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까지 대대 정작과장으로 지휘통제실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도식화된 상황판에서 항공기 움직임을 통제하고 유선으로 상황을 확인하며 산불을 ‘데이터’와 ‘전술’로만 접해 왔기에 얼마전 발생한 경남 함양군·밀양시 산불은 전혀 다른 무게로 다가왔습니다. 올해 헬기중대장 직책으로 실제 현장에서 제대장 임무를 수행하며 마주한 산불은 그간 알고 있던 숫자의 기록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위협적이었습니다.
작전지역에 진입하자마자 시야를 가로막는 자욱한 연기는 지휘통제실에서 체감할 수 없었던 공포이자 도전이었습니다. 기체 안으로 스며드는 매캐한 탄내와 엔진의 진동 속에서 지난해 지휘통제실에서 현장으로 전파했던 수많은 내용이 현장 인원들에게 얼마나 무겁게 다가왔을지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특히 연기 사이로 잠깐 식별됐던 산자락의 작은 농장은 심장을 뛰게 했습니다. 지난해에는 ‘방어선 내 시설물’에 불과했을 그곳이 반드시 지켜야 할 누군가의 소중한 터전으로 보였습니다. 안전을 고려하면 과감히 임무를 포기할 수도 있었지만, 그 농장을 지키기 위해 연기를 우회해 정확한 지점에 물을 투하하던 순간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현장 지휘관’이 됐음을 실감했습니다.
불과의 사투가 이어지던 중 예기치 못한 하늘의 도움이 찾아왔습니다. 갑작스럽게 내리기 시작한 비는 인간의 힘으로 다 잡지 못한 잔불을 잠재우며 진화작전에 결정적 도움을 줬습니다. 화마를 억제하려 분투하던 우리에게 그 비는 하늘이 내린 축복과도 같았습니다.
이번 작전의 성공은 조종사, 정비사, 항공정비병과 지휘통제실에서 작전을 지원한 모든 인원의 노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임무에도 단 한 건의 결함 없이 항공기를 정비해 준 정비팀, 연기 속에서도 정확한 투하시점을 유도해 준 항공정비사와 항공정비병들의 눈과 귀가 있었기에 화마의 기세를 꺾을 수 있었습니다. 대형 헬기이기에 더 큰 책임감이 따랐지만, 그만큼 압도적인 진화 효율을 보일 때마다 우리는 시누크 부대원으로서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임무 종료 다음 날 기지로 복귀하며 내려다본 산은 전날의 참혹했던 잿빛 풍경이 아니었습니다. 어느덧 비는 눈으로 바뀌어 온 세상을 하얗고 포근하게 덮고 있었습니다. 하얗게 변한 산하를 바라보며 느낀 경외감은 군 생활 중 가장 잊지 못할 순간으로 남을 것입니다.
참모로서 상황을 통제하던 경험은 현장에서의 냉철한 판단력의 밑거름이 됐고, 현장에서 흘린 땀방울은 지휘관으로서 뜨거운 사명감을 일깨워 줬습니다. 잿빛 연기를 뚫고 지켜 낸 그 농장에 하얀 눈으로 덮인 평화가 오래도록 유지되길 바라며, 어떠한 재난 앞에서도 국민의 든든한 방패가 되도록 늘 준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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