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교양 연·뮤·클 이야기

가장 섬뜩한 복수는 기억으로 완성된다

입력 2026. 04. 14   16:34
업데이트 2026. 04. 14   16:38
0 댓글

백 투 더 스테이지
연극 ‘말벌’

 


모처럼 손에 힘이 꾸욱 들어갔다. 주먹을 꼭 쥔 채 90분을 버틴 연극, ‘말벌(WASP)’이다.

무대엔 단 두 명. 그런데 체감은 둘이 아니다. 감정이 페이스트리처럼 여러 겹으로 겹쳐 동시에 들이받는 느낌이다. 이 작품은 여성 2인극이 보여줄 수 있는 재미를 착즙기로 끝까지 짜낸 뒤 남김없이 무대 위에 쏟아낸다.

헤더와 카알라의 관계는 저울추처럼 오르내린다. 그런데 이 저울, 점점 속도가 붙는다. 초반에는 천천히 기울다가 후반으로 갈수록 롤러코스터처럼 흔들린다. 균형을 잡는 게 아니라 아예 균형이라는 개념이 사라진다. 보는 쪽도 같이 휘청인다.

이야기의 시작은 단순하다. 20년 만에 카페에서 재회한 고교 동창. 어색한 인사, 불편한 공기 그리고 점점 드러나는 온도 차이. 겉모습부터 대비가 선명하다. 단정한 트렌치코트에 고급스러운 말투의 헤더, 다리에 딱 붙는 청바지를 입고 쩍 벌린 채 짜증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는 카알라. 이 대비만으로도 공기가 매워진다. 그러다 한 방. “남편을 죽여줘.” 헤더의 한마디에 극이 핸들을 꺾고는 가속페달을 밟는다.

여기까지만 보면 자극적인 설정의 복수극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렇게 단순하게 소비될 이야기가 아니다. 학창 시절의 폭력, 씻기지 않는 기억, 계급의 간극이 얽히면서 이야기는 점점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든다. 총은 없다. 대신 말이 날아다닌다. 그런데 이게 더 고통스럽다.

‘말벌’이라는 제목은 이 작품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다. 공격성과 독성을 지닌 곤충, 그리고 타란툴라의 몸속에 알을 낳는 기생 말벌. 이 섬뜩한 생태가 그대로 인물 관계로 옮겨온다. 10대 시절, 카알라 앞에서 또래들에게 성폭행당했던 헤더는 그 기억을 몸속 어딘가에 묻어둔 채 살아간다. 잊은 게 아니다. 그냥 꺼내지 않았을 뿐이다. 말벌의 알처럼, 안에서 조용히 자라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다. 알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형태를 갖춘다. 후반으로 갈수록 헤더의 얼굴은 점점 달라진다. 균열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인물을 보여준다. 냉정하고 계산적인데, 사이코패스를 연상시키는 순간도 있다.

가장 설득력 있는 거짓은 진실이 섞인 거짓이다. 헤더가 설계한 계획 역시 그렇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가 조작인지 경계가 흐릿해진다. 관객의 판단도 흔들린다.


이 작품의 큰 재미 중 하나는 관계의 뒤집힘이다. 과거에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분명했다. 현재는 사회적 계급이 바뀌었다. 권력이 뒤집힌다. 극이 진행되면서 또 뒤집힌다. 이 반복이 쌓이면서 관객은 이 작품이 단순한 복수극일 수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결정적인 순간에 단 하나의 단어가 상징처럼 등장한다. “굿걸.” 성폭행당한 헤더의 귓가에 카알라가 악마처럼 속삭였던 말. 그 말이 20년 뒤,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되돌아온다. 가장 잔혹한 복수는 칼이나 총이 아니라 기억과 언어로 완성된다는 걸 보여주는 장면이다. 피부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소름으로 돋아났다.

이쯤에서 질문이 모습을 드러낸다. 헤더와 카알라 중 누가 더 사악한가. 인간의 악은 환경이 만든 결과인가, 아니면 선택의 문제인가. 질문은 존재하지만 걸작이라 불리는 작품이 대부분 그렇듯 ‘말벌’ 역시 친절하게 설명해줄 생각이 없어 보인다. 심지어 생각할 시간을 길게 주지도 않는다. 워낙 극 전개가 빠르고 긴박해서 메시지를 곱씹기 전에 다음 장면이 밀려온다.

이번 공연은 한지은의 ‘헤더’, 정우연의 ‘카알라’로 봤다. 두 배우의 연기는 말 그대로 파바박, 파란 불꽃을 튀긴다. 서로를 밀어붙이고, 끌어당기고, 또 밀어낸다. 이 리듬이 마지막 장면까지 끊기지 않는다. 감정을 순식간에 끌어올렸다가 툭 떨어뜨려 버리는 호흡도 인상적이다.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한지은의 연기에서 연출 이항나가 배우로 무대에 섰을 때의 스타일이 선명하게 드러났다는 점이다. 흥분과 냉정을 오가며 빠르게 쏟아내는 대사, 그 안에서 느껴지는 발성과 호흡의 리듬은 분명 이항나의 것이다. 뮤지컬 무대에서 자주 보게 되는 정우연 역시 거칠고 날 선 에너지로 한지은의 ‘헤더’에 맞선다.

이항나의 연출은 노련하면서도 신선하다. 대부분의 2인극이 그렇듯 무대는 단순하다. 장치도 많지 않다. 대신 점점 안쪽으로 들어간다. 카페에서 시작해 헤더의 집, 결국 인물의 내부까지 파고든다. 배우도 관객도 숨을 데가 없다.

‘말벌’은 복수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기억에 관한 이야기다. 몸속에 들어온 독이 어떻게 사라지지 않고, 어떻게 자라고, 결국 다른 사람에게 옮겨가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상대를 무너뜨리기 위한 선택은 결국 자신을 갉아먹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작품의 복수는 통쾌하지 않다.

‘말벌’은 승자와 패자를 보여주지 않았다. 대신 인간 안에 남아 있는 폭력의 흔적,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또 다른 폭력으로 이어지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래서 이 작품은 끝나도 끝난 느낌이 없다. 질문은 통증처럼 남아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마치 벌에 쏘인 자리처럼. 사진=해븐프로덕션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