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과 함께하는 전쟁사
태평양전쟁과 한스 치머의 ‘아너(Hon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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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이 소련의 레닌그라드를 포위한 채 중앙의 모스크바로 진격하기 위해 모든 역량을 집중하고 있던 1941년 12월 독일과 동맹이던 일본은 미국 하와이 오아후섬 진주만에 있는 미 태평양함대를 공습했다. 미국은 물론 동맹이던 독일도 공습이 시작된 뒤에야 인지했을 정도로 은밀히 진행된 작전이었다. 사실 소련과 치열한 전투를 수행 중이던 독일은 일본이 소련의 극동부를 공격함으로써 소련에 양면전쟁을 강요해 전투력이 분산되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은 미국이 석유 수출을 통제하자 이를 타개하고 동남아시아 지역 유전과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미국에 대한 공습을 감행했다.
예상치 못했던 일본의 진주만 공습
당시 일본은 중국의 만주와 상하이, 베이징 등지에서 중·일 전쟁을 주도하고 있었다. 여기에 1940년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하자 프랑스가 점령하고 있던 베트남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당시 미국은 일본의 이러한 남방 진출을 차단하기 위해 미국 내 일본 자산 동결과 석유 수출 통제라는 경제 봉쇄를 단행했다. 약 80%의 석유를 미국에 의존하던 일본으로서는 발이 묶인 셈이다. 결국 일본은 미국에 선제공격함으로써 치명적 패배를 안겨 경제 봉쇄를 풀고 남방 진출을 가속하고자 했다.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진주만을 공격할 경우 미 해군의 전함과 항공모함을 한꺼번에 궤멸시킬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1941년 11월 26일 이소로쿠는 6척의 항공모함에 함재기 400여 대를 탑재하고 약 10~11일의 항해를 거쳐 하와이 북쪽 200해리까지 접근했다. 그리고 12월 7일 일요일 아침 기습적인 공습을 단행했다. 먼저 뇌격기·급강하 폭격기·전투기 등 183대가 출격해 진주만의 전함과 비행장 등을 집중 공격했고, 약 30분 후 171대가 재출격해 2차 타격을 가했다.
약 2시간에 걸친 일본의 기습은 치명적이었다. 더욱이 일본의 공격을 사전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피해는 더 컸다. 당시 진주만에는 100여 척의 함정이 있었는데, 다행히 항공모함 3척은 모두 진주만 밖에 있어 공습을 피할 수 있었다. 전함 8척 중 4척이 침몰하고 4척은 손상됐다. 또 20여 척이 넘는 함정이 파괴됐고, 항공기도 300여 대가 파괴됐다. 진주만에는 지금도 당시 침몰한 전함 애리조나호가 폭발로 인해 수습하지 못한 900명 이상의 승조원 유해와 함께 수장된 상태로 안치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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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대미 선전포고와 미국의 참전
공습 다음 날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의회 연설에서 ‘12월 7일을 치욕의 날’로 규정하며 일본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했다. 12월 11일에는 일본과 동맹을 맺은 독일과 이탈리아가 미국에 선전포고하자 미국도 곧바로 선전포고하면서 전쟁 당사국으로서 유럽과 태평양 두 전선에서 전쟁에 참여했다. 미국 내 여론은 ‘적극적인 참전’으로 바뀌었다. 특히 태평양 함대가 큰 피해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대서양 건너편의 나치 독일이 더 큰 위협이라고 판단해 ‘독일 우선 전략’을 채택했다.
일본이 진주만 공습 후 남방작전을 위해 동남아로 향한 사이 미국은 500만 명이 넘는 병력을 동원하고 민간 공업시설을 군수공장으로 전환해 전차, 항공기, 폭탄 등을 생산하면서 완전한 전시체제로 전환했다. 그리고 1942년 4월 18일 일본 본토에 폭격을 단행했다. 이른바 ‘둘리틀공습(Doolittle Raid)’으로 B-25 미첼 폭격기 16대를 항공모함에서 이륙시켜 도쿄 등 주요 도시를 폭격했다. 피해는 크지 않았으나 진주만 기습으로 인한 국민적 분노를 가라앉히고 일본 본토가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줘 사기를 꺾는 심리적, 정치적 목적의 반격으로서 의미가 있었다.
