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 스타를 만나다
살리는 음악, 다그치지 않는 위로…악뮤 ‘개화’
|
“그날 모두가 위로하러 와 준 건 슬픔 때문이었어.” 인간의 감정을 캐릭터로 다룬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서 늘 행복하고 밝은 방향으로 주인공을 이끌고자 하는 기쁨이는 망각의 영역으로 쫓겨나고 나서야 거추장스럽다고 여겼던 슬픔의 감정을 이해한다. 기쁨이 슬픔을 밀어내지 않고 끌어안을 때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하던 주인공도 가족의 품으로 돌아와 정서적 성장을 이룬다.
7년 만의 정규앨범 ‘개화’로 돌아온 악뮤(AKMU)의 타이틀곡은 한국어 노랫말로 이 감정을 새롭게 매듭짓는다. “기쁨 뒤에 슬픔이 오는 건 아름다운 마음이야.” 빛바랜 피아노 연주가 주도하는 바로크 팝곡 ‘기쁨, 슬픔, 아름다운 마음’ 위에서 서로의 목소리를 겹쳐 가는 이찬혁과 이수현 남매는 웃음과 조화로운 눈물의 교차로를 향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발자국을 내딛고 있다. 밀물처럼 밀려들었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유행, 십몇 초 사이 시선을 잡아끌고 홀연히 사라지는 도파민의 시대에 수려한 이 곡은 한 달 내내 차트 정상을 지키고 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1위를 나눠 가지는 노래 또한 앨범의 선공개곡 ‘소문의 낙원’이다. 번잡한 도시를 떠나 미디어의 설왕설래에 귀 닫으며 유토피아를 향해 걸어가는 이 곡은 앨범 발표 전 산티아고 순례길로 향했던 남매의 자전적 서사를 담고 있다.
악뮤의 음악 무게추는 ‘악동’이란 이름을 뗐던 2019년 이전부터 옮겨 가고 있었다.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주목받은 재기발랄한 표현과 독특한 시선을 감각적인 멜로디에 실어 보냈던 신동의 거침없는 호기심이 점차 창작가의 야심으로 커지던 시기였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의 언급으로 최근 다시 차트에서 역주행하는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 널 사랑하는 거지’가 수록된 앨범 ‘항해’부터 ‘200%’ ‘기브 러브(Give Love)’ ‘사람들이 움직이는 게’와 같은 악뮤는 아니었다. 잔잔한 포크와 컨트리음악으로 풀어내는 성장, 어른의 세계로 떠나가는 젊은 마음을 서정적으로 노래하는 음악은 분명 더 무겁고 진중한 항로로 노를 저어 나가고 있었다.
여기엔 독특해야 한다는 명제로부터 독보적 창작가로 존재하고 싶었던 찬혁의 발현이 크게 작용했다. 아이유, 잔나비, 이선희와 같은 음악가들과 함께했던 실험적인 작품 ‘넥스트 에피소드’에서 ‘낙하’를 천명한 그는 솔로 프로젝트 ‘에러’에서 스스로 교통사고를 당한 자아를 연기하며 자기 미학을 끝까지 밀어붙였다. 찬혁은 죽음, 실패와 같은 주제도 자기 의지로 선택한 것이라면 작품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당당한 자신감을 토대로 모든 관습을 거부해 왔다. 경전처럼 여겼을 팝의 여러 레퍼런스를 토대로 대중이 기대하는 ‘악동뮤지션다움’이나 솔로에 익히 기대하는 뻔한 행보를 배제했다. 한국대중음악상 3관왕에 빛나는 지난해의 두 번째 정규앨범 ‘에로스’와 ‘멸종위기사랑’의 대주제 역시 소멸을 향해 자신을 밀어 넣는 과정에서 느끼는 절박한 회복과 구원이었다.
