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영화 - 정복자 1453 (2012)
감독 : 파룩 악소이
간출연 : 데브림 에빈(술탄 메흐메트 2세), 이브라힘 셀릭콜(울루바틀르 하산), 딜렉 세르베스트(에라), 센기즈 코스쿤(조반니 주스티니아니)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다
메흐메트 2세 바닷길·보급로 차단…금각만 쇠사슬로 막히자 육로 이동
우방의 침묵 속 고립된 비잔티움…55일 공성전 끝 천년 성벽 결국 붕괴
오스만 시선으로 스펙터클하게 정복 서사 재현…실제 인물 극적 재해석
“콘스탄티누스 대제 치하에서 보스포루스 해안에 황도가 건설되면서 비잔티움 제국이 시작되었고, 마지막 콘스탄티노스 11세 황제 치하에서 도시가 함락되면서 비잔티움은 무덤 속으로 가라앉았다.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함으로써 오스만인들은 유럽 영토로 넘어가는 다리를 갖추게 되었다.” 『비잔티움 제국사 324-1453』,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 지음, 까치 펴냄
성벽보다 먼저 무너진 것
“영원한 우방도 없고 영원한 적도 없다. 오직 영원한 이익만이 있을 뿐이다.”
1848년 영국 외무장관이었던 파머스턴 경이 하원 연설에서 남긴 이 말은 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현실을 가장 정확하게 설명한다.
천년 제국 비잔티움은 우방의 침묵 속에 고립됐고, 그 틈을 메흐메트 2세는 놓치지 않았다. 술탄 메흐메트 2세는 공성전에 앞서 도시의 생명줄을 끊었다. 보스포루스 아시아 쪽 요새 아나돌루 히사리에 이어 유럽 쪽에 루멜리 히사리를 세워 양안을 장악했다. 흑해에서 오는 보급선은 더 이상 콘스탄티노플에 닿을 수 없었다. 도시는 포위되기 전에 이미 고사하고 있었다.
금각만(金角灣) 입구에는 거대한 쇠사슬이 처져 있었다. 오스만 함대는 이 쇠사슬을 넘지 못했다. 그러나 메흐메트는 바다를 돌아가는 대신 산을 넘었다. 하룻밤 사이 함선 70여 척을 갈라타 언덕 너머 육로로 끌어올려 금각만 안쪽에 띄웠다. 협공을 받은 콘스탄티노플의 방어선은 급격히 얇아졌다. 1453년 4월 6일 시작된 공성전은 55일째인 5월 29일 끝났다. 천년의 성벽은 끝내 포격에 무너졌지만, 도시의 운명은 이미 바닷길이 닫힌 순간 결정돼 있었다.
그렇다면 성벽보다 먼저 무너진 것은 무엇이었나. 그것은 우방이었다. 1453년 봄, 콘스탄티노플은 고립무원이었다. 콘스탄티노스 11세가 서방에 원군을 요청했지만 돌아온 것은 침묵이었다. 같은 기독교 형제라는 명분은 이해관계 앞에서 무력했다. 로마 가톨릭과 동방정교회는 수백 년째 반목했고, 베네치아와 제노바는 오스만과의 무역 이권을 지키는 쪽을 택했다. 더 뼈아픈 배신은 가까운 곳에서 왔다. 콘스탄티노플 바로 건너편 갈라타는 제노바 식민지였다. 우방이었던 제노바인들은 중립을 선언한 채 오스만과도 교역을 이어갔다. 메흐메트 2세가 함선을 갈라타 언덕 너머로 끌어올릴 때 그들은 눈을 감았다.
콘스탄티노플 성벽을 무너뜨린 거대한 우르반 대포를 만든 기술자 우르반은 원래 비잔티움 황제에게 먼저 제안을 했던 인물이었다. 자금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거절당한 그는 곧장 메흐메트 2세를 찾아갔다. 천년 제국을 무너뜨린 대포는 제국 스스로가 만들 수도 있었던 무기였다. 전쟁에서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냉혹한 법칙을 1453년의 콘스탄티노플만큼 선명하게 보여준 사례는 드물다.
정복자의 영화, 두 개의 시선
영화 ‘정복자 1453’은 이 전쟁을 오스만 제국의 시선으로 그린다. 개봉 당시 ‘아바타’를 제치고 튀르키예 역대 흥행 기록을 경신했다. 메흐메트 2세(데브림 에빈)는 어린 시절부터 콘스탄티노플 정복을 예언받은 인물이다. 즉위 후 그는 노회한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원정을 밀어붙인다. “이 도시는 반드시 정복될 것이다. 그 정복자는 얼마나 훌륭한 지도자이며, 그 군대는 얼마나 훌륭한 군대인가.” 무함마드의 예언(하디스)을 가슴에 새긴 21 술탄의 집념이 영화 전체를 관통한다.
