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과 함께하는 전쟁사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더 롱기스트 데이’
1941년 가을 독·소 전역을 시작할 당시만 해도 독일의 기세는 거침없었다. 곧 소련을 점령해 항복을 받아내고 전쟁을 종식시킬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일본이 같은 해 12월 진주만 기습을 단행하고, 이어 동맹관계에 있던 독일이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전쟁 양상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1941년 12월 11일 독일과 이탈리아는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고, 진주만 기습으로 치욕을 겪었던 미국은 일본은 물론 독일에 바로 전쟁을 선포했다. 이는 그동안 중립적 입장에 있던 미국을 본격적인 전쟁의 당사국으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리고 미국의 참전은 제2차 세계대전 전체의 판세를 바꾸는 결정적 요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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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본격적 참전과 ‘독일 우선 전략’
미국은 진주만 기습을 받은 후 일시적 공황에 빠졌다. 그러나 대일·대독 선전포고를 하면서 동원령을 선포해 500만 명의 병력을 동원했다. 민간 공장은 무기와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전시체제로 전환했으며 태평양 함대를 빠르게 정비해 일본에 반격할 태세를 갖춰갔다. 다행히 당시 태평양함대 소속의 항모 3척이 모두 일본의 기습을 피할 수 있어 임무 수행이 가능했다. 미국은 일본에 대한 대응보다 대서양 건너 독일을 더 큰 위협으로 인식하고 우선 유럽에 대응하는 ‘독일 우선 전략’을 택했다.
1942년 1월 미 34보병사단 소속 병력이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에 도착했다. 그해 11월에는 북아프리카에서 진행된 ‘횃불 작전(Operation Torch)’에 약 10만 명이 참전했다. 1943년에는 50만~100만 명의 병력을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 전선에 본격 투입했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서유럽 전역에는 약 200만~300만 명의 병력이 증원됐다.
전시체제로 전환한 미국으로부터 대량의 무기와 군수물자도 유럽으로 넘어갔다. M4 셔먼 탱크와 M7 프리스트 자주포, P-51 머스탱과 B-17 플라잉 포트리스, B-24 리버레이터 등의 항공기가 유럽 전역에 증원되면서 연합군의 기세는 점점 올라갔다. 반대로 독일군은 전쟁이 지속되고 전장이 확대될수록 전쟁지속력이 급감했다.
제2전선 구축과 유럽 해방을 위한 결심
독일은 프랑스 점령 후 추가적인 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하며 서유럽 전선을 유지했다. 특히 영국의 공격에 대비해 해안선 방어를 강화했다. 주력의 상당수는 독·소 전역에 가담했지만 레닌그라드 포위전에 상당 병력이 묶여 있었고 모스크바 점령은 실패로 돌아갔다. 남쪽 스탈린그라드에서는 소련의 대규모 반격으로 30만 명이 넘게 포위망에 둘러싸였다.
게다가 북아프리카 전역에서는 롬멜의 북아프리카 군단이 1942년 알람할파전투와 2차 엘 알라메인전투에서 몽고메리가 이끄는 연합군에 패했다. 독일군이 독·소 전역에 집중하다 보니 북아프리카 전역은 우선순위가 낮아 병력 충원이 제한됐고, 지중해 제해권 상실로 보급과 유류 수급도 여의찮았다. 더욱이 1942년부터 북아프리카 전역에 미군이 투입되면서 독일군은 수세로 몰리기 시작했다.
이제 독일은 동부 전선에서는 소련의 반격에 밀리는 상황이었고, 북아프리카 전역에서는 완전히 주도권을 빼앗겼다. 오직 서유럽 전선에서만 위태롭게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연합군은 서유럽에 교두보를 구축해 제2전선을 형성함으로써 동쪽에서는 소련이, 서쪽에서는 연합군이 협공을 가해 점령당한 서유럽(특히 프랑스)을 해방하려 했다.
1943년 11월 처칠과 루스벨트, 스탈린은 이란 테헤란에 모여 서유럽 전선 구축을 위한 상륙작전 실행에 뜻을 모았다. 시기는 1944년으로 결정했고, 사령관으로는 미국의 아이젠하워 장군을 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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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 드 칼레와 노르망디, 상륙지역은?
