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군사 전쟁과 영화

너무나 평범한, 그래서 더욱 두려운… 惡의 뒷모습

입력 2026. 05. 29   16:43
업데이트 2026. 05. 31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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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영화 - 뉘른베르크(2025)


감독 : 제임스 밴더빌트 
출연 : 라미 말렉(더글러스 켈리), 러셀 크로(헤르만 괴링), 마이클 섀넌(로버트 잭슨), 리처드 E. 그랜트(데이비드 맥스웰 파이프 경), 콜린 행크스(구스타프 길버트) 
“그들은 어느 나라에나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미국에도 그런 사람이 있다고 말하겠습니다. 그들은 나머지 절반을 지배할 수만 있다면 미국인 절반의 시체를 밟고서라도 그 자리에 오르려는 자입니다. 이들은 오늘도 민주주의의 권리를 반민주적으로 이용하며 떠들어대고 있는 사람입니다.” (『뉘른베르크, 나치와 정신과 의사』, 잭 엘하이 지음, 히포크라테스 펴냄)


악을 심리학적으로 정의하고자 한 정신과 의사
나치 전범들 인터뷰하며 평범성·적응력에 경악
러셀 크로 ‘괴링’과 만남 ‘킹콩과 고질라의 대결’
켈리 역 라미 말렉 “우리는 그들과 정말 다른가” 

 

뉘른베르크 재판은 ‘상관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항변을 처음으로 법적으로 기각하며 개인 책임의 원칙을 역사에 새겼다. 사진=배급사 제공
뉘른베르크 재판은 ‘상관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항변을 처음으로 법적으로 기각하며 개인 책임의 원칙을 역사에 새겼다. 사진=배급사 제공



악을 해부하러 간 남자

“악을 심리학적으로 정의할 수 있다면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막을 수 있다.” 미 육군 장교이자 정신과 의사인 더글러스 켈리(라미 말렉)가 뉘른베르크 감옥에 들어서며 스스로에게 한 다짐이었다. 인류 최악의 학살자들 앞에서 그의 질문은 단 하나였다. 이들은 과연 우리와 다른 존재인가.

1945년 5월, 유럽에서 전쟁은 끝났다. 히틀러는 자살했고 나치 독일은 무너졌다. 연합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국제군사재판을 열었다. 전쟁범죄, 평화에 반한 죄, 인도에 반한 죄. 뉘른베르크 재판은 ‘전쟁에서 이긴 쪽이 진 쪽을 심판한다’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개인이 국가의 명령을 이유로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는 원칙을 역사에 새겼다.

피고석에 앉은 자들은 낯설지 않은 얼굴이었다. 히틀러의 공군 총사령관이자 2인자였던 헤르만 괴링(러셀 크로), 기억상실을 주장하는 루돌프 헤스, 선동과 혐오 연설로 유명한 율리우스 슈트라이허. 이들은 수백만 명의 죽음에 서명한 자들이었다.

켈리의 임무는 피고인들의 정신 상태를 평가해 재판에 설 수 있는지를 판단하는 것이었다. 그는 로르샤흐 잉크 반점 검사와 주제통각검사(TAT), IQ 테스트를 들고 나치 수뇌부의 독방을 하나씩 두드렸다. 켈리는 그들이 무엇을 보는지뿐 아니라 얼마나 오래 고민하는지, 답할 때 어떤 표정을 짓는지까지 기록했다. 그의 진짜 질문은 다른 곳에 있었다. 수백만 명을 학살한 자들의 정신 속에는 과연 무엇이 있는가.

켈리는 피고인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 마술도 선보였다. 전쟁범죄자들 앞에서 마술을 부리는 정신과 의사. 목적은 하나였다. 그들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 수개월간의 인터뷰와 검사 끝에 켈리가 내린 결론은 충격적이었다. 뇌 손상을 입은 로베르트 라이를 제외하고 나치 수뇌부 중 누구에게서도 정신질환이나 비정상적 성격의 징후를 발견할 수 없었다. 괴링에 대해 켈리는 “이토록 명석하고 교양 있는 인간이 도덕적 나침반과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을 완전히 결여하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그들은 괴물이 아니었다. 평균 이상의 지능을 가진, 사회적으로 적응력이 뛰어난 평범한 인간들이었다. 그것이 더 무서웠다.


미 육군 정신과 의사 더글러스 켈리를 연기한 라미 말렉(왼쪽)과 헤르만 괴링 역의 러셀 크로.사진=배급사 제공
미 육군 정신과 의사 더글러스 켈리를 연기한 라미 말렉(왼쪽)과 헤르만 괴링 역의 러셀 크로.사진=배급사 제공



괴물이 아니라는 것, 더 무서운 진실

영화의 핵심은 켈리와 괴링의 일대일 대결이다. 두 사람의 만남은 처음부터 예상을 뒤집는다. 승전국 정신과 의사가 패전국 전범을 심문하는 구도지만, 실제 주도권은 괴링에게 있다. 켈리는 괴링에게서 정보를 얻어야 하고, 괴링은 그것을 거부하거나 조작할 수 있다. 『뉘른베르크, 나치와 정신과 의사』의 저자 잭 엘하이는 두 사람의 만남을 ‘킹콩과 고질라의 대결’이라고 표현했다. 지성과 야망, 매력과 공허함을 동시에 가진 두 나르시시스트의 충돌이었다.

