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조명탄

초연결의 시대, 다시 대화를 배우다

입력 2026. 04. 27   15:30
업데이트 2026. 04. 27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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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물망처럼 얽힌 관계의 과잉 속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고립된 섬이 돼 간다. 손안의 작은 기기 하나로 언제든 누구와도 이어질 수 있고, 메시지 한 줄이면 안부를 전할 수 있다. 이렇게 모든 게 촘촘히 연결된 시대를 ‘초연결 시대’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더 자주 연결되면서도 더 깊이 만나지는 못한다. 통화보다 문자가, 대면보다 메신저가, 긴 대화보다 짧은 답장이 더 편하기 때문이다.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당신의 (역)진화-얼굴, 음성 그리고 문자’에서 우리가 ‘얼굴’에서 ‘음성’으로, 다시 ‘문자’로 옮겨 왔다고 말했다. 기억에 오래 남는 통찰이다. 우리는 표정을 읽고 목소리의 결을 느끼며 대화하는 수고를 조금씩 덜어 내며 살아왔다. 디지털 소통은 빠르고 효율적이지만, 속도가 생략한 행간에는 상대의 눈빛과 호흡이라는 핵심이 빠져 있다. 그래서 중요한 말일수록 결국 이렇게 말하게 된다. “만나서 이야기하자.”

현장에서 학생들을 오래 만나며 절실히 느낀 교훈이 있다. 이제 학교는 지식을 가르치는 곳을 넘어 대화하는 법을 알려 줘야 하는 곳이 됐다는 점이다. 요즘 학생들은 말이 없는 세대가 아니다. 오히려 더 많은 말과 글 속에서 살아가지만 상대의 눈을 보고 끝까지 듣는 일, 자기 생각을 정확하면서도 따뜻하게 전하는 일, 오해를 대화로 풀어내는 일에는 서툴다. 그래서 늘 강조한다. 잘 말하는 사람보다 잘 듣는 사람이 먼저 돼야 한다고.

‘대화’라는 어휘의 ‘대(對)’를 떠올려 본다. 흔히 이 글자는 누군가를 마주하기 위해 불을 밝힌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풀이된다. 어둠 속에서 상대의 얼굴을 제대로 보기 위해 불을 드는 모습, 바로 그 정성과 수고가 ‘대(대하다)’의 뜻이 됐다고 한다. 대화란 단순히 말을 주고받는 일이 아니라 타인의 마음을 제대로 보기 위해 먼저 불을 밝히는 일이다. 귀찮고 피곤하더라도 외면하지 않고, 침묵과 오해 대신 마주 앉기를 선택하는 일이다.

때로 오해는 짐작에서 시작되고, 이해는 질문에서 시작된다. 사람 사이의 갈등은 대개 사실보다 짐작이 먼저 앞설 때 커진다. “저 사람은 원래 저래”라고 단정하는 순간 대화의 문은 닫힌다. “내가 잘못 이해한 걸 수도 있는데, 네 뜻은 이런 거였어?” “무슨 의미인지 말해 줄래?”라고 묻는 순간 닫혀 있던 마음은 조금씩 열린다. 좋은 대화는 말을 많이 하는 데서 시작되지 않는다. 끝까지 듣고, 함부로 단정하지 않고, 짧고 분명하나 따뜻하게 말하는 데서 시작된다.

여기서 듣는다는 것은 가만히 입을 다무는 일이 아니다. 경청은 내 세계의 일부를 비워 타인이 들어올 자리를 만드는 적극적인 환대다. 좋은 대화에는 건강한 침묵도 섞여 있다. 그 침묵은 어색함이 아니라 상대의 진심이 내 안에서 천천히 소화될 시간을 기다려 주는 배려다.

대화의 결핍은 비단 교실만의 풍경이 아니다. 낯선 이들이 모여 하나의 운명을 공유하는 군 공동체에서도 다르지 않다. 함께 생활하고 버텨 내야 하는 공간에서는 작은 말 한마디가 큰 위로가 되기도 하고 오래 남는 상처가 되기도 한다. 신뢰는 결국 대화에서 생긴다.

힘들던 날 조용히 건네받은 한마디, 끝까지 이야기를 들어주던 한 사람의 표정, 아무 말없이 곁을 지켜 주던 따뜻한 침묵…. 우리가 나누는 대화는 단순한 말의 교환이 아니다. 누군가의 하루를 견디게 하고, 어떤 사람의 마음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작은 불빛이다.

강용철 경희여중 국어교사 EBS 강사
강용철 경희여중 국어교사 EBS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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