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교양 우리 곁에, 예술

셀 수 없는 하늘빛 … 꿈은 그리 푸르기만 하지 않다

맹수열

입력 2026. 05. 28   16:33
업데이트 2026. 05. 28   16:43
0 댓글

우리곁에, 예술
영화 속 미술  『꿈같은 현실과 현실보다 생생한 꿈 사이…영화 ‘바닐라 스카이’와 모네의 하늘』

클로드 모네의 ‘아르장퇴유의 센강’(1873년, 캔버스에 유채, 50.3x61.4㎝).
클로드 모네의 ‘아르장퇴유의 센강’(1873년, 캔버스에 유채, 50.3x61.4㎝).


흐르는 시간 앞에 무방비한 인간의 삶에서 미술은 스쳐 지나가는 순간을 붙잡아 두는 역할을 해 왔다. 카메라가 발명되기 전 그림은 누군가의 얼굴을 남기고 산과 바다 같은 자연 풍경을 담아 언제든 다시 볼 수 있게 하는 매체였다. 그런 의미에서 계절과 시간에 따라 시시각각 모습을 바꾸는 자연은 오랫동안 미술가들에게 중요한 탐구 대상이 됐다. 

특히 하늘을 캔버스에 담아내는 일은 회화에서 난도가 높은 영역으로 여겨진다. 끝없이 펼쳐진 공간을 어디까지 화면에 담을지, 하늘의 깊이와 무게를 어떻게 표현할지, 태양빛을 어떤 색으로 구현할지, 고체도 기체도 아닌 구름의 형상을 어떻게 그려 낼지 등은 모두 화가의 선택과 숙련된 회화적 기술을 요구한다. 17세기 화가 야코프 판 라위스달은 생동감 넘치는 하늘을 그려 장엄한 풍경화를 완성했고, 18~19세기 풍경화의 거장 존 컨스터블은 ‘구름 연구’ 연작에서 변화무쌍한 하늘의 모습을 집요하게 탐구했다.

임없이 변화하는 자연의 순간을 포착하고자 했던 19세기 인상주의 화가 클로드 모네에게도 하늘은 중요한 예술적 실험의 장이자 도전의 대상이었다. 모네는 인간의 망막에 비친 빛과 대기의 변화를 색채로 담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시도했다. 건초 더미나 대성당처럼 동일한 대상과 풍경을 계절과 시간대에 따라 다르게 그린 그의 연작에서 가장 극적인 변화는 하늘에서 발견된다. 동틀 무렵의 옅은 라벤더빛부터 흰색에 가까운 한낮의 강렬한 햇살, 해가 진 뒤 어스름 속에서 검푸르게 가라앉는 저녁 하늘까지. 우리는 흔히 하늘의 색이라고 하면 파란색과 흰색을 떠올리지만, 모네의 하늘은 셀 수 없이 많은 색채가 뒤섞인 거대한 팔레트에 가까웠다.

1873년에 제작된 모네의 작품 ‘아르장퇴유의 센강’ 역시 그렇다. 이 그림은 파리에서 조금 떨어진 프랑스 북서부의 작은 도시 풍경을 담고 있다. 캔버스 중앙을 가로지르는 센강을 중심으로 왼편에는 누런빛의 키 큰 나무들이 강변을 따라 늘어서 있고, 오른편의 낮은 평지에는 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것은 단연 하늘이다. 화면 가까이에는 채도와 명도가 높은 맑은 하늘빛이 퍼져 있고, 그 위로는 흩어진 구름을 표현한 붓질이 겹쳐진다. 멀리 건물 위로는 회색 구름이 두껍게 내려앉아 지붕과 맞닿아 있다. 이 하늘의 색을 과연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영화감독 캐머런 크로는 모네의 ‘아르장퇴유의 센강’에 나타나는 크림색과 복숭아빛 하늘을 ‘바닐라 스카이’라고 불렀고, 이를 자신의 영화 제목으로 차용했다. 2001년에 개봉한 그의 영화 ‘바닐라 스카이’에서는 모네의 작품이 등장한다. 주인공 데이비드(톰 크루즈)는 뛰어난 외모와 막대한 재력을 가진 인물이다. 부모의 죽음 이후 거대한 유산과 회사 경영권을 물려받았지만, 그는 회사일보다 화려한 사교 생활을 즐긴다. 어느 날 그는 파티에서 소피아(페넬로페 크루즈)를 보고 한눈에 반해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다. 집 안을 둘러보던 장면에서 데이비드는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모네의 ‘아르장퇴유의 센강’을 가리키며 이렇게 소개한다. “모네가 직접 붓으로 그린 바닐라 스카이예요.”

