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교양 구보의 산보 - 그때 그곳

숭유억불 견뎌내며 호국 최전선에 서다

입력 2026. 05. 21   15:39
업데이트 2026. 05. 21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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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의 산책, 그때 그곳
조선 왕실 원찰 서울 봉은사

강남 한복판에 자리한 봉은사 전경.
강남 한복판에 자리한 봉은사 전경.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봉은사는 하루 1만여 명의 대중이 찾는 거찰이다. 조계사의 말사이자 조선 왕실의 원찰이었다. 위상이 남달랐음이 짐작된다. 1970년 영동대교가 생기기 전까지는 배를 타고 가던 곳이었다. 뚝섬나루터에는 ‘봉은사행’이라고 적힌 폭 5m, 길이 12m 정도의 목선들이 셔틀버스처럼 강을 오갔다.

수도산 자락 경내에는 국보급 산사춘을 비롯해 모과나무, 엄나무, 홍매화, 소나무, 수수다리(라일락)나무 등이 오랜 연륜을 자랑하며 터를 지키고 있다. 구보는 30년 전 가람 입구에서 산사춘을 발견했을 때의 감동을 기억한다. 드물게 아름드리가 굵었던 까닭이었다.

사명대사가 머물렀던 매화당에는 지금도 매화 세 그루가 서 있다. 대사가 일본에서 얻어 온 나부백(羅浮白) 매화는 선정릉으로 옮겨졌다. 꽃받침이 거꾸로 드리우고 꽃잎이 크고 기이한 향기를 풍기는 매화였다(『만력매첩』). 뒷산에는 소나무도 빼곡했는데, 1939년의 대화재와 재선충의 공격으로 옛 모습을 잃었다가 2000년대 들어 복원됐다. 지금은 소나무와 왕벚나무들이 촘촘히 심겨 있다.

봉은사는 서기 794년 신라 원성왕 시절 지어진 견성사를 모태로 한다. 위치도 서남쪽 선정릉 근처였다. 조선시대에 성종의 능이 이곳에 들어서자 능침 사찰로 지정되면서 현재 장소로 옮겨왔다. 1㎞ 남짓 떨어진 곳에 넓은 땅을 하사받으면서 이름도 ‘은혜를 받든다’는 뜻의 ‘봉은(奉恩)’으로 바꾸었다(『전통사찰총서』). 그 덕에 원모습이 잘 보존될 수 있었다. 비슷한 사례의 원찰로 광릉 봉선사, 영릉 신륵사, 융건릉 용주사 등이 있다.

추사 김정희의 최후작으로 알려진 봉은사 ‘판전’ 현판.
추사 김정희의 최후작으로 알려진 봉은사 ‘판전’ 현판.


성리학 주도의 엄혹한 불교 배척 시대에 “왕이 절을 비호한다”며 폐사할 것을 주청하는 유생들의 상소가 있었지만, 왕이 허락하지 않아 위기를 넘겼다(『중종실록』 34년 6월 8일). 조선 불교가 잠시 부흥의 기회를 맞았을 때는 중심에 서기도 했다. 명종 대에 ‘여주(女主)’라고 불릴 정도로 절대 권력을 행사하던 대비 문정왕후 윤씨(1501~1565)와의 유착 덕이었다. 계비였던 왕후는 중종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은 직후 적통 후계자이던 세자(인종)를 제치기 위해 불교를 권력 투쟁의 지지 기반으로 삼았다. 문정왕후는 유생들의 격렬한 반대 속에서도 승려들의 과거제인 승과(僧科)와 승려 신분증이던 도첩제를 부활시켰다.

봉은사에서 치러진 승과에서 사명대사 유정 등 4000여 명이 뽑혔다. 1548년 왕후가 임명해 봉은사 주지가 된 허응당 보우(1515~1565)는 봉은사 앞, 지금의 코엑스 자리에서 승병들을 훈련시켰다. 이 승병들이 30년 후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을 전개했다. 서산대사의 격문을 받은 사명대사가 승병 2000명을 이끌고 평양성 탈환과 노원평전투에 참가한 게 대표적이다. 각성은 왜군과의 해전에 참전해 공을 세웠으며, 1624년에는 팔도도총섭으로 임명돼 승군을 지휘해 3년 만에 남한산성을 쌓았다(『도중결의』).

