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과 함께하는 전쟁사
레닌그라드 포위전과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7번, Op. 60
1941년 독소전쟁 가장 치열한 전장
고립된 시민, 아사와 동사에 내몰려
의용소방대원으로 현장 지킨 작곡가
용기·항전의지 보여주려 쓴 교향곡
살아남은 단원 20명 남짓과 한 초연
리허설 중 연주자 쓰러져 사망하기도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1975)는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해 그의 고향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가 포위됐을 때 그곳에 있었다. 그는 독소전쟁의 가장 치열한 전장에서 그 유명한 ‘교향곡 7번, Op. 60’을 작곡했다. 일명 ‘레닌그라드 교향곡’이라고도 부른다. 당시 그는 포위된 레닌그라드에서 방공감시원 겸 의용소방대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실의에 빠진 주민에게 용기를 주고 끝까지 독일에 항전하겠다는 의지를 보여 주기 위해 이 곡을 작곡했다.
포위된 레닌그라드에 울려 퍼진 ‘레닌그라드 교향곡’
모두 4악장으로 구성된 7번 교향곡은 1941년 8월 1악장이 완성돼 ‘전쟁’이라는 부제가 붙었다. 이어 그해 9월 2악장, 10월엔 3악장이 완성됐다. 4악장은 조금 늦은 12월에 마무리됐다. 2악장에는 ‘회상’, 3악장엔 ‘조국의 광야’, 4악장에는 ‘승리’라는 부제를 붙였다. 부제만 보더라도 얼마나 간절함이 담겨 있는지 알 수 있다. 이러한 부제는 후에 곡의 해석을 제한할 수 있다는 생각에 쇼스타코비치 자신이 삭제해 버렸다. 다만 그는 교향곡을 완성한 뒤 악보 첫 장에 “이 교향곡을 레닌그라드시에 헌정한다”고 쓰기도 했다. 소련 당국은 그를 라디오 방송에 출연시켜 이러한 교향곡을 작곡 중이라는 내용을 알리고 직접 피아노 연주를 하게 했다.
첫 연주는 전쟁으로 준비가 늦어져 1942년 3월 5일 쿠이비셰프(모스크바 동쪽)의 문화궁전에서 사무엘 사모수드가 지휘하는 볼쇼이극장 관현악단에 의해 이뤄졌다. 이례적으로 소련 전역에 공연 실황이 라디오로 생중계됐다. 초연과 동시에 소련의 많은 언론이 파시즘에 대항하는 저항의지를 담은 역작이라고 대서특필했다. 악보는 국립음악출판소에서 간행됐으며, 최신 소재였던 마이크로필름에도 옮겨졌고 미국과 영국 등 연합국에 전해져 연주됐다.
8월에는 포위된 레닌그라드에서 이 곡이 연주됐다. 당시 지휘자 칼 엘리아스베르크는 레닌그라드 방송 관현악단의 단원을 직접 찾아다녔지만, 살아남은 이가 불과 20명 남짓이어서 이 교향곡을 연주하기엔 부족했다. 군인 중 연주자들을 뽑아 동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연주자 대부분이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악기 연주가 힘들었으며, 리허설 도중 쓰러져 사망하는 이도 있었다. 이런 열악한 여건에서도 공연은 마침내 열렸고, 시민들에게는 용기와 더불어 승리의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됐다. 공연을 마친 뒤 한 시간이나 박수가 이어졌다고 한다.
스탈린의 레닌그라드 사수 명령
1941년 6월 독일은 ‘바르바로사’ 계획에 따라 일제히 소련을 향했다. 그중에서도 독일 북부집단군의 진출 속도가 두드러졌다. 8월에는 급기야 레닌그라드시 외곽까지 나아갔다. 레닌그라드에는 약 330만 명의 시민이 피란을 가지 않고 잔류 중이었다.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은 강력한 저항보다 지연전을 펴면서 철수하는 형태로 군대를 종심 깊게 운용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스탈린은 레닌그라드시 주민은 철수 없이 그대로 사수할 것을 명령했다. 레닌그라드는 과거 소련의 수도이자 공산혁명의 상징적 장소로 그 의미가 남다른 곳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발틱함대가 위치해 있고 상당수의 군수물자 생산시설이 자리해 경제적으로도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소련군과 레닌그라드 시민이 쉽게 항복하고 레닌그라드를 내줄 경우 독일 북부집단군 병력이 모스크바로 전환됨으로써 위험해질 상황이었다. 독일 북부집단군이 레닌그라드시를 점령할 무렵 아돌프 히틀러는 중부집단군의 전력을 증원해 모스크바를 속히 점령하길 원했다. 이에 북부집단군의 4기갑군이 중부로 전환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북부집단군은 전력이 부족해 레닌그라드 시내 진입에 제한을 받았다. 외곽을 포위하고 모든 통신과 보급 루트를 차단하는 등 완전히 고립시킨 뒤 포격을 가함으로써 몰살시키고, 굶주리게 함으로써 항복을 받아 낸다는 전략을 구사했다. 레닌그라드 시민은 꼼짝없이 모든 외부로부터의 지원이 차단된 상태로 고립됐다.
