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 그들이 온다
호주 법원의 ‘부부 스파이 사건’ 판결
“국가안보가 정의 실현보다 중요”
러시아 부부 스파이 ‘비공개’ 재판
증거는 10년간 비밀 유지 명령
英 법원도 “개인 명예보다 중요” 판결
美, 스파이 사건 별도 법원·절차 운용
군사정보 접근 가능 내부자 위험성
가장 현실적인 위협 확인 계기
호주 법원, 스파이 증거 비공개 결정
호주 브리즈번 법원은 지난 13일 “국가안보가 재판 공개를 통한 정의의 실현보다 중요하다”며 러시아로 군사기밀을 넘기려던 혐의로 기소된 부부 스파이 사건의 증거들을 공개하지 말고 10년간 비밀로 유지하라고 명령했다. 호주 국방부와 연방 경찰이 스파이 혐의를 밝히는 데 활용한 194건의 문서, 국방부·경찰 관계자의 증언 및 신원을 공개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한 것을 법원이 받아들인 것이다. 정보가 공개될 경우 호주와 우방국의 국방 역량, 정보통신 보안 체계, 동맹국이 제공한 정보가 손상될 수 있다는 이유였다. 결심 공판도 비공개 법정에서 진행될 것이라고 한다. 법정에서조차 공개할 수 없는 정보가 오갔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사건의 심각성을 말해준다. 그만큼 민감한 군사 정보들이 러시아로 넘어갈 뻔했다는 얘기다.
호주군 정보시스템 기술자(사병) 키라 코롤레프(42)와 자영업자인 그녀의 남편 이고르 코롤레프(64)는 러시아 태생으로 각각 2016년과 2020년 호주 국적을 취득했다. 방첩 당국 발표에 따르면 아내 키라는 2023년 장기 휴가 중 사전에 신고하지 않은 채 러시아로 출국했고, 브리즈번 자택에 남아 있던 남편에게 자신의 군 업무 계정 접속 방법을 알려줬다. 남편 이고르는 집에서 해당 계정에 여러 차례 접속해 자료를 찾은 뒤 아내에게 개인 이메일로 전달했다. 호주보안정보국(ASIO)과 연방경찰(AFP)은 공동수사를 통해 2024년 7월 두 사람을 체포하고 전자기기 12대를 압수했다.
방첩 당국은 이들이 입수한 정보를 러시아 정보기관에 넘긴 사실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그럴 의도가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간첩 행위 준비(preparing for an espionage offence)’ 혐의로 기소됐다. 이는 2018년 개정된 간첩법이 적용된 첫 번째 사례다. 개정법은 실제 기밀이 전달되지 않았어도 계획·준비·사전 행동·포섭 시도만으로 처벌할 수 있도록 했다. 간첩 행위는 실제 발생 후 처벌하는 것보다 사전 예방과 조기 차단 체계를 갖추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최고형량은 징역 15년이다. 호주는 간첩법 개정을 통해 외국의 영향력 행사를 차단하기 위해 외국의 대리인으로 은밀하게 활동하거나 허위 정보를 유포하는 행위를 처벌하고 외국을 위한 산업스파이를 간첩 행위에 포함하는 등 방첩 체계를 대폭 강화했다.
러시아 태생 호주인 부부의 정체
키라는 호주로 이주한 지 15년이나 됐다. 하지만 주민들에 따르면 이들 부부는 외부인과의 접촉이 거의 없었다. 언론이 추적한 디지털 흔적에서도 호주 내 러시아 이주민과 교류하는 것 외에 특별한 사회 활동은 없었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호주의 여러 곳을 여행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키라는 군사작전에 필요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정보시스템에 접근할 수 있는 기술자로 스파이로서는 가장 적합한 신분이라고 할 수 있다. 2013년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비밀 감청 시스템과 관련된 1급 기밀 자료들을 폭로해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뒤 러시아로 망명한 에드워드 스노든도 NSA의 정보시스템 관리자였다. 이번 사건이 호주에 정착한 러시아 일리걸(Illegal·제3국 국적으로 위장한 스파이)의 호주 국방부 침투 사건인지, 단순히 군 내부자가 러시아에 포섭돼 스파이 행위를 한 것인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이크 버제스 ASIO 국장은 “국방부가 비밀취급 인가를 위해 신원조사를 하지만 그때 한 번으로 보안 조사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며 이번 사건을 ‘국방부의 보안 성공 사례’라고 규정했다.