1565년 문정왕후가 별세하자 불교 부흥도 막을 내렸다. 보우는 율곡 이이 등 유림들의 상소로 ‘요승’으로 낙인찍혀 승직을 빼앗긴 채 제주도로 유배됐다가 곤장을 맞고 순교했다(『율곡전서』). 구보는 고려조에서 저지른 농단과 폐해 탓에 불교에 대한 조선 유림의 혐오가 커 승려들을 천민으로 분류하고 사찰을 억압했는데, 문정왕후의 비호 덕에 불교가 되살아났으니 보우대사에 대한 반감이 컸을 것으로 여긴다.

사대부들이 절을 휴식처나 공부방, 여관으로 활용했음이 여러 기록에서 발견된다. 국토 남쪽에서 한양으로 향하는 길목인 데다 주변 경관이 빼어났던 봉은사는 더욱 그러했다. 조선 중기의 문신 심수경은 지금의 옥수동 언덕 독서당에서 사가독서(임금이 휴가를 줘 학문에 전념하게 한 제도)를 하다 머리를 식힐 겸 배를 타고 저자도로 건너가 봉은사를 찾곤 했다(『견한잡록』). 윤기·이덕무 등은 여러 날 유숙하며 생각을 정리하고 책을 읽었다(『무명자집』 『청장관전서』).

봉은사에 뿌리내린 산사춘 나무.
봉은사에 뿌리내린 산사춘 나무.


서애 류성룡의 8세손은 여기서 공부하고 대과에 합격했고(『번암집』), 다산 정약용 삼형제도 이 절에서 공부하고 정조 7년에 치른 감시(監試)에 나란히 합격하기도 했다(『다산시문집』). 지방에서 한양으로 오가던 사대부들이 사람을 불러 만나고, 승려들에게 음식을 시키고, 절방을 숙소로 썼다(『하재일기』 『해동역사』 등).

그런 세월을 견딘 봉은사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건물은 판전이다. 철종 때인 1856년 지어졌고, 1878년에 중수됐다. 영기 스님이 새긴 ‘화엄경수소연의초’ 등의 경판을 안치하기 위한 용도였다. 현판에 양각된 ‘판전(板殿)’ 두 글자는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썼다. 왼쪽 끝에 세로로 ‘칠십일과병중작(七十一果病中作)’이라 병기했다. ‘71세에 과천에서 병을 앓고 있을 때 썼다’는 뜻이다.

구보는 추사가 봉은사를 아꼈음을 읽는다. 여느 사대부들과는 다른 면모였다. 추사는 제주도 유배형에서 풀려난 2년 뒤 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갔다가 1852년 돌아와서는 선친을 위해 지은 과천 초당에서 지내며 봉은사를 오갔는데, 병중이던 1856년 10월 초에도 찾아와 이 글씨를 썼다. 10월 10일에 과천에서 세상을 떠난 점으로 미뤄 사망하기 사흘쯤 전에 ‘판전’을 썼을 것으로 학계는 추측한다.

다가오는 죽음을 감지하며 쓴 글씨여서 마주할 때마다 구보는 어떤 마음으로 썼을까 생각하게 된다. 얼굴처럼 작품에도 그 사람의 내면이 담기게 마련이다. ‘전(殿)’ 자는 가분수처럼 보이는 데다 왼편 삐침을 곧게 내려 눌러썼다. 서예가 한얼 이종선(1953~ ) 선생은 “마지막이라 예감하고 획마다 전 생애를 관통해 온 영혼을 다 쏟아부었을 것”이라고 평한다.

보우대사를 기리며 2000년에 건립된 봉은사 보우당.
보우대사를 기리며 2000년에 건립된 봉은사 보우당.


봉은사는 2000년 10월 삼성동에서 개최된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에 맞춰 사하촌 자리에 보우당을 건립했다. 보우의 불교 중흥 뜻을 기리기 위함이었다. ‘요승’의 오명을 뒤집어썼던 순교자가 400년 만에 명예를 되찾았다. 구보는 유한한 사고 속에 갇혀 사는 인간의 행태를 되돌아보며 보우당 앞에서 스님이 남긴 시 한 편을 음미해 본다.

겹겹 구름 속에 암자 있는데,

처음부터 사립문은 달지 않았네.

축대 위 삼나무 늦푸르름 머금고,

뜨락의 국화 송이 저녁노을 띠었네.

서리 맞은 나무 열매 떨어지는데,

스님은 여름 지낸 옷을 꿰매네. - ‘진불암’

사진=필자 제공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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