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사람 그리고 세계문화유산
이스탄불 루멜리 히사르 요새 - 고도(古都) 콘스탄티노플 점령의 전초기지
메흐메트 2세, 콘스탄티노플 점령 계획
보스포루스 해협 막는 고립화 전략 추진
해안 따라 포격 가능한 요새 구축하고
허가받은 선박만 통과 가능하게 통제
지원 끊기자 난공불락 3중 성벽 와르르
동로마 수도 오스만 손에…중세의 종말
|
1453년 늦은 봄 세계사 흐름을 바꾼 사건이 벌어졌다. 1000년 가까이 동로마제국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튀르키예 이스탄불)이 오스만제국에 의해 함락된 것이었다. 이 사건은 흔히 중세 종말과 근대의 시작을 상징하는 역사적 분수령으로 언급된다. 하지만 거대한 성벽과 장구한 전통을 지닌 도시가 하루아침에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그 이면에는 오랜 준비와 치밀한 전략이 존재했다. 그 상징적 유적이 바로 보스포루스 해협의 유럽 쪽에 있는 거대한 요새 루멜리 히사르(1985년 세계문화유산 지정)다. 루멜리 히사르는 단순한 방어시설이 아니었다. 콘스탄티노플을 완전히 고립시키기 위한 전략적 담장이자 요새 건설을 지시한 메흐메트 2세의 야망을 석재로 구현한 증거였다.
1451년 오스만제국의 술탄에 오른 젊은 메흐메트 2세는 오래전부터 한 가지 목표를 흉중에 품고 있었다. 바로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는 일이었다. 이 도시는 단순한 수도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노플은 지중해와 흑해를 연결하는 교역의 중심지이자 동로마제국의 정치·종교적 권위의 상징이었다. 수 세기에 걸쳐 수많은 군대가 이 도시를 노렸지만 대부분 실패했다. 바로 도시의 강력한 방어 시설인 테오도시우스 성벽 때문이었다.
이러한 정황을 꿰뚫고 있던 메흐메트 2세는 다른 접근 방법을 택했다. 그는 단순히 정면 공격만으로 무너뜨릴 심산은 아니었다. 먼저 도시를 외부 세계로부터 완전히 고립시키려 했다. 그 핵심은 바로 보스포루스 해협에 대한 완벽한 통제였다. 이 좁은 해협은 흑해와 마르마라해를 연결하며, 동시에 유럽과 아시아를 나누는 천연 경계선이었다. 흑해 연안에서 번성한 제노바 식민지들은 동로마제국과 긴밀한 교역 관계를 맺고 있었다. 전쟁이 발발했을 때 이 해협을 통해 지원 병력이나 물자가 유입될 가능성이 높았다. 따라서 이 통로를 차단할 경우 콘스탄티노플은 사실상 포위된 것이나 진배없었다.
|
해협의 가장 좁은 지점에는 이미 하나의 요새가 존재했다. 그것은 아시아 땅 아나톨리아 쪽에 있는 아나돌루 히사르였다. 아나돌루 히사르는 14세기 말 술탄 바예지드 1세의 명령으로 세워졌다. 하지만 이 요새만으로 해협을 완전히 통제하기는 어려웠다. 선박은 여전히 유럽 쪽 해안을 따라 항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메흐메트 2세는 해협의 반대편, 즉 유럽 쪽 영토에 새로운 요새의 건설을 결심했다. 두 요새가 서로 마주 보게 될 경우 그 사이를 통과하는 모든 선박을 감시하고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452년 4월 중순 마침내 술탄의 공사 개시 명령이 떨어졌다. 장소는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가장 협소한 지점으로 선정됐다. 폭이 약 700m에 불과한 이곳에 거대한 포대를 갖춘 요새가 들어선다면 해협을 지나는 선박은 사실상 오스만 제국군의 수중에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루멜리 히사르 요새가 역사적인 첫 삽을 떴다. 메흐메트 2세는 요새 건설작업을 자신이 신뢰한 세 명의 장군에게 맡겼다. 책임자로 임명된 장군들은 높이 20~28m에 이르는 거대한 탑 1개씩을 담당했다. 곧 완성될 3개의 탑은 건설을 진두지휘한 지휘관의 이름을 빌려 사르자 파샤탑, 할릴 파샤탑, 그리고 자가노스 파샤탑으로 명명될 터였다. 특히 세 탑에는 요새의 핵심 시설인 포대가 들어설 예정이었다.
