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군사 세계 전사적지를 찾아서Ⅲ

역사의 상흔 가득…서민의 일상은 여전히 삼엄하다

맹수열

입력 2026. 05. 18   16:55
업데이트 2026. 05. 18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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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전사적지를 찾아서 Ⅲ
아프리카-우간다①

쿠데타·내전·독재 부정적 이미지 각인 
역사박물관엔 처절했던 현대사 기록 
수도 캄팔라 거리 곳곳에 무장 경비원
오랜 분쟁 속 공권력에 대한 공포심

우간다 캄팔라 시내에 걸린 선거 홍보 포스터. 사진=필자 제공
우간다 캄팔라 시내에 걸린 선거 홍보 포스터. 사진=필자 제공

 

우간다는 동아프리카의 내륙국가다. 북으로는 남수단, 동으론 케냐, 서로는 콩고민주공화국, 남으론 탄자니아·르완다와 국경을 접한다. 국토 면적 약 24만㎢, 인구 4900만 명, 1인당 국민소득은 약 1200달러 수준이며 수도는 캄팔라다. 1962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우간다는 쿠데타, 내전, 군사독재를 반복해 왔다. 그 결과 지금도 장기집권, 부패와 빈곤 문제가 여전히 국가 발전의 큰 장애요인으로 남아 있다.

알쏭달쏭한 3개국 복수비자

케냐 나이로비에서 우간다행 항공기에 탑승했다. 사실 많은 이에게 우간다는 이디 아민의 학정, 엔테베 특공작전, 소년병 등 다소 부정적인 이미지가 각인돼 있다. 1시간30분 후 탑승한 여객기가 착륙한 곳은 엔테베 국제공항. 1976년 7월 4일 이스라엘군 특공대가 전광석화처럼 인질 102명을 구출한 현장이다.

공항청사에서 외국인은 별도의 입국심사를 받았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주케냐 대한민국대사관에서 받은 3개국(우간다·케냐·르완다) 복수비자를 내밀었다. 비자를 훑어본 심사관은 도장을 찍지 않은 채 필자를 옆으로 대기시켰다. 이곳엔 5~6명의 외국인이 잘못을 지적받은 학생들처럼 불안한 표정으로 모여 있었다. 여직원이 열외자들을 구석방으로 안내했다. 그러고는 “인정할 수 없는 복수비자론 우간다 입국이 불가하다”고 폭탄선언을 했다. 외국인들이 여권 속의 비자를 내밀며 거칠게 항의했다. 필자도 100달러짜리 비자 발급 영수증까지 내밀었지만 그 직원은 “억울하면 나이로비로 돌아가 항의하라”며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결국 별도의 입국비용을 다시 지불해야 했다. 현장에선 3국 공동비자가 미흡한 전산체계로 완전하게 정착되지 못한 듯했다.

우간다 엔테베 공항 전경.
우간다 엔테베 공항 전경.


여행 상품화된 ‘엔테베 특공작전’

엔테베 공항은 최근 확장공사로 신청사를 다시 건립했다. 특공작전이 있었던 옛 공항은 현재 우간다 공군이 관리 중이다. 공항청사 내의 여행사는 ‘엔테베 작전 역사답사(Operation Entebbe Historical Tour)’라는 상품까지 홍보했다. 주저 없이 답사 신청을 하니 여행사 직원인 샤론은 2~3일 이내에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우간다 군 당국과의 사전협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수도 캄팔라로 가는 길에선 옛 공항 울타리를 둘러볼 수 있었다. 활주로 건너편으로 관제탑과 인질 수용 터미널이 보였다. 역사적인 사건현장을 직접 볼 수 있다는 기대에 흥분된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

옛 공항 활주로 끝은 빅토리아 호수와 맞닿아 있고, 주변은 평원지대다. 고도로 훈련받은 특수부대원들이 항공기 강습착륙 혹은 낙하산 강하로 급습하기 좋은 지형이다. 당시 우간다군은 인질을 분산 수용하지도 않고 한 건물에 모아 뒀다. 이스라엘군은 협상으로 시간을 끌면서 한편으로는 자세한 정보를 수집했다. 여기에 일부 석방된 인질을 통해 엔테베 공항을 손바닥 보듯이 지켜봤다. 우간다군은 ‘수천 ㎞ 떨어진 곳의 이스라엘군이 설마 엔테베까지 오겠느냐’는 안이한 생각에 빠져 있었고, 허를 찌른 이스라엘군의 작전은 보란 듯이 성공했다.

