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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없는 인간, 기개를 탐하다

입력 2026. 05. 07   16:27
업데이트 2026. 05. 07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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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곁에, 예술
옛 그림 속 숨은 이야기 (17) 매 그림(膺圖)

날카로운 발톱과 매서운 눈빛, 재빠른 순발력…
심사정 사냥의 긴장감 담고, 이암은 화려한 ‘가응도’ 그려
귀족들은 길들여 사냥하고 외교 선물로 활용하기도
다양한 그림 속 자유로운 모습 인간의 소유 욕망 엿보여
 

심사정(沈師正·1707~1796), ‘토끼를 잡은 매(豪鷲搏兎圖)’, 18세기, 종이에 채색, 115.1㎝× 53.6㎝,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심사정(沈師正·1707~1796), ‘토끼를 잡은 매(豪鷲搏兎圖)’, 18세기, 종이에 채색, 115.1㎝× 53.6㎝,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날개를 펼치며 바람을 가르던 매가 먹잇감을 포착했다. 순간 방향을 바꿔 날개를 접고 땅으로 내리꽂듯 떨어져 날카로운 발톱으로 멧토끼를 매몰차게 낚아챈다. 겁에 질린 토끼는 매서운 눈동자를 마주하며 생사의 순간을 맞닥뜨렸다. 이 광경에 놀란 장끼와 까투리가 혼비백산해 바위 아래 숨을 곳을 찾아 얼굴부터 들이민다. 소나무 가지에 앉아 있던 까치 한 쌍 중 한 마리가 내려와 주변을 맴돌며 토끼를 도와줘야 하나 갈팡질팡하자 짝꿍 까치가 이를 말리는 듯 깍깍거린다. 

이 작품은 심사정(沈師正·1707~1769)이 그린 ‘토끼를 잡은 매’라는 작품이다. 빨간색 열매가 열리는 늦가을 조용한 산에 일대 파란을 일으킨 ‘매’가 사냥하는 장면이 주제다. 포식자와 사냥감, 하마터면 먹이가 될 뻔한 꿩의 눈빛과 행동에 주목하면서 시선을 따라가면 그림의 공간이 긴장감으로 채워져 있다. 심사정이 왜 유명한지 이름값을 절로 알게 한다. 먹의 농담과 옅은 채색을 이용한 이 작품은 화가의 유연하고 강인한 붓놀림이 만들어낸 사물의 기운을 느끼게 한다.

이처럼 자유롭게 날며 사냥하는 매서운 매와 다르게 세종의 아들 임영대군의 증손인 이암(李巖·1507~1566)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가응도’는 화려한 매를 보여주고 있다. 횃대에 앉아 있는 매는 매부리부터 시작하는 날카로운 인상과 등, 날개, 꼬리로 이어지며 매끈하지만 강인한 인상을 주고 있다. 생김새는 참매에 가까운 도상으로 등은 진갈색이지만 목부터 가슴, 배, 다리까지 흰 바탕에 검정 작은 점이 줄지어 있다. 꽁지깃에는 주인의 이름이 적힌 시치미가 달려 있고, 가죽 끈으로 양발 사이를 묶고 다시 화려한 색의 줄과 매듭이 이어진다. 횃대를 진홍색 비단으로 감싸고 지지대는 은상감으로 조각돼 무척이나 화려하고 진귀해 보인다. 비단 바탕에 진한 채색으로 그린 그림은 이 매의 주인이 굉장히 높은 신분과 재력을 갖췄다는 것을 짐작게 한다.

횃대에 앉은 매는 매사냥용으로 길들인 무척이나 귀한 몸이었다. 매사냥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 몽골, 중동, 유럽, 아프리카에서도 수천년 동안 이어진 수렵활동이다. 특히 왕족이나 귀족층이 매사냥을 즐겨 나갔다. 사냥매를 키우기 위해서는 매의 둥지에서 어린 매를 데려와 키우거나 이미 성장한 매를 붙잡아 길들였다. 매를 부리는 수할치(봉받이·매받이꾼)는 매의 두 다리에 가죽을 서너 번 감고, 그 위에 구멍을 뚫어 젓갈끈을 만들어 잇는다. 매의 행방을 알리는 방울을 꽁지깃에 달고 동물의 얇은 뼈로 만든 판(시치미)에 주소나 주인 이름을 새겨 넣는다. 대개 매사냥으로 훈련한 매는 3~4년 동안 사냥하다가 다시 풀어준다고 한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태조왕 69년(121년)에 숙신(肅愼)이 와서 자색 여우가죽과 흰매, 흰말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의 평양·안악지역 고분벽화에서도 말을 타고 매사냥하는 모습이 보인다. 백제 아신왕(阿莘王)이 신라 눌지왕(訥祗王)에게 흰 매를 보냈다는 기록, 신라 경문왕(景文王)이 당에 보낸 매 관련 선물 목록 등은 삼국시대에 이미 매사냥이 왕실을 중심으로 널리 퍼져 있고, 사냥매가 외교 선물로 활용됐음을 보여준다.

