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군사명저를 찾아서
마이클 피셔켈러, 에밀리 골드먼, 리처드 하크넷 『사이버 지속 이론: 사이버 공간에서의 국가안보 재정의』
Michael Fischerkeller, Emily Goldman, Richard Harknett. 2022. Cyber Persistence Theory: Redefining National Security in Cyberspace. 164 pp. Oxford University Press.
안보 분야의 담론을 지배하고 있는 핵심 요소는 ‘억제(deterrence)’다. 사이버안보 분야에서도 기존 억제 중심 패러다임이 지배적이다. 이 책은 이러한 담론에 대한 가장 체계적이고 근본적인 도전 가운데 하나로 평가할 수 있는 저작이다. 저자들은 “사이버 억제가 잘 작동하지 않는다”는 수준의 문제 제기를 넘어 이를 대체할 새로운 전략 이론으로서 ‘사이버 지속 이론’을 제시한다.
주류 패러다임의 오류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문제의식은 명확하다. 냉전 이후 국제정치와 국가안보를 지배해 온 억제와 강압(coercion) 중심의 사고는 사이버 공간의 현실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기존 전략이론은 사이버 공간을 ‘전쟁’과 ‘억제’의 관점에서 이해해 왔다. 즉, 국가들은 사이버 공격을 통해 상대를 강압하거나, 반대로 보복 위협을 통해 공격을 억제할 수 있다고 가정했다. 이러한 사고는 핵 억제 이론의 연장선상에서 형성됐다. 특히 미국 국가안보 공동체는 냉전기 핵전략 경험에 지나치게 의존한 나머지 사이버 공간 역시 궁극적으로는 ‘억제 가능한 공간’이라고 인식했다.
그러나 저자들은 지난 20여 년간의 현실이 이러한 가정을 부정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국가들은 사이버 공간에서 끊임없이 활동하고 있으며 대규모 해킹, 정보 탈취, 선거 개입, 공급망 침투, 산업기밀 절취, 허위정보 유포 등의 활동은 상시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활동은 전면전으로 거의 이어지지 않았다. 다시 말해 기존 억제 이론이 예상했던 ‘공격 억제’는 현실에서 발생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국가들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수준에서 지속적으로 경쟁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이것이 단순한 정책 실패가 아니라 사이버 공간의 전략적 특성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즉, 사이버 공간은 본질적으로 강압의 공간이 아니라 ‘수탈(exploitation)’의 공간이라는 것이다.
저자들이 제시하는 사이버 지속 이론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사이버 공간의 전략적 본질은 상대를 굴복시키는 강압이 아니라 상대의 취약성을 활용해 상대보다 유리한 조건을 선점하는 지속적 수탈에 있다는 것이다. 기존 국제정치 이론은 안보를 ‘영토’와 ‘물리적 파괴’ 중심으로 이해했다. 전통적 전략 환경에서는 공격과 방어가 핵심 변수였으며, 핵전략 환경에서는 상호확증파괴와 억제가 중심 원리였다. 그러나 사이버 전략 환경은 전혀 다른 구조를 지닌다. 이 공간에서는 공격과 방어의 경계가 지속 변화하며 국가들은 끊임없이 상대 네트워크 내부로 침투하고, 정보를 수집하며, 환경 자체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재설정하려고 시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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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전략적 활용
