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과 함께하는 전쟁사
스탈린그라드전투와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8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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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독일·소련 전역 가운데 스탈린그라드(현재의 볼고그라드) 전투는 연합군 반격의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북쪽의 레닌그라드(현재의 상트페테르부르크) 포위전은 진전 없이 소강 국면이 지속됐고, 1941년 10월 초 시작한 중앙의 모스크바 공방전은 모스크바 약 30㎞ 앞까지 진출했으나 소련군의 완강한 저항과 반격으로 진입에는 실패하며 진퇴양난 상황으로 흘러갔다. 초조해진 아돌프 히틀러는 새로운 결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새로운 주력 방향으로 남부의 스탈린그라드를 지목하고, 이곳을 점령함으로써 배후에 있는 캅카스 유전지대를 확보해 유류와 식량 등 장기전에 대비한 자원을 확보하고자 했다. 스탈린그라드가 갖는 도시의 상징성을 파괴함으로써 소련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자존심을 짓밟고 저항의지를 꺾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라스푸티차에 가로막힌 모스크바 공격
독일군의 모스크바 공격 성패는 과거 나폴레옹 군대가 경험했던 것처럼 보급과 기상이 좌우했다. 대규모 기갑부대가 본토에서 먼 거리를 이동해 오면서 병참선이 늘어나자 유류와 식량 문제로 활동이 제한됐다. 게다가 1941년 10월 말 찾아온 ‘라스푸티차’, 즉 가을비로 인한 진흙탕 현상은 기갑부대를 오도 가도 못하는 수렁에 빠트렸다. 독일군도 이를 예상해 최대한 서둘러 모스크바 진격을 밀어붙였었다. 그러나 7월에 시작한 모스크바로의 기동이 길목인 스몰렌스크에서 소련군의 완강한 저항에 막히면서 진격 속도가 둔화됐다. 결국 10월 초가 돼서야 모스크바 인근에 도달할 수 있었다.
가을비가 멈추자 혹한이 더 큰 장애물로 등장했다. 동계 피복과 물자가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독일군은 사상자가 속출하고 장비 고장이 빈번해져 전투력이 급감했다. 반면 소련군은 시베리아 등에서 증원병이 속속 투입됐다. 여기에 모스크바 시민들의 필사적인 저항과 함께 게오르기 주코프가 이끄는 대반격이 이어지면서 독일군의 모스크바 공격은 좌절될 수밖에 없었다. 독일군은 1942년 1월 7일 모스크바 근교에서 밀려났다.
남부 스탈린그라드로 향하는 독일군의 진격
모스크바 공격이 좌절된 독일군은 1942년 봄 전열을 재정비해 8월부터 남부 캅카스 유전지대와 스탈린그라드로 진격하는 이른바 ‘청색작전(Fall Blau)’을 감행했다. 캅카스 유전지대는 대규모 기갑부대 기동을 위해 반드시 확보해야 할 대상이었다. 스탈린그라드는 인구 약 60만 명의 그리 크지 않은 도시였지만, 도심을 가로지르는 볼가강을 따라 각종 자원이 북쪽으로 향해 이 길목을 차단하면 소련군의 전쟁 지속력을 약화시킬 수 있었다.
프리드리히 파울루스가 이끄는 독일군 6군은 루마니아군, 이탈리아군, 헝가리군 등을 합해 약 100만 명 규모였다.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하기 위해 중앙에는 독일 6군의 주력을 배치했다. 이어 북서·남쪽의 양 날개에는 루마니아군과 기타 추축국 군을 편성했다.
소련군은 먼저 독일군을 최대한 도심으로 끌어들여 기갑부대의 발을 묶어 놓고 부대를 분산시킨 뒤 대규모 병력을 투입해 포위·섬멸한다는 ‘천왕성작전(Operations Uranus)’으로 대응했다. 스탈린은 “한 발짝도 물러서지 말라”는 작전 명령(Order No. 227)을 내리며 스탈린그라드 사수를 강조했다. 소련군은 독일군보다 많은 170만 명 이상의 병력을 투입했다.
병력을 삼키는 시가전과 소련군의 포위전
공격이 시작되자 독일군은 대규모 기갑부대의 기동과 포병 사격, 항공기 공습 등으로 스탈린그라드 시내를 거의 폐허로 만들었다. 전투 초반에만 4만 명 이상의 시민이 목숨을 잃었고 건물은 폭격으로 파괴됐으며 잔해물이 도로를 막아 기동이 제한됐다. 독일군의 주력은 도심으로 진입했다. 하지만 기갑부대의 기동력을 앞세운 독일군의 작전은 잔해물로 인해 불가능했다. 양측은 도로와 건물, 잔해물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근접전을 하며 소모적인 시가전을 벌였다. 이 전투를 흔히 ‘쥐들의 전쟁(Rattenkrieg)’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기동성을 기반으로 한 독일 전격전의 장점이 무력화된 전투였다.
