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4월 23일이면 독서의 즐거움을 나누고 창작자의 권리를 존중하자는 취지의 행사가 전국에서 열린다. 유네스코가 제정한 ‘세계 책과 저작권의 날’이기 때문이다. 내가 운영하는 책방에서도 이날을 맞아 시인 초청행사를 여는 한편 ‘시대의 거울, 우리 잡지 창간호 100선’ 특별전을 시작했다. 하지만 세상이 온통 인터넷 속으로 빨려 들어간 요즘엔 잡지다운 잡지를 만나기가 어려워졌다. 그래서일까. 이맘때면 떠오르는 잡지가 있다.
한창기(韓彰琪·1937~1997)라는 인물이 1976년 3월 토박이 민중문화를 위해 창간한 월간 종합교양지 『뿌리깊은 나무』와 1984년 11월 여성 독자를 위한 고급 교양지를 표방하며 창간한 『샘이깊은물』이다. 『뿌리깊은 나무』 창간사에서 발행인은 “역사의 물줄기에 휘말려 들지 않고 도랑을 파기도 하고 보를 막기도 해서 그 흐름에 조금이라도 새로움을 주는 창조의 일을 문화 쪽에서 거들겠다”고 잡지의 나아갈 길을 밝히고 있다. 전통의 규범문화에 치이고, 외래 상업문화에 밀린 토박이 민중문화에 물길을 터 주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거들기 위함이었던 것. 하지만 1980년 8월호(통권 53호)를 끝으로 신군부에 의해 사회 정화라는 명목으로 폐간되고 말았다.
『뿌리깊은 나무』는 우리 잡지 최초로 기사 내용이나 제목으로 가득 채웠던 잡지 표지디자인의 관행을 깨고 제호와 사진만으로 표지를 만들었다. 창간호 표지엔 쌀을 한 움큼 쥐고 있는 농부의 거친 두 손을 클로즈업한 사진을 싣고 속표지에 ‘거칠어질 대로 거칠어진 손’이라는 사진 제목을 적어 놨다. 이 사진은 ‘농부’와 ‘쌀’이라는 2개의 이미지로 민중의 생명력, 이 땅에서의 삶의 가치, 전통의 중요성과 같은 메시지를 상징적으로 보여 줬다. 컬러사진이지만 갈색 톤으로 흑백사진 분위기를 띠고 있다. 이처럼 『뿌리깊은 나무』는 창간호 표지부터 독자들에게 시각적인 충격을 선사했다. 편집진은 쉽고도 수준 높은 글, 민중에게 ‘지식의 열등감’을 주지 않고 ‘앎의 즐거움’을 주는 글들을 싣기 위해 노력했다. 또 사진작가를 기자로 활용한 최초의 잡지였다.
요새는 신문이든, 잡지든, 단행본이든 한글 전용이 아닌 게 없지만 1976년 3월 이 잡지가 나오기 전까지는 아이들을 위한 책이 아니면 한글 전용은 없었다. 신문도, 여성지도 모두 국한문 혼용이었다. 이 한글 전용잡지가 세상에 처음 나왔을 때 세상은 비웃었다. 용기는 갸륵하지만 곧 추락할 것으로 내다봤다. 예상은 빗나갔다. 이 잡지의 뒤를 이어 한국의 모든 잡지가 한글 전용으로 바뀌었고, 신문도 두세 해 시차를 두고 한글 전용으로 갈아탔다. 이처럼 『뿌리깊은 나무』는 1970년대의 정신사적 변혁운동의 주역이면서 문화사적 변혁운동의 주인공이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뿌리깊은 나무』가 신군부에 의해 강제로 폐간됐지만, 발행인 한창기와 편집진은 와신상담 끝에 1984년 11월 『샘이깊은물』을 창간했다. 잡지는 ‘가정’과 ‘여성’을 중심축에 놓고, 여성을 둘러싼 다양한 이슈와 현상을 심도 있게 다뤘다. 표지에는 1980년대 일반 여성을 등장시킴으로써 주체적 여성상에 대한 표상으로서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창간호를 들추면 작가 박완서, 화가 천경자 같은 이의 글을 만나게 된다. 본문 속으로 들어가면 김수환 추기경의 ‘어머니, 우리 어머니!’라는 뭉클한 글이 실렸는데, 지금 읽어 봐도 가슴이 미어진다. 여성지를 표방했으되 남성들이 반드시 같이 읽어야 할 교양지가 바로 『샘이깊은물』이었음을 추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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