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교양 구보의 산보 - 그때 그곳

고색창연한 문향루에는 선비의 고아한 정취가…

입력 2026. 05. 07   15:22
업데이트 2026. 05. 07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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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의 산책, 그때의 그곳
수연산방, 코스모스가 만발했던 단편의 산실

‘한국 근대 단편소설의 완성자’ 이태준의 성북동 집
생외손녀가 ‘수연산방’ 당호 걸고 전통찻집 열어
정지용·이효석 등 당대 문인들 누마루에 앉아 담소
소설 ‘코스모스 피는 정원’ 배경 된 뜨락도 그대로

수연산방의 문향루.
수연산방의 문향루.


서울 성북동 수연산방은 전통차를 파는 카페지만 원래 소설가 상허 이태준의 집 문향루(聞香樓)였다. ‘향기를 맡는 집’이란 뜻인데 구보는 숲과 꽃과 공기 내음이었을 듯싶다고 여긴다. 1970년대 초 하숙을 이 부근에서 했던 까닭으로 구보에게는 익숙한 공간이다. 1999년 상허의 생외손녀(누이의 외손녀)가 당호 ‘수연산방’을 내걸고 전통찻집을 열었다. 구보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바로 찾아갔었다. 옛 기억이 소환돼서다.

그때나 지금이나 수연산방을 찾는 사람들은 기와집 방들과 대청마루, 누마루에 앉아 견과류와 함께 전통차를 마신다. 집의 예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담소를 나누려는 의도가 더 커 보인다. 이태준을 느끼는 것이다.

1904년 강원 철원에서 태어난 상허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연해주와 만주로 이주해 살다 부모를 잃고 1920년부터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주경야독을 하며 휘문고등보통학교에 다녔다. 가람 이병기가 교사로 근무했고, 정지용과 박종화가 선배였다. 학교 운영에 이의를 제기하며 동맹 휴교를 주도하다가 퇴학당한 뒤 1924년 일본 조치대학 유학길에 올라 3년간 머물렀다. 일본 체류 중에 쓴 단편 『오몽녀』가 조선문단에 뽑히면서 작가로 데뷔했다. 귀국 후 잡지 ‘개벽’ ‘문장’ 등에서 일하며 산문과 수필을 썼다.

이상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시를 쓸 것을 권유해 조선중앙일보 사장 여운형에게 부탁해 신문에 싣도록 도와준 이도 상허였는데, 그 시가 ‘오감도’였다. 상허는 1933년 직장 생활을 접고 성북동에 수연산방을 지어 10여 년간 거주하면서 집필에 전념했다. 이 기간에 『황진이』 『왕자 호동』 등의 장편과 『달밤』 『돌다리』 『아무 일도 없소』 등 단편, 중편 『코스모스 피는 정원』, 수필 『청춘예찬』을 썼다. 문장이 뛰어나 ‘시는 정지용, 산문은 이태준’이라는 평을 들었고 ‘한국의 모파상’ ‘한국 근대 단편 소설의 완성자’라는 별명을 얻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수연산방에 세워진 이태준 가옥표지석.
수연산방에 세워진 이태준 가옥표지석.


『달밤』과 『코스모스 피는 정원』은 수연산방을 배경으로 쓴 작품이다. 성북동으로 이사한 남자와 신문배달부와의 첫 만남에 대한 이야기를 꾸민 소설 『달밤』에는 힘든 삶을 사는 이웃에 대한 작가의 시선이 담겨 있다. 대상에 대한 깊은 관찰을 수반하는 관조(觀照)의 습관도 감지된다. 

도심과는 떨어져 외졌던 곳임에도 신문 배달이 이뤄졌던 모양이다. 당시에는 혜화동이나 돈암동 정류장에서 내렸을 것이고, 산방까지 걸어오는 데 꽤 걸렸을 터였다. 통상 배달 시간보다 서너 시간 늦은 달밤에 도달한 배달부는 “집 찾느라 수고했다”는 남자의 말에 “뭘요. 이게 제 업인뎁쇼”라고 답하고는 ‘원래 배달하던 이가 한 20부 떼어주는 것을 대신하고 3원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필두로 ‘배달원들을 위해 집에 개를 두면 안 된다’ 따위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남자가 “평생소원이 무어냐”고 묻자 “신문사 옷 입고 방울 찬 채 다니며 월급 20원을 받는 원(元) 배달을 하는 것”이라며 “그러면 개도 무서울 것이 없겠노라”고 말한다. ‘성북동 남자’는 분명히 상허 자신이겠지만 배달부에게도 자신의 경험을 투영했을 거라고 구보는 유추한다. 상허가 돌봐주는 이 하나 없이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신문배달 고학을 했던 데 따른 짐작이다.