그의 충복 울루바틀르 하산(이브라힘 셀릭콜)은 영화의 실질적 주인공이다. 최후의 공격 날, 하산은 방패를 든 병사들의 엄호를 받으며 성벽을 기어오른다. 화살이 온몸을 꿰뚫는 상황에서도 그는 성벽 꼭대기에 오스만의 깃발을 꽂고 쓰러진다. 실제 역사 기록에 등장하는 인물을 극적으로 재해석한 장면이다.
우르반 대포의 포격, 밤사이 육로로 끌어올린 70여 척의 함선, 55일간의 공방전 끝에 열린 성문까지 스펙터클은 충분하다. 메흐메트 2세는 관대한 해방자로 묘사되는 반면 비잔틴 황제는 향락에 젖은 인물로 그려진다. 함락 이후 도시 약탈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술탄은 마지막 공격을 준비하면서 병사들에게 가라앉는 용기를 부추기기 위해 3일간의 약탈 기간을 주겠다는 약속을 했고, 그들은 도시로 몰려들어갔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의미 있는 이유는 따로 있다. 승자의 언어로만 기록해 온 역사에서, 패자의 언어로 쓰인 기록이 얼마나 드문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노스 11세는 마지막 돌격에 나서며 황제의 자줏빛 망토를 벗어 던지고 병사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이 싸움에서 그가 원했던 죽음을 맞았다.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영화는 그 장면을 짧게 처리하지만, 역사는 그 선택을 오래 기억한다. 전쟁에는 언제나 두 개의 시선이 있다. 정복자의 깃발이 꽂히는 순간, 누군가의 천년이 끝난다. 사진=배급사 제공
해협을 지배하는 자, 역사를 지배한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의 본질은 대포의 승리가 아니었다. 해협 통제권의 승리였다. 메흐메트 2세가 보스포루스 양안에 요새를 세워 도시의 보급로를 차단한 것은 본격적인 공성전보다 앞선 수순이었다. 도시를 무너뜨리기 전에 먼저 고립시켰다. 이 전략의 원형은 기원전 480년 살라미스 해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스 연합 함대는 수적으로 압도적인 페르시아 대함대를 좁은 해협으로 유인해 격파했다. 넓은 바다에서는 페르시아의 수적 우세가 위력을 발휘했겠지만 좁은 수역에서 대형 함대는 기동성을 잃는다. 해협은 강자의 힘을 약화시키고 지형을 아는 쪽에 유리하게 작동한다.
1915년 갈리폴리에서 영국과 프랑스도 같은 상황을 경험했다. 다르다넬스 해협을 돌파해 콘스탄티노플을 압박하고 러시아로 가는 보급로를 열려 했지만 오스만의 해안포와 기뢰, 험한 지형 앞에 막대한 피해를 보고 철수해야 했다. 해협을 ‘닫는’ 것보다 ‘여는’ 것이 훨씬 어렵다는 사실을 피로 확인한 전투였다.
시간을 다시 돌려보자. 1967년 이집트가 티란 해협을 봉쇄하자 이스라엘은 이를 전쟁 행위로 간주했고 6일 전쟁이 터졌다. 1973년 욤키푸르 전쟁에서는 이집트가 바브엘만데브 해협에서 이스라엘행 유조선을 차단했다. 2023년 이후 예멘 후티 반군은 드론과 미사일로 홍해를 교란해 세계 해운을 우회시켰다. 그리고 2026년 이란 혁명수비대는 해협 내 선박들에 무선으로 통과 금지를 경고했고, 선박 통행량은 급감했다. 이 해협을 통해 하루 약 2000만 배럴, 세계 해상 석유 무역량의 약 20%가 오간다. 경고 방송 하나로 세계 에너지 시장이 흔들렸다.
역사를 바꾼 바다는 하나같이 좁다. 그 좁은 바닷길 하나가 천년 제국의 운명을 갈랐고, 오늘도 세계 에너지 질서를 쥐고 흔든다. 1453년 메흐메트의 보스포루스 장악부터 2026년 이란의 호르무즈 위협까지, 해협을 지배하는 자가 역사를 지배한다는 법칙은 57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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