노르망디는 프랑스 서부의 해안지대로 상륙에 성공하면 파리에 가장 빠르게 접근할 수 있는 최단거리 접근로였다. 연합군은 최종 상륙지로 노르망디를 선택했다. 하지만 독일은 노르망디보다는 북쪽으로 약 600㎞ 떨어진 파 드 칼레에 더 높은 우선순위를 두고 대상륙 방어력을 집중하면서 정예 기갑부대를 배치했다. 파 드 칼레는 영국에서 프랑스로 오기에 가장 가깝고, 연합군의 병력과 물자를 수송하는 데 유리한 지역이라 독일군은 이곳을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당시 독일로서는 방어해야 할 해안 방어선만 3860㎞에 달해 촘촘하게 대비할 수는 없었다. 롬멜은 노르망디 해안도 약 80㎞에 달하는 해안선을 갖고 있어 상륙 가능성을 고려했다. 하지만 파 드 칼레에 비해 조수 간만의 차가 크고, 대규모 상륙에는 부적절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노르망디 남쪽 코탕탱반도와 브르타뉴, 네덜란드·벨기에 해안도 검토했지만 우선순위는 상대적으로 낮았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연합군이 허위 정보를 흘려 파 드 칼레로 상륙할 것처럼 믿도록 했고, 조지 패튼 장군이 가짜 부대(FUSAG)를 지휘해 칼레로 상륙할 것처럼 속이는 기만작전, 이른바 ‘포티튜드작전’을 펼친 것이 유효했다.
노르망디를 넘어 독일로 향하는 연합군의 진격
독일군은 연합군의 상륙에 대비해 약 40만 명의 병력을 배치했다. 파 드 칼레에는 15군을 중심으로 약 20만 명의 정예 병력을 배치했고, 노르망디에는 716보병사단과 352보병사단 등이 대비했다. 그런데 노르망디에 배치된 부대는 동부전선에 투입했다가 재편됐거나 고령인 경우가 많았다. 우크라이나·폴란드 등지에서 강제 징집된 병력도 포함돼 전투력이 약했다.
특히 대상륙방어의 방법론에서도 혼선이 있었다. 롬멜은 해안선에 장애물과 병력, 해안 종심에 기갑 병력을 배치해 상륙과 동시에 결전을 주장했지만, 히틀러와 룬트슈테트는 기갑 전력을 해안이 아니라 내륙 후방에 배치했다가 상륙 지역이 결정되면 기동하는 기동방어를 주장해 어정쩡한 상태가 됐다.
연합군의 상륙작전(오버로드 작전)은 약 1년을 준비하며 치밀하게 진행됐다. 1944년 6월 6일 약 16만 명의 병력이 노르망디로 상륙을 감행했다. 우선 미 82·101공수사단과 영국 6공수사단이 사전에 공중 강습해 독일군의 증원을 차단했다. 이어 노르망디 해안을 5개 구역으로 나눠 유타와 오마하 해안에는 미군, 골드에는 영국·캐나다 연합군, 주노에는 캐나다군, 소드 해안은 영국군이 상륙작전을 펼쳤다. 약 5000척 이상의 함정과 1만 대가 넘는 항공기가 동원된 지상 최대의 상륙작전이었다.
전날 밤 12시 이후부터 시작된 공수사단의 침투를 시작으로 6일 새벽에는 항공기와 함포 사격이 상륙지역 해안선에 집중됐고, 이어 6시30분에 상륙이 시작됐다. 특히 미 1사단과 29사단이 상륙한 오마하 해안에서는 독일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르면서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상륙 교두보는 오후가 돼서야 확보됐다. 이 과정에서 연합군은 500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교두보를 확보한 뒤 3주 동안 156만 명의 병력과 33만 대의 차량이 추가로 상륙했다. 그리고 약 2개월 반이 지난 8월 25일 연합군은 마침내 파리를 해방시켰고 여세를 몰아 벨기에, 네덜란드를 거쳐 독일 국경으로 진격했다.
모리스 자르·폴 앵카의 ‘더 롱기스트 데이
1962년 발표된 영화 ‘지상 최대의 작전(원제 The Longest Day)’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전 과정을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해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으로 평가받았다. 이 작품은 코넬리어스 라이언의 논픽션과 실제 참전 용사들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노르망디 해안의 5개 상륙작전을 장장 3시간가량 긴박하게 묘사하고 있다. 특히 미국과 영국, 프랑스뿐만 아니라 독일군 시각에서도 작전 전반을 다뤘다는 점에서 다큐멘터리와 같은 사실감이 잘 표현된 작품이다.
프랑스 출신인 작곡가이자 지휘자로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 ‘닥터 지바고’ ‘사랑과 영혼’ ‘죽은 시인의 사회’ 등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작품의 음악을 담당하며 아카데미 음악상을 3회씩 수상한 모리스 자르(1924~2009)는 이 영화의 음악 전체를 담당했다. 그는 용감하고 희망적이면서도 시원스러운 느낌을 주는 행진곡 스타일로 긴박한 전투 상황 속에서도 연합군 승리에 대한 의지를 표현하려 했다. 당시 병사로 출연한 가수 폴 앵카(1941~ )는 촬영 중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영감을 얻어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해진 메인 테마 ‘더 롱기스트 데이’를 작곡했다. 이 곡은 영화만큼이나 많은 사랑을 받으며 합창곡과 하모니카 솔로, 피아노 연주 등 다양하게 편곡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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