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교양 정덕현의 페르소나

이토록 공감 가는 찌질함…세상에 없던 ‘뉴 교환’

입력 2026. 04. 29   16:25
업데이트 2026. 04. 29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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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현의 페르소나
무가치함과 싸우는 청춘들의 초상 ‘모자무싸’의 구교환 페르소나가 보여 주는 진정한 가치

열등감·자괴감 기꺼이 드러내는 인물
현실선 ‘진상’으로 치부될 모습이지만
섬세한 연기로 오히려 쾌감 느끼게 해
강렬한 인상 남긴 그만의 필모그래피
빠른 성과 재촉하는 현대사회 속에서
나만의 속도로 걸어도 괜찮다는 증명


“잘나서 나를 증명할 수 없을 땐 철저히 망가져서라도 나를 증명하겠다!” JTBC 토·일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모자무싸)’에서 황동만(구교환 분)은 어린이보호구역을 질주하며 그렇게 속으로 외친다. 자못 비장한 그의 전속력 질주는 도로의 과속 경고 속도계에 고작 ‘22㎞/h’로 찍힌다. 그 숫자는 황동만이란 청춘이 가진 뼈아픈 현실을 담아낸다.

온몸을 던져 달릴 수 있는 지극히 물리적이고 인간적인 신체적 한계의 속도. 아무리 죽을힘을 다해 피를 토할 듯 노력해도 ‘100㎞/h’로 달려 나가는 스포츠카처럼 사회가 요구하는 ‘초고속 성공’이나 ‘가시적인 압도적 성과’ 기준에는 미치지 못하는 청춘의 아픈 현실이 거기 담겨 있다. 세상의 잣대, 혹은 성공한 지인들의 압도적 속도에 비하면 ‘22㎞/h’는 멈춰 있는 것처럼 터무니없이 느린 속도다. 황동만 개인에게 그 속도는 삶의 전부를 건 전력 질주다. 이 장면은 개인의 노력 부족만을 탓하며 채찍질하는 성과주의 사회의 잔혹함을 꼬집으며 지금 눈에 보이는 속도가 느리고 초라하다고 청춘들이 치열하게 달리지 않고 있는 건 아니라는 묵직한 메시지를 던진다.

‘모자무싸’에서 구교환이 연기한 황동만이란 인물은 20년째 영화감독 데뷔를 꿈꾸는 지망생이다. 그의 주변은 온통 눈부신 성취를 이룬 자들뿐이다. 이 잘난 지인들 사이에서 완벽하게 뒤처진 채 제자리걸음을 하는 황동만이 느끼는 감정은 순수한 축하나 동경이 아니다. 시기와 질투, 열등감으로 점철된 지독한 자괴감이다. 하지만 황동만은 방구석에 숨어 침묵하며 세상을 저주하는 전형적인 패배자가 아니다. 그는 자신의 무가치함을 타인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혹은 그 공포에 스스로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장광설을 늘어놓으며 세상과 맹렬히 충돌한다.
 
외부 시선으로 보면 황동만은 남 잘되는 걸 못 보고, 남 안 되는 거에 너무나 즐거워하는 ‘찌질한 인물’처럼 보인다. 1000만 관객을 동원한 박경세 감독(오정세 분)의 영화를 보고 시사회 뒤풀이에서 “한 신도 건질 게 없다”며 축하자리에서조차 찬물을 끼얹은 말을 늘어놓는다. 그런 행동은 사실 극도의 불안과 존재적 소멸을 가리기 위한 처절한 생존투쟁이자 방어기제다. 가만히 있으면 자신의 존재 자체가 지워질 것 같은 불안감에 그는 끊임없이 듣지 않는 장광설을 늘어놓고, 뾰족한 말을 쏟아 낸다. 홀로 뒷산에 올라 아무도 불러 주지 않는 자신의 이름을 목청껏 외친다. 그렇게라도 해야 최소한의 존재 증명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건 세상에서 영원히 지워질 듯한 공포에 대한 원초적인 저항이다.

아마도 이런 인물은 현실에서 마주치면 불쾌감을 유발할 영락없는 ‘진상’ 캐릭터였을 게다. 그러나 황동만은 밉게만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는 구교환의 섬세한 연기 조율이 한몫을 차지한다. 구교환은 날이 잔뜩 선 듯한 캐릭터의 외면과 그 속에 감춰진 툭 치면 부서질 듯한 유약한 내면을 매끄럽게 연결한다. 극 중 동만이 내뱉는 “내 인생이 왜 네 마음에 들어야 하는데요?” 같은 거친 일갈이 통쾌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다. 이는 작위적 대사가 아닌 타인의 잣대로만 평가받는 성과주의 사회 부조리를 향한 통쾌한 반기이자 그의 비루한 삶에서 응축돼 자연스럽게 우러 나온 외침이어서다.

인물의 처절한 방황을 무겁고 우울한 자기 연민의 늪에 가둬 두는 대신 존재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매 순간 숨 가쁘게 발버둥 치는 팔딱거리는 ‘생명력’으로 치환해 낸 것은 온전히 구교환이란 대체 불가능한 배우가 만든 성취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모자무싸’가 그리는 ‘무가치함(무가치하다고 평가하는 사회에 의해 규정되는)’과의 대결의식은 구교환이란 배우의 연기 필모와도 맞닿아 있다. 구교환은 지금껏 평범한 인물을 평이하게 연기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필모를 쌓아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2006년 연극으로 데뷔한 그는 ‘아이들’ ‘거북이들’ ‘왜 독립영화 감독들은 DVD를 주지 않는가?’ ‘오늘 영화’ ‘플라이 투 더 스카이’ ‘우리 손자 베스트’ 등 다양한 작품으로 커리어를 쌓으며 ‘독립영화계의 아이돌’로 불리기도 했다.

2016년 KBS 단막극 ‘아득히 먼 춤’에서 돌연 자살한 연극연출가 신파랑 역할로 여운 있는 연기력을 보여 준 그는 2017년 영화 ‘꿈의 제인’에서는 트랜스젠더 제인 역할로 부산국제영화제 올해의 배우상, 백상예술대상 남자신인연기상을 받기도 했다. 백수 남자친구(메기), 무자비한 빌런(반도), 자기 신념이 투철한 북한대사관 참사관(모가디슈), 대중에게 확고한 인상을 심어 준 ‘D.P.’에서의 능글능글한 조장 역할과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어린이 해방군 총사령관 방구뽕 등등 그가 맡은 역할은 늘 주변부 인물에 가까웠다. 그 주변부에서도 확고한 자신만의 개성 있는 연기로 가치를 증명해 온 것이 바로 구교환의 연기 역정이다.

비주류라는 구분은 어찌 보면 주류를 세움으로써 생겨난 것일 수 있다. 따라서 주류가 자신의 가치를 내세울 때 비주류는 무가치한 것처럼 지워지기도 한다. 하지만 비주류로 분류됐다고 그 자체가 무가치하다고 평가받는 게 과연 온당한 일일까. ‘모자무싸’의 구교환이 보여 주는 것처럼 잘못된 건 개인이 아니라 주류와 비주류를 구분하는 세상이다. 이러한 구분을 넘어 저마다 가진 가치를 드러내고 바라봐 주는 것. 지금 우리가 구교환이라는 배우의 페르소나에 공감하고 응원하게 되는 마음이 거기서 비롯된다. 사진=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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