반대로 악뮤의 음악은 살리는 음악이 돼야 했다. 창작 열기에 불타오르던 오빠와 달리 수현은 가볍게 부를 수 있는 노래를 원했다. 남매의 부친 이성근 선교사의 회고에 의하면 찬혁이 솔로에서 하고 싶은 것을 다 풀어내고 나서야 슬럼프에 빠진 동생이 시야에 들어왔다고 한다. 그렇게 만든 곡이 남매의 매력을 재치 있게 풀어낸 ‘러브 리(Love Lee)’였고, 회복의 서사를 넓혀 만든 작품이 이번 앨범 ‘개화’다. 앨범 발매 전 인터뷰와 방송 출연을 통해 찬혁의 입대 후 3년간의 긴 슬럼프와 번아웃으로 고통받았던 수현의 서사가 알려졌고, 자연히 앨범이 그토록 살리고자 하는 이가 누구인지를 대중이 인지하게 됐다. 유튜브에 공개된 남매의 앨범 관련 콘텐츠는 치열한 작업기가 아니라 회복일지에 가깝다.
평온한 회복과 소중한 생명을 노래하는 ‘개화’에는 어떤 강박도 없다. 우선 12년간 몸담았던 YG엔터테인먼트를 떠나 자체 레이블 ‘영감의 샘터’에서 발표한 첫 작품이다. 찬혁이 모든 노래의 가사를 쓰고 멜로디를 붙였으며, 정규앨범으로는 처음으로 전곡 편곡까지 관여했다. 그럼에도 앨범에서 찬혁의 목소리는 두드러지지 않는다. 솔로 프로젝트에서 풀어내다 못해 토해 냈던 그의 자아는 동생의 목소리를 아름답게 꾸미고, 힘들 때 손을 맞잡아 주는 역할에 충분함을 느끼고 있다. 그가 주역으로 등장하는 ‘어린 부부’나 ‘난민들의 축제’에서도 빛나는 지점은 빽빽한 창작의 고뇌보다 캠프파이어에서 노래하듯이 유려한 창작의 자세다. 작가관을 확립한 창작가가 앨범 주도권을 누구에게 줘야 할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는 증거다.
앨범의 주인공은 수현이다. 나긋나긋한 목소리 가운데 연약한 자아의 흉터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소문의 낙원’과 ‘봄 색깔’에서 정신적으로 성숙한 자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악뮤의 음악적 기틀을 잡는 천진한 정서를 의도적으로 거칠게 녹음한 ‘텐트(Tent)’와 브라스 세션으로 오묘한 감정을 전하는 ‘우아한 아침 식사’도 매력적이다. 데뷔 때부터 수현이 좋은 보컬이었음은 자명했다. 시련을 극복해 나가며 그 목소리가 더욱 깊어졌다.
앨범의 주 장르인 컨트리, 블루그래스, 포크도 회복의 정서를 담는 좋은 그릇이다. ‘항해’의 차분한 기조를 이어 가면서 보다 발랄하고 경쾌한 터치가 두드러진다. 동시에 한국에선 해당 장르가 매우 낯설지만, 그 어떤 음악 장르보다 통속적이고 직관적인 선율을 전달하는 의외의 매력으로 악뮤의 가치인 낯섦을 확보한다. 현재 미국에서 낡은 음악처럼 여겨지던 컨트리를 Z세대가 그들의 언어로 재해석해 다시금 활력을 불어넣고 있는 것처럼 악뮤도 테일러 스위프트와 노아 카한, 잭 브라이언이 걸었던 길을 따라 자기 회복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우울과 공황을 통과한 동생, 그 옆에서 묵묵히 함께 걸어 줬던 오빠. ‘개화’는 그 누구도 다그치지 않는다. 강하게 넘어서거나 뾰족하게 솟구치지도 않는다. 견뎌 낸 시간만큼 더욱 단단해진다는 믿음으로 손에 손잡고 함께 노래하자고 격려할 뿐이다. 위로조차 상품화되는 시대에 첨가물 없이 건강한 음악은 언제나 반갑다. 얼룩진 기억조차도 돌아보면 얼마나 기쁜 일이었는지.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
이 기사를 스크랩 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