상허는 일제 말기 빈곤과 태평양전쟁 발발로 시골로 소개돼 철원에 칩거하며 무료하게 지냈다. 이 시기를 반영한 작품 『해방 전후』는 1946년 제1회 해방문학상을 받았다. 해방 후 그는 가족을 데리고 월북했다. ‘카프(사회주의 문학 운동)’와 거리를 두는 성향을 보였던 까닭에 그의 전향은 큰 충격을 주었다.

구보는 북한의 ‘대동단결’ 구호에 이끌린 결정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하지만 상허는 1946년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돌아와 『소련 기행』을 쓴 이후 ‘퇴폐적 부르주아’ ‘반동분자’ 등으로 몰려 1956년 2월 숙청됐다(『이태준 연보』). 그가 남한에 남았더라면 주옥 같은 단편 소설을 여러 편 더 선보였을 터였다.

수연산방 누마루.
수연산방 누마루.


구보는 산방을 다시 찬찬히 들여다본다. 키가 컸던 상허가 드나들었을 높은 일각 대문 양옆 화장담은 밖에서부터 콩돌을 박아 만들었고, 담 너머로 뻗어 나온 나뭇가지가 평화로운 정경을 제공한다. 돌계단 위에 기단을 놓았고, 본채 문향루에는 누마루를 두어 멋을 부렸다. 세 겹으로 된 창문은 주인의 세심한 성정을 느끼게 한다. 대청에는 ‘수연산방(壽硯山房)’이라 쓴 현판이 보인다.

‘오래된 벼루가 있는 산속의 집’이라는 뜻인데 구보는 글씨의 모양과 굵기가 추사체와 닮았다고 여긴다. 알고 보니 상허가 추사체 필의로 쓴 것이다. 세월의 풍파 탓에 현판은 고색창연하다. 죽간서옥(竹間書屋)·기영세가(耆英世家)·문향루(聞香樓)·산수유청음(山水有淸音) 같은 편액들이 걸려 있어 선비의 고아한 아취를 맡게 된다. 상심루(嘗心樓)란 현판을 내건 집 한 채가 더 있었는데 헐리고 상허의 가족사진 속 배경으로만 남았다.

외진 곳이어서 상허도 ‘불빛이 없는 성북동, 달빛이 깁을 깔아 놓은 듯하다(『달밤』)’고 표현했다. 송림과 개천, 포도밭 풍경 속에 있던 수연산방의 고적함을 덜어준 것은 맞은편에 있던 마포 거상 이종상의 여름 별장 일관정(一觀亭)이었다. 30년 격차를 두고 ‘ㄱ’자 모양으로 지어진 두 집은 구조가 쌍둥이 같았다.

상허와 함께 순수문학을 지향하던 구인회(九人會)가 문향루를 찾을 때는 일관정 누마루로 자리를 옮겨 문학 이야기를 이어가곤 했다. 정지용·김기림·이효석·유치진 등 멤버들은 이 공간을 좋아했다. 이효석과 상허가 ‘포도밭이 있는 지역’임을 언급하고 있어서 당시 성북동에 포도원이 많았음을 알게 한다. 구보는 여름과 가을에 걸쳐 상허가 바람에 실려오는 달콤한 포도향에 취하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수연산방 뜨락의 코스모스가 피어 있던 곳.
수연산방 뜨락의 코스모스가 피어 있던 곳.


상허가 『코스모스 피는 정원』에서도 묘사했듯 산방 화단에는 코스모스가 피었다. 지금은 들판에서 쉽게 보는 야생화지만 당시에는 소설의 소재로 쓰였을 정도로 희귀했다. 1910년 전후에 선교사들이 갖고 들어온 이 꽃은 한민족의 정서와 잘 맞아 뭍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이내 가을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 ‘이 꽃을 구경하러 서소문에서 일부러 찾아온 사람도 있었다’고 상허는 썼다.

이 공간을 명소로 만들었던 코스모스가 사라진 뜰에는 사철나무와 패랭이꽃이 자리하고 있다. 구보는 ‘비 오시는 날 다시 찾아와 문향루 누마루에 앉아 상허의 단편 하나를 읽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수연산방을 떠났다. 사진=필자 제공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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