그렇다면 호주 방첩 당국은 어떻게 이들의 정보 유출을 찾아냈을까? 대개 스파이 사건의 적발 경위는 방첩 활동 기법의 노출을 꺼려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추정해 볼 수는 있다. 내부자 위협은 갑자기 발생하지 않고 사전에 작은 이상징후들이 나타나기 마련이라 내부 보안 체계를 잘 운용한다면 탐지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첫째, 비정상 로그인이다. 심야·휴일 접속, 낯선 기기 로그인, 해외 체류 중 계정 사용은 대표적인 경고 신호다. 둘째, 업무와 무관한 자료 열람이다. 자신의 업무와 관련 없는 문서를 반복 조회하거나 다른 부서 자료를 찾는 행동이다. 셋째, 대량 복사·다운로드다. USB 사용 급증, 개인 이메일 전송, 클라우드 업로드 시도는 반드시 점검해야 한다. 넷째, 설명되지 않는 외부 접촉이다. 정체불명의 외국인과 잦은 연락, 과도한 SNS 비밀 대화, 비공식 해외 접촉 등이 해당된다. 다섯째, 심리적 변화다. 조직에 대한 불만, 피해의식, 금전 압박, 생활 수준 급변은 위험 신호다. 물론 이런 징후 하나만으로 단정해선 안 되지만 여러 신호가 반복·연결될 때는 즉시 점검해야 한다. 이번 사건의 경우는 이들 징후 대부분에 해당해 내부 보안 체계가 잘 갖춰져 있었다면 충분히 감지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방첩은 사람을 의심하는 일이 아니라 위험 징후를 관리하는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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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 사건 특별 사법절차 필요
이번 사건의 교훈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내부자 위협(Insider Threat)’이다. 스파이 사건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은 영화 속 암호문, 비밀 접선, 잠입 공작을 떠올린다. 그러나 오늘날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가장 현실적인 위험은 외부 침투보다 조직 내부에 이미 들어와 있는 사람이다. 정상 권한을 가진 내부자에 대한 신뢰가 무기화되는 것이다. 내부 보안 시스템에 대해서도 잘 알고, 정당한 정보 접근권한도 가지고 있다. 내부자 위협이 무서운 이유다. 내부자 위협은 군, 경찰, 정보기관, 방산업체, 공공기관 어디에서나 발생할 수 있다. 특히 군 조직은 무기체계, 작전계획, 통신망, 인사정보 등 국방의 핵심 자산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표적이 되기 쉽다. 적은 국경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또 하나의 교훈은 스파이 사건에 대한 특별 사법 절차의 필요성이다. 이번 사건에서 재판의 비공개와 증거물 비밀 유지를 결정한 호주 법원의 입장은 형식적인 정의의 실현보다 실질적인 국가안보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잘 보여준 사례다. 국민의 공개 재판을 받을 권리는 인권 보장과 사법 정의 실현에 매우 중요하지만 이런 민주주의 시스템 자체를 지켜내는 국가안보는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2024년 12월 영국 특별법원도 “국가안보는 개인의 명예보다 중요하다”며 방첩기관 MI5의 신원 공개로 명예가 훼손됐다며 소송을 제기한 의회 로비스트 크리스틴 리의 주장을 기각했다. 리는 중국 통일전선부의 자금으로 영국 국회의원들을 대상으로 친중국 활동을 하다가 적발된 인물이었다. 미국은 외국정보활동감시법(Foreign Intelligence Surveillance Act)에 따라 스파이 사건을 다루는 별도 법원(FISA Court)을 두고, 재판의 비공개뿐 아니라 비밀 수색영장 발부 등 특별 사법 절차를 두고 있다. 이는 지난달 73년 만에 ‘적국’뿐만 아니라 ‘외국’의 정보활동에 대해서도 간첩죄를 인정하는 형법 개정을 이뤄낸 우리나라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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