영화는 제목처럼 달콤한 사랑 이야기를 그리지 않는다. 데이비드를 짝사랑하던 줄리(캐머런 디아즈)는 그가 소피아에게 마음을 빼앗긴 사실을 목격한다. 자신이 기만당했다고 느낀 줄리는 데이비드를 차에 태운 채 동반자살을 시도하고, 이 사고로 줄리는 목숨을 잃는다. 데이비드는 가까스로 살아남지만 얼굴의 절반이 심하게 일그러지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는다. 모든 것을 가졌던 데이비드는 하루아침에 흉측하게 변해 버린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세상과 단절한 채 깊은 고통 속에 빠져든다.

영화 ‘바닐라 스카이’의 한 장면. 주인공 데이비드 뒤로 모네의 ‘아르장퇴유의 세느강’과 같은 느낌의 하늘이 펼쳐져 있다. 영화 스틸컷
영화 ‘바닐라 스카이’의 한 장면. 주인공 데이비드 뒤로 모네의 ‘아르장퇴유의 세느강’과 같은 느낌의 하늘이 펼쳐져 있다. 영화 스틸컷

 
결국 데이비드는 생명 연장회사와 계약을 맺고, 얼굴을 복원할 치료기술이 개발될 때까지 냉동상태로 잠들어 지내기로 한다. 그러나 데이비드는 잠든 동안 꿈속 세계에서 살아가며, 그곳에서 원래의 얼굴을 되찾고 소피아와 다시 만나 행복한 시간을 이어 간다. 하지만 꿈은 점차 균열하기 시작한다. 어느 순간 소피아의 얼굴이 갑자기 자신을 파멸로 몰아넣은 줄리의 얼굴로 뒤바뀌고 데이비드는 극심한 공포에 사로잡힌다. 그는 꿈속에서 또 다른 꿈을 꾸는 듯한 혼란에 빠진 채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무너진 뒤틀린 시·공간을 헤맨다.

영화감독은 모네의 ‘아르장퇴유의 센강’을 두고 “아름답지만 인공적이고 꿈같은 현실”을 그린 작품이라고 말했다. 자동차 사고 전날 데이비드가 소피아에게 이 그림을 ‘바닐라 스카이’라고 소개하는 장면은 이후 펼쳐질 그의 삶을 암시하는 복선처럼 기능한다. 인생의 극적 전환을 겪은 뒤 데이비드의 현실은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변하고, 반대로 꿈속에서 펼쳐지는 장면은 더욱 생생하고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영화가 중반을 넘어설수록 꿈과 현실을 구분하려는 시도 자체가 무의미해질 정도로 두 세계의 경계는 흐려진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데이비드는 생명 연장회사 직원과 고층빌딩 옥상에서 마주 선다. 직원은 그에게 계속 꿈속에서 살아갈지, 아니면 고통스럽더라도 현실로 돌아갈지를 선택하라고 이야기한다. 그 장면의 배경에는 모네의 ‘바닐라 스카이’를 연상시키는 하늘이 실사처럼 펼쳐진다. 맑은 하늘빛 위로 구름이 떠 있는 풍경은 눈부시게 아름답지만 어딘가 비현실적이고 인공적인 감각을 자아낸다. 데이비드의 꿈세계를 설계한 직원은 이렇게 말한다. “이 아름다운 모네의 하늘 아래 더 나은 삶을 당신에게 주입했습니다.”

빛과 대기의 순간적인 변화를 포착하고자 했던 인상주의 화가 모네는 눈에 보이는 대로 현실적인 자연 풍경을 그렸다. 그러나 영화 ‘바닐라 스카이’를 보고 난 뒤 다시 바라보는 모네의 하늘은 이전과 다르게 다가온다. 그의 그림 속 찬란한 순간 역시 영원할 수 없는 한낮의 꿈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어쩌면 아름다운 순간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흐르는 시간을 붙들고 싶어 하는 욕망이야말로 모네의 그림과 데이비드, 우리 모두를 이어 주는 공통된 마음인지도 모른다.

필자 김유미는 홍익대학교에서 서양미술사를 전공하고 미술관에서 교육을 연구하는 일을 맡고 있다. 동시대 미술에서 배움과 공동체를 연결하는 일에 관심을 두고 있다.
필자 김유미는 홍익대학교에서 서양미술사를 전공하고 미술관에서 교육을 연구하는 일을 맡고 있다. 동시대 미술에서 배움과 공동체를 연결하는 일에 관심을 두고 있다.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