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투 더 스테이지
연극 ‘지킬 앤 하이드’
퍼포머 홀로 15역 오가는 1인극
웅장한 오케스트라·넘버 없이도
단출한 장치 정교한 사운드·조명
배우의 연기력만으로 채운 무대
하이드, 약물이 만든 괴물 아닌
모두의 그림자라는 서늘한 통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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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은 없다. 대신 숨 막히는 침묵과 거친 호흡이 객석의 산소를 야금야금 뺏는다.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의 화려한 외피를 극단까지 걷어 내고 나니 1인극의 뼈대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웅장한 오케스트라도, 관객을 홀리는 대표 넘버도 없지만 빈자리를 느낄 새가 없다. 뮤지컬이 거대한 폭포수라면 이 연극 ‘지킬 앤 하이드’는 살갗을 파고드는 송곳 같다. 뮤지컬 버전의 스핀오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무대 위에서 한 명의 배우가 무려 15명의 인물을 숨 가쁘게 오간다. 화자는 지킬 박사의 오랜 친구이자 변호사인 가브리엘 존 어터슨. 캐스팅보드를 보면 (당연하게도) 배우 한 명의 얼굴만이 덜렁 붙어 있는데 캐릭터 이름이 어터슨도, 지킬도, 하이드도 아닌 ‘퍼포머(performer)’로 표기돼 있다. 어터슨을 전면에 내세워 기이한 사건을 역추적하는 스토리 전개는 원작 그대로다. 관객은 그의 고백과 증언을 들으며 거대한 심리의 미로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번 시즌의 퍼포머는 배수빈, 정동화, 정욱진, 차정우가 맡았다. 이 중에서 차정우의 무대를 관람했다. 배우가 등장해 첫 대사를 뱉기도 전에 압도당한 기분이다. 뭔 키가 저렇게 비현실적으로 커 보이는가. 머리가 천장에 닿을 것(물론 그런 일은 없다) 같아 아슬아슬할 정도다. 마술을 보여 주려는가. 신장만으로 놓고 봤을 때 신성록 이후 이런 종류의 위압감은 처음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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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정우는 드라마 ‘옥씨부인전’과 ‘비밀 사이’ 등에서 얼굴을 알렸지만 연극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활발하게 활동하는 배우 추영우가 형이고, 차정우의 본명은 추정우다. 아버지가 1990년대 유명 모델이었다니 온 가족이 무대 DNA를 타고났다는 얘기다.
차정우는 첫 연극 출연이라고는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노련하게 연기했다. 베테랑들도 섣불리 덤비지 못하는 1인극을 데뷔작으로 골랐다는 것부터 심상치 않다. 차정우는 목소리와 신체 변주만으로 15명의 인격을 자유자재로 갈아 끼우는 신기를 보여 줬다. 인물 사이를 넘나드는 타이밍이 기막히다. 특히 하이드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분위기가 독특했다. 지금까지 봐 온 하이드가 헐크의 사이코패스 버전 같았다면 차정우의 하이드에게선 악을 피처럼 갈구하는 뱀파이어 냄새가 났다.
무대는 1인극답게 단출하다. 어슴푸레한 조명 아래 문 하나가 외롭게 서 있다. 그 곁으로 작은 의자와 테이블, 옷걸이가 전부다. 중앙에 놓인 톱햇은 이 모든 비극을 관조하는 듯 오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퍼포머가 남겨 둔 공백을 마저 채우는 것은 정교한 사운드와 조명이다. 무대 좌우에서 입체적으로 울리는 사운드는 이 작품이 연극이라는 사실을 잊게 한다. 점점 가까워져 오는 하이드의 으스스한 구둣발 소리를 들어보시라. 빨간빛만으로 텅 빈 곳에 피비린내를 뿌린다. 복잡한 세트 없이 오직 배우의 몸짓과 대사, 빛과 소리만으로 140년 전 영국 런던의 으슥한 골목길을 뚝딱 만들어 낸다.
작품은 하이드를 약물 부작용으로 튀어나온 외부의 괴물이 아닌 사회적 가면 뒤에 숨겨진 우리 모두의 그림자로 정의한다. 도덕과 규범으로 꾹꾹 눌러 왔던 욕망이 구체적인 형상을 입은 결과물이란 것이다. 밑바닥을 들여다본 자가 마주한 건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는 통찰이 극을 관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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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미는 역시 의표를 찌르는 엔딩이다. 원작을 아는 관객일수록 충격은 배가된다. 지킬의 죽음으로 끝나는 줄 알았던 이야기는 지킬이 남긴 마지막 고발로 이어진다. 지킬은 죽기 전 어터슨에게 이 모든 비극의 책임을 묻는다. 어터슨이 지킬의 이상행동과 하이드의 악행을 충분히 눈치챌 수 있었음에도 자신의 평판과 안위 때문에 이를 방관했다는 지적이다. 어터슨이 눈을 감아 준 덕분에 지킬 안의 악마가 마음껏 자랄 수 있었다는 논리다.
차정우는 이 충격적인 반전의 순간을 소름 돋는 연기 변신으로 완성한다. 정의로운 목격자인 줄 알았던 어터슨이 지킬의 고발을 인정하며 서서히 변해 가는 과정이 압권이다. 어터슨은 자신의 위선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한술 더 뜬다. 인정은 패배가 아니라 폭주를 불렀다. 어터슨의 눈빛이 달라지는 찰나 악의 온도계는 몸부림친다. 멈출 수 없는 파멸, 그 지독한 악행으로 향하는 가속페달을 힘껏 밟는다. 정의와 법을 수호한다고 믿는 이들의 무의식 속에 얼마나 거대한 괴물이 숨어 있는지를 증명하는 순간이다. 사건을 추적하던 어터슨의 얼굴 위로 하이드의 그림자가 겹쳐질 때 객석에는 차가운 정적이 흐른다.
140년의 세월을 건너온 그림자가 2026년의 무대에 짙게 드리운다. 지킬의 숨은 멎어도 하이드의 심장은 여전히 박동한다. 우리가 인간이라는 외피를 두른 이상 그 지독한 그림자로부터 도망칠 길은 없다.
악의 본질을 파고드는 4인 퍼포머의 열연은 6월 7일까지 서울 대학로 링크더스페이스에서 만날 수 있다. 지킬이 떠난 무대에 홀로 남은 어터슨의 기괴한 미소가 한여름의 시작을 차갑게 식혀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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