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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스 다이어리] 7448개 계단 끝에서 아버지의 지휘봉을 맞잡으며

입력 2026. 05. 07   15:26
업데이트 2026. 05. 07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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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12보병사단 일반전초(GOP) 사천리중대의 계단은 오늘도 묵묵히 그 자리에 있다. 7448개. 그 계단 하나하나에는 수많은 장병의 발걸음과 숨소리, 조국 수호라는 준엄한 결의가 켜켜이 쌓여 있다. 이 길을 매일같이 오르내리며, 먼저 이 길을 걸었던 한 사람을 떠올린다. 30여 년 전 사천리중대를 지휘했던 아버지다.

아버지는 1992년부터 1994년까지 사천리중대장 임무를 맡으셨다. 지금보다 시설도, 복무여건도 열악했을 시절 아버지는 험준한 산맥에서 사천리중대를 지키는 것을 천직이자 숙명으로 여기셨다. 당시 사천리를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아버지께서 들려주신 무용담과 낡은 사진첩 속 풍경에서 묵묵히 임무를 수행하셨을 시간의 흔적과 무게, 자부심을 오롯이 느낄 수 있었다.

고군반 수료 후 야전 희망부대를 작성할 때 주저 없이 12사단 GOP 부대를 지원했다. 사천리중대는 단순한 근무지를 넘어 대를 이은 책임이자 아버지와 나의 보이지 않는 약속의 공간이었다.

꿈이자 약속이었던 사천리중대의 지휘봉. 각오는 했으나 실제로 마주한 사천리중대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는 7448개의 계단은 물론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기상 변화, 밤낮없는 경계작전의 긴장감은 매일 체력과 정신력을 한계치까지 시험한다.

하지만 이 극한의 환경에서 역설적이게도 안도감과 용기를 얻는다. 같이 땀 흘리며 밤낮없이 경계작전에 매진하는 든든한 중대원들이 있고, 이 길을 앞서 걸으셨을 아버지의 발자취가 나를 붙들어 주기 때문이다. 초소로 향하는 계단에서 아버지가 느끼셨을 막중한 책임감과 대한민국 수호의 최전선에 있다는 자부심을 공유하는 순간, 고되던 발걸음은 더 이상 인고가 아닌 영광이자 긍지로 다가온다. 이 계단을 오르며 아버지가 세워 두신 숭고한 임무 완수의 역사 위에 나만의 벽돌을 한 장씩 쌓아 올리고 있다.

이젠 ‘누구의 아들’이라는 이름표에 안주하지 않겠다. 아버지를 닮되 당신께서 일구신 토양에서 더욱 단단하게 피어나는 지휘관이 되고자 한다. ‘부자(父子)가 대를 이어 같은 부대를 지켰다’는 미담을 넘어 세대를 관통하는 군인정신의 계승과 위국헌신의 가치를 현재진행형의 성과로 증명해 보일 것이다.

어버이날을 맞아 오늘도 사천리의 계단을 오르며 되돌아본다. 아버지가 사랑했고, 이제는 내가 사랑하는 사천리중대를 바라보며 다짐한다. 아버지가 청춘을 다해 지켜 냈던 이 자리, 아들로서 더 단단하고 빈틈없이 수호하겠다고.

이정우 대위 육군12보병사단 상승향로봉여단
이정우 대위 육군12보병사단 상승향로봉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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