러셀 크로가 연기하는 괴링은 처음에 영어를 못하는 척하지만 켈리가 이를 간파하자 금세 가면을 벗는다. 그는 패전국 피고인이지만 독방에 들어서는 순간 모든 시선을 장악한다.

라미 말렉이 연기하는 켈리는 오만하고 자신만만하게 시작하다가 나치의 만행이 눈앞에 하나씩 펼쳐지면서 무너져 내린다. 그는 관객의 분신이다. 괴링에게 묘한 매력을 느끼다가 그가 저지른 일의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 분노와 혼란에 빠지는 것은 관객의 경험이기도 하다.

켈리의 연구 결론은 재판이 끝난 후에도 논란을 모은다. 그는 피고인들이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다”고 결론 내린 것. “그들은 단지 환경의 산물이었을 뿐이며, 특정한 상황에서는 많은 사람이 비슷하게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악은 어딘가 먼 곳에 사는 괴물의 것이 아니라 권력욕과 복종의 문화 속에서 평범한 인간이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1946년 10월 15일 새벽, 괴링은 교수형 집행 몇 시간 전 독방에서 청산가리 캡슐을 삼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어디서 캡슐을 구했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켈리는 그의 자살을 두고 ‘영리하고도 탁월한 마무리’라고 부른다. 잭슨 검사는 ‘비겁한 도주’라고 맞받는다. 같은 사건을 두고 이토록 다른 언어가 충돌하는 것 자체가, 이 재판의 본질을 보여준다.

켈리의 마지막 선택은 충격적이다. 그래서 영화가 끝나고 나서 남는 질문의 무게는 더 무겁다. 그들은 정말 우리와 다른 존재인가.


실제 괴링이 재판받는 모습. 사진=배급사 제공
실제 괴링이 재판받는 모습. 사진=배급사 제공



국제형사재판소로 이어진 뉘른베르크 원칙

1945년 11월 20일, 뉘른베르크 궁정 재판소에 피고석이 마련됐다. 헤르만 괴링 등 나치 수뇌부들이 기소됐다. 이 재판이 역사에 남긴 것은 판결문보다 원칙이었다.

첫째, 개인 책임의 원칙. 국가의 명령은 면죄부가 되지 않는다. 상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항변은 처음으로 뉘른베르크에서 법적으로 기각됐다.

둘째, 인도에 반한 죄(Crimes against humanity)의 탄생. 자국민에 대한 조직적 학살도 국제법의 심판 대상이 된다는 원칙이 확립됐다. 이전까지 국제법은 국가 간 전쟁 행위만을 규율했다. 한 국가가 자국민을 학살하는 것은 내정이었다. 뉘른베르크는 그 경계를 무너뜨렸다.

셋째, 국제 군사 재판의 선례. 재판 결과 괴링을 포함한 12명이 사형, 3명이 종신형, 4명이 유기 징역을 선고받았다. 승전국과 패전국의 재판이라는 한계에도 불구, 이 재판은 1998년 국제형사재판소(ICC) 설립의 토대가 됐다.

켈리가 내린 결론은 재판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다. 악은 비정상적인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며 평범한 지능과 사회성을 갖춘 인간이 복종의 문화와 권력의 구조 속에서 대량 학살의 톱니바퀴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1961년 예루살렘에서 열린 아돌프 아이히만 재판에서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이를 ‘악의 평범성’이라고 불렀다. 아이히만은 수백만 명을 죽음의 수용소로 보낸 이송 책임자였지만, 법정에 선 그는 평범하고 관료적인 중년 남성이었다. “나는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악의도, 광기도 없었다.

켈리는 귀국 후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히틀러 없이 이 사람들은 비정상이 아니었고, 도착적이지도 않았으며, 천재도 아니었다. 그들은 야심 차고, 영리하고, 냉혹한 여느 사업가와 다르지 않았다.” 이 발언은 당시 큰 반발을 샀다. 사람들은 나치를 괴물로 기억하고 싶었다. 괴물이어야 우리와 다른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뉘른베르크가 던진 질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강대국은 여전히 ICC의 관할권을 거부한다. 오늘도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명령을 따르고 있고, 누군가는 그 명령에 서명하고 있다.

 

필자 김인기는 전자신문인터넷 미디어전략연구소장, 전자신문인터넷 온라인편집국장, 테크플러스 대표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영화 속 IT 교과서』가 있다.
필자 김인기는 전자신문인터넷 미디어전략연구소장, 전자신문인터넷 온라인편집국장, 테크플러스 대표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영화 속 IT 교과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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