백제에서 왜(倭)로 매사냥을 전한 기록도 보인다. 『일본서기』 355년 기록에는 ‘주군(酒君·백제 왕족)이 매를 훈련한 뒤 다리에 가죽끈을 매고 꼬리에 방울을 달아 왕에게 바쳤다. 그 뒤에 인덕왕(仁德王)이 매를 들고 나가서 많은 새를 잡았다’고 전한다.

고려시대에는 몽골과 대외적 관계로 1275년 충렬왕 때 매사냥과 사육을 위한 응방(鷹坊)이 설치됐다. 매사냥과 사육서인 『응골방(鷹?方)』도 편찬됐다. 『응골방』에는 매는 쉽게 지쳐 매를 날리는 방응(放鷹)이 많아서는 안 되고, 하루 사냥하면 하루는 요양해야 한다고 적혀 있다. 2월에 날씨가 온화할 때 훈련을 시키고 3~4월에는 방응이 많을 경우 피로와 갈증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매의 주 먹이가 꿩, 개, 닭, 토끼, 오리 등 민가에서 주로 키우는 동물이어서 매사냥 때마다 백성의 원망이 뒤따랐다.

조선시대에도 매사냥은 여전히 왕실을 중심으로 왕실 종친과 고관들이 즐길 수 있는 일종의 스포츠로 사랑받았다. 조선 초기에는 중국의 명나라 황제가 특별히 매의 진상을 요구하기도 했다. 기록을 보면 세종이 명나라에 금을 진상하는 폐단을 막기 위해 노력하다가 해청 등 매를 구해 진헌하는 것으로 바뀐다. 이로 인해 각 도에 채방사를 보내 매를 포획했다. 일본에서도 왜관을 통해 조선의 매를 구하는 요청이 많았다. 기록을 보면 17세기 최상급의 매는 쌀 열다섯 섬이 넘는 가격에 거래되기도 했고, 금 서른 냥에 거래되기도 했다.

이암(李巖·1507~1566), ‘가응도(架鷹圖)’, 16세기, 98.1×54.2㎝(그림), 비단에 채색, 보스턴미술관 소장.
이암(李巖·1507~1566), ‘가응도(架鷹圖)’, 16세기, 98.1×54.2㎝(그림), 비단에 채색, 보스턴미술관 소장.


이러한 귀중한 매를 그린 그림 역시 많이 사랑받았다. 안평대군(安平大君·1418~1453)도 중국 화가가 그린 매 그림을 소장하고 있었다.

‘왕공엄(王公儼)은 화초(花草) 금수(禽獸)를 잘하였는데, 의(義)만 취하여 이루었으나 저절로 생기가 있다. 목화도(木花圖) 열이 있는데, 송이가 모두 만개한 가운데 새들이 서로 우짖으며, 화초도 넷과 과목도(果木圖) 넷이 있는데, 꽃과 열매와 초충(草?)이 선명하고 생동하며, 패하노자도(敗荷鷺?圖) 하나, 황응도(黃鷹圖) 하나, 해청도(海靑圖) 셋, 도화요자도(桃花?子圖) 하나, 아골도(鴉?圖) 하나가 있는데, 혹은 깃을 거두고 몸을 우뚝 세웠고, 혹은 날아가며 날쌔게 치닫는 형상이 각각 핍진하다.’ (신숙주, 화기 『동문선(東文選)』 제82권 수록)

글에는 황응도, 해청도, 아골도 등 다양한 종류의 매가 등장한다. 해청은 해동청으로 당시엔 ‘송골매’라고 불렀다. 아골은 ‘새매의 수컷’으로 ‘난추니’라고 불렀다. 실제로 『세종실록』에는 매의 종류가 다양하게 나열돼 있다. 당시 세종은 명나라에 진상할 매를 찾느라 골머리를 앓았다. 그래서 도화원 화원들에게 매 그림을 그리도록 한 뒤 전국 각지에 매를 잡아 오라 명했다. 성공한 이에게는 후한 상금과 승진도 제시했다.

조선에서는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에서 나는 해동청을 가장 좋은 사냥매로 쳤는데 세종이 언급한 매의 종류는 매우 다양했다. 귀송골(貴松骨), 거졸송골(居松骨), 저간송골(這揀松骨), 거거송골(居擧松骨), 퇴곤(堆昆), 다락진(多落進), 고읍다손송골(孤邑多遜松骨) 등으로 각 매의 생김새가 세세하게 언급됐다.

가장 훌륭한 매를 칭하는 ‘송골매’의 ‘松骨’은 ‘방랑자’라는 뜻을 가진 몽골 말 ‘songquor’에서 왔다고 한다. 조선 후기까지 다양하게 이어진 매 그림을 보면 방랑의 새를 어떻게든 나의 소유로 만들고 싶던 사람들의 욕망을 발견하게 된다. 그림 속 화려한 횃대 사이로 매의 두 다리를 엮은 끈을 보며 여러 인간사를 떠올려 본다.

필자 한세현은 서울디자인재단 DDP 전시팀에서 전시 기획 및 교육 운영을 담당했다. 현재 미술사를 공부하고 있으며 국가유산청 문화유산감정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필자 한세현은 서울디자인재단 DDP 전시팀에서 전시 기획 및 교육 운영을 담당했다. 현재 미술사를 공부하고 있으며 국가유산청 문화유산감정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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