굶주림에 죽어 가면서도 끝까지 버틴 시민들
당시 작전상황은 레닌그라드 남쪽을 독일군이, 북쪽은 핀란드군이 포위했다. 그 외 지역은 북동쪽에 라도가호수, 북서쪽에는 핀란드만이 있어 자연스럽게 포위망이 형성됐다. 독일군은 해상을 통해 식량과 보급품을 운반하는 모든 기선 운항을 막았고, 동남쪽의 철도도 점령함으로써 육상과 해상의 보급로를 차단했다. 유일하게 접근할 수 있는 루트는 라도가호수를 경유하는 것이었는데, 겨울철 결빙되기 전까지는 제한됐다.
독일군에 의해 포위된 레닌그라드는 이제 외부로부터의 모든 보급이 차단된 상태에서 매일 반복되는 독일군의 포격을 받으며 버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1941년 9월 8일부터 1944년 1월 27일까지 약 872일간 독일군의 포위하에 있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레닌그라드 포위전이다. 식량이 부족해 처음엔 배급제를 시행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도 제한을 받아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했다. 1942년 1~2월에는 하루에 700~1000명이 기아로 죽어 갔다. 가죽을 삶아 먹거나 쥐, 곤충, 새, 애완동물을 잡아먹는 것은 물론 인육을 거래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레닌그라드 경찰은 식인종 특별단속반을 운영했고, 200여 명을 유죄 판결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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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와 희망을 준 저항의 선율
1941년 11월부터 1942년 2월까지 혹한에는 먹을 게 절대적으로 부족해 톱밥이 다량 함유된 혼화제 성분의 빵을 배급받았다. 그마저 군인과 노동자만 지급받기도 했다. 영하 30도가 넘는 혹한으로 인해 난방연료 부족도 문제였다. 동사하는 사람이 속출했고, 시내 여기저기에 시신이 즐비했다. 이 기간 군인 150만 명 이상, 노약자와 여성 등 민간인 140만 명 이상이 포격 또는 기아·동사로 사망했다고 한다.
당시 레닌그라드에 거주하던 11세의 타냐라는 소녀가 일기장에 남긴 글을 보자. “1941년 12월 28일 밤 12시30분 제냐 언니가 죽었어요./ 1942년 1월 25일 오후 3시 할머니가 죽었어요./ 1942년 3월 17일 새벽 5시 레카 오빠가 죽었어요./ 1942년 4월 13일 새벽 2시 바샤 아저씨가 죽었어요./ 1942년 5월 10일 오후 4시 레샤 아저씨가 죽었어요./ 1942년 5월 13일 오전 7시30분 엄마가…./ 사비체바 집안 사람들이 죽었어요./ 모두 죽었어요./ 타냐 혼자만 남았다….” 그때 상황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보여 주는 글이다.
타냐도 1944년 영양실조와 면역 저하 등으로 끝내 숨지고 말았다. 이 일기는 전쟁이 끝난 뒤 1945년 독일의 나치 전범들을 다루는 뉘른베르크 국제전범재판에서 증거로 채택되기도 했다.
이러한 최악의 상황에서도 레닌그라드 시민의 저항의지는 꺾이지 않았고, 마침내 희망의 빛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특히 쇼스타코비치가 포위된 레닌그라드에서 작곡한 7번 교향곡은 시민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기폭제가 됐고, 레닌그라드의 참혹한 상황을 외부세계에 알리는 계기로 작용했다. 1944년 1월 독일군은 레닌그라드 외곽의 포위망을 풀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스탈린은 레닌그라드에 ‘영웅도시’라는 칭호를 부여했고, 쇼스타코비치에게는 ‘스탈린상’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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