우간다 내전 당시 사용됐던 화포.
우간다 내전 당시 사용됐던 화포.

 

처절했던 우간다 현대사

우간다 역사박물관은 캄팔라 키탄테 언덕에 있다. 1908년 영국 보호령 시기에 건립된 이 박물관은 동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도 유명하다. 정문에는 총을 든 무장경비원까지 있다. 불안한 캄팔라 치안을 보여 주는 듯했다. 박물관 전시실에서는 다양한 부족의 전통의상, 무기류를 먼저 볼 수 있었다. 아울러 처절했던 우간다 현대사도 일부 사진으로 남아 있었다.

우간다에는 50개 이상의 종족이 있어 ‘하나의 국민 국가’보다 부족 정체성이 훨씬 강했다. 1962년 독립 이후에도 부족 간 내전 수준의 충돌이 많았다. 1970년대 이디 아민 정권 당시 갈등은 절정에 달했다. 숙청 대상이 된 아촐리·랑기족 군인과 정치세력 등 수십만 명이 학살당했다.

1979년 이디 아민이 쫓겨난 뒤 요웨리 무세베니는 1986년 내전 끝에 정권을 장악했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신의 저항군(Lord‘s Resistance Army)’이라는 무장세력이 무세베니 정권에 대항했다. 특히 이들은 북부 우간다에서 대규모 아동 납치와 강제징집이란 만행을 저질렀다. 그 결과 3만여 명의 어린 소년·소녀가 전투원, 강제결혼 피해자로 전락했다.

캄팔라 시내 중심부에 세워진 조형물.
캄팔라 시내 중심부에 세워진 조형물.


경찰·무장경비원에 서민들 긴장감 가득 

역사박물관을 안내했던 운전기사 아호아는 아내와 두 아이가 있다고 했다. 아내는 주부이면서 가내수공업을 하고 있었다. 하루에 한두 켤레 수제 구두를 만들어 인근 가게에 납품한단다. 택시 안에서 스마트폰을 창밖으로 내밀어 사진을 촬영하려니 그가 황급히 만류한다. 순식간에 전화기를 낚아채 가는 오토바이 소매치기가 가끔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거리 곳곳에는 과일류와 잡화를 파는 노점상이 많았다. 하지만 외국인 여행객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시내 중심가에서 ‘아이 러브 캄팔라(I Love Kampala!)’라고 새겨진 상징물을 찍은 뒤 무심코 카메라를 인접 건물로 돌렸다. 새파랗게 질린 아호아가 달려와 빨리 택시에 타라고 했다. 카메라 방향이 우간다 중앙은행 건물로 향해서라고 했다. 경비원에게 발견되면 운전기사까지 곤욕을 치른다는 것이다.

오랜 분쟁의 기억 때문인지 서민들은 경찰이나 무장경비원을 매우 조심스러워하는 분위기였다. 현장을 벗어나면서 아호아는 몇 번이고 뒤를 돌아봤다. 그는 이디 아민 시절의 공포 분위기를 설명하며 당시 시민들 사이에 떠돌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1970년대 우간다 정부는 거리에서 슬리퍼를 신고 다니는 것을 금지했다. 이를 어긴 시민이 경찰에게 붙잡혀 사람들 앞에서 극히 모욕적인 처벌을 받아야만 했다.”

캄팔라 곳곳에는 40년째 장기집권 중인 무세베니의 대통령 출마 선거 벽보가 붙어 있었다. 그 후 그는 아프리카 최장기 집권자로 지난 1월 7선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필자 신종태는 조선대 초빙교수, 충남대·국간사 외래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객원연구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세계의 전사적지를 찾아서』 등이 있다.
필자 신종태는 조선대 초빙교수, 충남대·국간사 외래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객원연구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세계의 전사적지를 찾아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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