미국의 반격…산호해해전과 미드웨이해전
일본은 빠르게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및 보르네오 일대, 말레이반도, 자바섬, 뉴기니섬, 괌, 웨이크섬, 솔로몬제도, 비스마르크제도 등을 점령함으로써 자원을 확보하고 본토 방어를 위한 방어선을 구축해 나갔다. 미군의 반격은 1942년 5월 4~8일 산호해해전으로 시작됐다. 당시 일본은 호주로 가는 미국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뉴기니의 포트모르즈비를 점령하려 했는데 미국이 이를 미리 파악하고, 항공모함 요크타운과 렉싱턴 등의 함대를 파견해 저지에 나섰다. 양측 함대는 함재기로 상대 항모를 공격하는 항모전을 벌였다. 하지만 일본은 항모 쇼호가 침몰하고 쇼카쿠가 큰 피해를 보며 작전을 포기하고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
1942년 6월 하와이 북서쪽에서 있던 미드웨이해전은 미국이 일본의 기세를 꺾고 공격 주도권을 잡는 결정적 전투였다. 당시 일본 해군은 미드웨이섬을 먼저 공격해 항공 전력을 무력화하면 하와이에 있던 미 함대가 뒤늦게 대응하러 나올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미 해군 정보국의 암호 해독팀은 일본의 암호 체계를 해독해 공격 목표와 시기를 사전에 파악했다. 그 결과 항모 3척이 미드웨이섬 동북쪽에 매복했다. 일본 해군은 안심하고 접근해 미드웨이섬을 공격했으나 목표물을 다 타격하지 못했다. 미군 항모의 움직임도 없자 다시 2차 공격을 위해 무장을 교체하던 중 미군 항모에서 발진한 급강하 폭격기들이 일본 항모를 급습했다. 결국 4척의 항모 중 3척(아카기·가가·소류)이 5분 만에 치명타를 맞으며 침몰했고 나머지 1척도 파괴됐다.
과달카날전투와 아일랜드 호핑
미드웨이해전으로 주도권을 잡은 미군은 반격의 고삐를 당겼다. 1942년 8월 7일부터 1943년 2월 9일까지 진행된 과달카날전투는 태평양전쟁의 향방을 결정 지었다. 당시 일본은 남태평양 진출을 위해 과달카날섬에 비행장을 건설해 호주로 향하는 연합군 보급선을 차단하려 했다. 미국은 해병1사단을 과달카날과 주변 툴라기섬에 상륙시켜 비행장을 확보했고, 이를 탈환하려는 일본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하지만 미군의 항공력과 보급능력은 우수했고, 미 육군14군단이 증원되면서 일본의 공세는 저지됐다.
과달카날 전역의 승리를 기점으로 미국은 그동안 일본이 점령했던 태평양의 섬들을 탈환하며 일본 본토로 진격했다. 이 과정에서 미군은 ‘아일랜드 호핑(섬 건너뛰기) 전략’을 구사하면서 일본군의 방어선을 우회해 전략적 요충지만 점령하는 속도전을 펼쳤다. 미군은 이 전략을 통해 일본의 주요 기지를 고립시키고 태평양전쟁의 승기를 굳혀 갔다.
태평양전쟁의 참혹함과 희생을 담은 한스 치머의 ‘아너(Honor)’
2010년 방영된 HBO의 드라마 ‘더 퍼시픽(The Pacific)’은 태평양전쟁을 배경으로 전쟁의 참혹함과 그 속에서 겪는 인간성 상실, 허무함, 슬픔 등을 다룬 사실적인 작품이다. 특히 미 해병대가 일본군과 벌인 과달카날전투, 글라우세스터, 이오지마전투, 오키나와전투 등을 유진 B. 슬레지의 회고록 『태평양전쟁』과 로버트 레키, 존 바실론 등 실제 참전 용사들의 이야기를 기초로 제작했다. 더 퍼시픽의 OST에는 2001년 전작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메인 테마를 작곡했고 아카데미상을 2회 받은 현대 영화음악의 거장 한스 치머(1957~ )가 참여했다. 그중에서도 메인 테마인 ‘아너(Honor)’는 트럼펫의 강렬하면서도 슬픈 솔로 연주로 시작하며 전쟁의 비극과 희생을 감동적으로 표현했다. 특히 참혹한 전쟁 속에서 겪는 내면의 상처와 고독을 잘 묘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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