이돌 주체의 역량 강화 필요성과 더불어 에스파라는 그룹이 지향하는 전복과 파괴의 정교한 콘셉트가 음악으로 새어 나가고 있다는 의심을 품게 만든다. 곡의 매력으로 백화점식 구성의 단점을 덮었던 첫 정규 앨범 ‘아마겟돈’의 불안 요소가 ‘레모네이드’에서도 고스란히 노출되는 까닭이다.

‘WDA’의 노랫말을 통해 에스파는 ‘모든 게 바뀐 다음 단계의 Breed (종)’을 꿈꾼다고 선언한다. 태도로는 이미 그런 존재처럼 보인다. 가상과 현실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초월한 존재로서 당당하게 주체성을 뽐내는 미래 시대의 초인류 말이다. 자세히 보면 그렇지 못하다. 티딕, 팍, 몸에서 무언가가 뻗쳐 나오고 일그러지는 글리치(Glitch)의 파편이 미세하고 날카로운 조각으로 튕겨 나온다. 입을 떼고 말해 보는데, 그 목소리는 온전한 나의 것이 아니다. 요한의 묵시록에 등장하는 첫 번째 짐승은 마흔두 달 동안 신을 모독할 권한을 받아 세상을 미혹하고 혼란을 퍼트린다. 호기로운 불온은 아무리 매력적이라 해도 절대자를 넘어서지 못한다. 권한을 받은 자가 권한을 내린 자를 넘어설 수는 없는 법이다. 지금 에스파의 레모네이드는 시지 않고 달다.

 

필자 김도헌은 대중음악평론가다. 음악웹진 이즘(IZM) 에디터와 편집장을 역임했다. 한국대중음악상 심사위원이다. 음악채널 제너레이트(ZENERATE) 유튜브와 팟캐스트를 운영 중이다.
필자 김도헌은 대중음악평론가다. 음악웹진 이즘(IZM) 에디터와 편집장을 역임했다. 한국대중음악상 심사위원이다. 음악채널 제너레이트(ZENERATE) 유튜브와 팟캐스트를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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