이 때문에 저자들은 기존의 공격과 방어의 균형 개념 자체가 사이버 공간에서는 충분히 설명력을 갖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사이버 공간의 핵심은 단순한 공격 우위가 아니라 ‘지속적 주도권’이다. 즉, 누가 더 빠르게 환경을 이해하고, 취약성을 발견하며, 상대보다 먼저 수탈을 수행하느냐가 핵심이라는 것이다. 사이버 공간에서는 완전한 방어가 불가능하다. 네트워크는 복잡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며, 새로운 취약점이 지속적으로 발생한다. 따라서 안보란 더 이상 ‘침입을 완전히 막는 상태’가 아니라 상대보다 더 빠르게 침투를 탐지하고, 대응하고, 다시 환경을 재설정하는 능력을 의미하게 된다. 저자들이 지속적 개입과 전진 방어(defend forward)를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러한 논리는 왜 현실과 부합하는가. 저자들의 가장 강력한 설득력은 경험적 설명력에 있다. 중국의 산업기술 절취, 러시아의 정보전, 북한의 금융 해킹, 이란의 영향력 작전 등은 모두 강압보다 수탈에 가깝다. 이들의 목적은 상대를 즉각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상대의 정치·경제·군사적 우위를 침식하는 데 있다. 특히 중국의 사이버 활동은 군사기밀 절취뿐만 아니라 산업기술, 반도체, AI, 항공우주 기술 등 전략산업 전반을 대상으로 하며, 이는 단순한 스파이 활동을 넘어 국가 경쟁력 자체를 변화시키는 전략적 활동으로 기능한다. 러시아 역시 미국과 유럽 사회 내부의 정치적 분열을 조장하고,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신뢰를 약화시키는 방식으로 전략적 효과를 추구했다. 이러한 활동은 전쟁도 아니고, 단순한 평화도 아니다. 저자들은 이를 ‘지속적 경쟁’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전략 패러다임의 전환
이러한 이론은 국방정책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함의를 가진다. 첫째, 사이버 안보를 단순히 ‘방어’의 문제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기존 정책은 네트워크 방어, 침입 차단, 억제 메시지에 지나치게 의존했다. 그러나 지속이론의 관점에서는 국가가 지속적으로 상대 네트워크를 관찰하고, 위협을 사전에 식별하며, 필요시 선제적 개입을 수행해야 한다. 이는 미국 사이버사령부가 추진한 ‘전진 방어’ 개념과 직접 연결된다. 실제로 미국은 2018년 이후 러시아의 선거 개입 시도에 대해 적극적 사이버 작전을 수행했으며, 이는 단순 억제가 아니라 “환경 자체를 재설정하는 활동”으로 이해할 수 있다.
둘째, 국방정책은 군사기관만의 문제가 아니라 총체적 국가 차원의 접근을 요구한다. 저자들은 사이버 공간에서는 정부, 군, 정보기관, 민간기업, 학계, 동맹국이 모두 연결된 네트워크를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사이버 공간의 핵심 인프라 대부분이 민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안보는 더 이상 군 단독 영역이 아니라 민관융합의 문제로 전환된다. 특히 반도체, AI, 클라우드, 통신 인프라는 모두 전략자산으로 간주돼야 한다.
셋째, 사이버전은 독립된 영역이 아니라 다영역 작전의 핵심 요소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현대 전쟁에서 사이버 활동은 정보전, 전자전, 우주작전, 경제제재와 결합해 작동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러시아는 군사작전과 동시에 대규모 정보전 및 사이버 작전을 수행했으며, 이는 전쟁 이전부터 지속돼 왔다. 결국 사이버 활동은 전쟁 ‘이전’ 단계가 아니라 이미 경쟁과 갈등이 진행 중인 ‘상시 경쟁 환경’의 일부라는 것이 이 책의 핵심 통찰이다.
정리하면 『Cyber Persistence Theory』는 사이버 안보 분야에서 기존 억제 패러다임을 넘어서는 새로운 전략이론을 제시한 중요한 저작이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단순히 기술적 논의를 하는 것이 아니라 국제정치와 전략이론 차원에서 사이버 공간의 본질을 재정의했다는 데 있다. 저자들은 사이버 공간이 강압이 아니라 수탈과 활용이며, (비)국가행위자들은 지속적인 개입을 통해 끊임없이 환경을 재설정하려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시각은 오늘날 중국, 러시아, 북한, 이란의 행동 패턴을 매우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단순한 사이버 안보 연구서가 아니라 디지털 시대 국가안보 개념 자체를 재정의하려는 전략 패러다임의 전환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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