술탄의 최우선 관심 사항인지라 요새 건설 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제국 각지에서 수천 명의 노동자와 장인들이 동원됐다. 요새 축성에 필요한 돌과 목재 또한 쉴 새 없이 운반됐다. 심지어 근처 그리스 정교회 예배당과 폐허더미에서 채취한 석재도 재활용됐다. 이러한 추진력에 힘입어 놀랍게도 불과 약 4개월 만인 1452년 8월 요새 공사가 마무리됐다.
그렇다면 이토록 단기간 내에 완성된 요새는 과연 어떠한 모습이었을까? 요새는 해협을 조망하는 가파른 언덕 위에 세워졌다. 요새의 전체 구조는 보스포루스 해안을 따라 약 250m로 길게 이어진 성벽과 세 개의 대형 탑, 그리고 10여 개의 작은 망루로 이뤄져 있었다. 성벽의 두께는 지점에 따라 7m에 달했고, 높이는 20m에 이르렀다. 내부에는 병영과 탄약 창고, 식수 저장시설, 그리고 작은 모스크 등이 들어섰다.
루멜리 히사르의 진정한 위력은 성벽이 아니라 포대에 있었다. 요새에는 여러 개의 대형 포가 설치됐고, 이를 이용해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항하는 선박을 직접 공격할 수 있었다. 요새가 완성되자 메흐메트 2세는 즉각적으로 해협 통제를 시작했다. 일단 해협에 진입하는 모든 선박은 요새의 허가를 받아야만 통과할 수 있다고 공포했다. 이 명령을 어기는 선박은 포격을 각오해야만 했다. 실제로 베네치아 상선 한 척이 검문 절차를 무시한 채 항해하다가 요새로부터 포격을 받아 침몰했다. 생포된 선장은 처형됐고, 선원들은 포로 신세가 됐다. 이 사건은 해협 통제가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실제 군사력에 의해 강제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콘스탄티노플은 흑해 쪽 지원을 사실상 포기해야만 했다.
이제 메흐메트 2세는 자신의 오랜 꿈인 콘스탄티노플 점령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동로마제국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는 7000여 명의 방어 병력이 전부였지만, 언제나처럼 ‘난공불락의 수호신’인 테오도시우스 3중 성벽에 의지해 대응하려 했다. 하지만 루멜리 히사르의 존재는 이미 도시 방어의 전략적 상황을 크게 악화시키고 있었다. 해협을 가로막고 있는 오스만제국의 두 요새로 인해 긴 세월 도시의 든든한 우군이던 흑해로부터의 지원이 거의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루멜리 히사르는 단순히 해협을 감시하는 요새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오스만군은 육지에서는 일명 ‘우르반 거포’를 이용해 성벽을 공격했고, 바다에서는 함대를 이용해 도시를 봉쇄했다. 루멜리 요새는 이러한 봉쇄 작전의 북쪽 관문 역할을 했다. 결국 콘스탄티노플은 외부 세계와 거의 단절된 상태에서 공성전을 수행해야만 했다. 1453년 5월 29일 새벽 제국의 정예인 예니체리를 앞세운 오스만군은 총공격을 감행했다. 치열한 전투 끝에 성벽을 돌파했고, 마침내 ‘불패의 도시’ 콘스탄티노플은 메흐메트 2세의 수중으로 떨어졌다.
오늘날 보스포루스 해협에는 루멜리 히사르의 웅장한 성벽이 여전히 버티고 있다. 물론 이 요새는 단독으로 세계문화유산은 아니고 이스탄불 전체의 문화유산에 포함돼 있다. 그렇다고 루멜리 히사르의 존재감이 작아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단순한 유적이 아니라 한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 순간을 상징하는 기념물과도 같기 때문이다. 이곳을 찾는 방문객은 요새 건설을 통해 콘스탄티노플을 향한 자신의 의지를 표출한 메흐메트 2세의 당찬 기상과 만날 수 있다.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
이 기사를 스크랩 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