영하 30도를 넘나드는 추위와 눈보라 속에서 제대로 된 방한장비도 없이 싸운 독일군은 지쳐 갔다. 이에 반해 소련군은 대규모 반격을 준비했다. 소련군은 독일군의 주력과 시가전을 펼치며 그들을 도심에 묶어 놨다. 그사이 북서쪽과 남쪽에 배치된 루마니아군과 추축국 군의 약점을 발견하고 집중 공격했다. 소련군은 양측익을 공격하기 위해 70만 명 이상의 병력과 1400여 대의 전차를 투입하며 도심 외곽으로 기동했다. 이러한 소련군의 공격으로 양측익은 무력화됐다. 마침내 독일군 주력의 배후인 서쪽 후방까지 러시아군이 차지하며 자연스럽게 독일군을 포위할 수 있었다.
포위된 독일군의 유일한 선택은 항복
11월 19일에 시작된 소련군의 포위작전은 약 5일 만에 완성됐다. 북쪽에는 니콜라이 바투틴이 이끄는 남서 전선군과 돈 전선군이 루마니아 3군의 방어선을 포격과 함께 기습적으로 돌파했다. 다음 날에는 안드레이 예료멘코가 이끄는 스탈린그라드 전선군이 남쪽의 루마니아 4기갑군을 공격해 전선을 뚫었다. 23일에는 소련군이 독일군 주력의 배후인 칼라치 지역을 점령해 포위망이 완성됐다. 독일군과 루마니아 4기갑군 약 30만 명은 포위망 안에서 고립됐지만 히틀러는 이들에게 퇴각을 금지하고 사수를 명령했다.
고립된 독일군에 유일한 보급선은 공중을 통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마저 소련의 반격으로 제한되면서 턱없이 부족한 탄약과 굶주림에 시달렸다.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 이끄는 독일 기갑부대가 구출작전(겨울폭풍작전)을 시도했으나 소련군의 방어에 막혀 실패로 돌아갔다. 소련군은 포위망을 좁혀 가며 독일군을 압박했다. 고립됐던 30만 명의 병력은 어느덧 10만 명 미만으로 줄어들었다. 1943년 2월, 파울루스 장군을 포함한 약 9만5000명이 항복하며 스탈린그라드전투는 끝났다.
스탈린그라드전투의 패배로 독일군은 독·소 전역에서 완전히 주도권을 빼앗겼다. 이는 전쟁 전반에 걸쳐 수세로 돌아서는 전환점이 됐다. 독일군의 패배 요인은 보급선이 늘어난 가운데 무리한 진격을 했던 게 결정적이었다. 게다가 동계작전 준비 부족이 전투력을 약화시켰다. 루마니아 등 추축국 군을 양 날개에 배치한 것도 취약점을 노출시킨 결과를 초래했다.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8번 ‘스탈린그라드’에 담긴 전쟁 상흔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 초연 1년 뒤인 1943년 여름에 교향곡 8번을 작곡했다. 이 곡은 전체가 5악장으로 구성된 ‘C단조’로 처음부터 ‘스탈린그라드’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기대가 큰 음악이었다. 소련 정부도 이 곡을 스탈린그라드전투 승리의 선전수단으로 사용하려 했다. 하지만 쇼스타코비치는 “내 교향곡은 묘비”라며 전투 승리보다는 전쟁으로 희생된 사람들과 스탈린 치하의 공포를 음악으로 표현하려 했다. 그는 전쟁의 참혹함과 내면의 고통을 솔직하게 담아내고자 애썼다.
이 곡은 당시 너무 어둡고 비관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결국 반혁명적이라는 이유로 연주 금지 처분이 내려졌다가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한 뒤 다시 연주할 수 있었다. 쇼스타코비치가 1945년 여름에 작곡한 교향곡 9번은 ‘승리의 교향곡’이라는 별칭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와 스탈린을 찬양하고 싶었던 소련 정부는 쇼스타코비치에게 ‘거대한 대서사시’ 규모의 교향곡 작곡을 요구했다. 그러나 쇼스타코비치는 한 시간 정도의 아주 작은 교향곡으로 답했다. 아마도 스탈린의 폭압에 대한 반발과 저항으로 기대를 배신하고 가볍고 풍자적인 곡을 썼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 곡에 관해 “음악가들은 연주하길 좋아하겠지만 비평가들은 비난하기 좋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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