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영화 - 더 퍼시픽(The Pacific, 2010)
제작: 스티븐 스필버그·톰 행크스
출연: 조지프 마젤로(유진 슬레지), 제임스 배지 데일(로버트 레키), 존 세다(존 바실론), 라미 말렉(스내푸 셸튼)
미 해병대1사단 태평양전쟁 상륙작전
펠렐리우섬에서 치열한 73일 생존전
3명 실존 인물 따라 참혹한 현장 기록
승리의 환호 대신 마주한 전쟁의 유령
일본군이 쏘아대는 기관총탄들은 거대한 채찍처럼 수면을 마구 갈겼다. 박격포와 대포의 포탄들도 수면에 사정없이 물기둥을 만들어 냈다. 해병대원들이 총탄과 포탄에 픽픽 쓰러졌다. 나는 내가 놓인 어려운 상태를 잠시 잊고 혐오감을 느끼며 신에게 물었다. 왜? 왜? 왜? 『태평양 전쟁』, 유진 B. 슬레지 지음, 열린책들 펴냄
해안에 닿기도 전에 죽는다.
‘전쟁은 그 자체로 미친 짓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전쟁에서 미 해병대1사단으로 참전한 유진 슬레지가 포켓성경 여백에 적어둔 이 문장은 40도가 넘는 습열 속에 썩은 시체 냄새가 가득한 산호 지옥에서 쓰였다.
전선이 선명하게 그어진 유럽의 전쟁과 달리 태평양전쟁은 섬과 섬을 이어가며 싸우는 전쟁이었다. 상륙용 주정(LCVP)에 몸을 싣고 해안선을 향해 돌진하는 동안 일본군 포화가 쏟아지는 그 몇 분…. 태평양전쟁의 가장 잔인한 순간이었다.
게다가 펠렐리우는 부드러운 모래사장이 아니었다. 날카로운 산호초 바닥은 넘어지는 것만으로도 살점이 찢겨 나갔고, 땅을 파고 숨으려 해도 곡괭이가 들어가지 않는 단단한 암반이었다. 병사들은 엄폐할 곳 없는 노출된 평지에서 죽음을 기다려야 했다.
1944년 9월, 팔라우 제도 펠렐리우섬. 미 해병대 1사단은 그런 섬에 상륙을 개시했다. 지휘부는 나흘이면 끝날 것이라고 했다. 73일이 걸렸다. 상륙 첫날부터 일본군의 새로운 방어 교리는 미군을 당황케 했다. 해안선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 이후 내륙 동굴 500여 곳에 숨어든 약 1만 명의 일본군이 상륙한 미군을 산호 능선 사이로 끌어들여 소모전을 벌였다. 전투가 끝났을 때 일본군은 포로 약 200명을 제외하고 전원 전사했으며, 미 해병대 1사단도 전사 1300명에 부상 5400여 명의 피해를 입었다. 작은 섬 하나였다.
그 섬에 유진 슬레지가 있었다. 미국 앨라배마 의사 집안 출신인 스무 살 청년, 어릴 때 앓은 병 때문에 입대가 거듭 미뤄져 친구들이 다 전쟁터로 떠나는데 자신만 남겨질까 봐 조바심을 내며 해병대에 지원한 청년이었다. 그는 펠렐리우에서 보고 겪은 것들을 기록했다. 전우의 시신 위로 내리는 빗물, 부패한 살냄새, 일본군 병사의 금니를 뽑아가는 동료,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 36년 뒤 그 메모들이 책이 됐다. 『태평양전쟁(With the Old Breed)』(1981). 이후 HBO 드라마 ‘더 퍼시픽’(2010)의 원작이 됐고,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로 재조명됐다.
|
‘밴드 오브 브라더스’가 빛이라면 ‘더 퍼시픽’은 어둠이다
‘더 퍼시픽’은 스티븐 스필버그와 톰 행크스가 ‘밴드 오브 브라더스’(2001)에 이어 두 번째로 만든 2차 세계대전 미니시리즈다. 제작비 2억 달러, 에미상 8개 부문 수상. 스케일은 전작과 같지만 분위기는 전혀 다르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가 동료애와 승리를 중심에 놓는다면 ‘더 퍼시픽’은 전쟁으로 인한 인간정신의 파괴를 다룬다.
카메라는 세 명의 실존 인물을 따라간다. 과달카날전투에서 혼자 38명을 사살하며 의회 명예훈장을 받은 존 바실론(존 세다), 과달카날에서 펠렐리우까지 전투 일선을 누빈 로버트 레키(제임스 배지 데일), 그리고 유진 슬레지(조지프 마젤로). 세 사람의 궤적은 교차하면서 태평양전쟁의 전체 지형을 그린다. 과달카날, 펠렐리우, 이오지마, 오키나와.
드라마가 가장 공들이는 것은 슬레지의 내면이다. 입대 전날 밤의 설렘, 펠렐리우 해변에 첫발을 딛는 순간의 공포, 오키나와의 진흙과 시체 속에서 무감각해지는 과정. 라미 말렉이 연기한 셸튼은 이미 인간성을 잃어버린 병사다. 슬레지는 셸튼을 통해 전쟁이 무엇을 앗아가는지를 본다. 그리고 자신도 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들은 단순히 육체적으로 지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사물로 보게 되는 심리적 방어 기제를 작동시킨다. 일본군의 시신에서 금니를 뽑는 행위는 잔인함이기 이전에 적을 인간으로 보지 않아야만 내가 살 수 있다는 처절한 생존 본능의 왜곡이다.
“내 안에 있던 어떤 것이 펠렐리우섬에서 죽고 없어졌다”는 슬레지의 고백이 화면 전체를 관통한다. 앨라배마의 순수했던 청년이 펠렐리우의 산호초 해변과 오키나와의 진흙탕 속에서 무감각한 전사로 변해가는 과정은 승리의 환희 대신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전한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윈터스는 승전국 대륙을 가로지르며 환호 속에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더 퍼시픽’의 슬레지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고향 마을 침대에 누워 밤마다 전쟁의 유령과 마주한다. 전쟁은 끝났지만 그들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음을 드라마는 적막한 카메라 앵글로 보여준다.
해안선, 란체스터 법칙이 통하지 않는 사선(死線)
숫자가 모든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1943년 11월 타라와, 1944년 6월 노르망디. 두 전투의 숫자를 나란히 놓으면 상륙작전의 냉혹한 본질이 드러난다.
타라와 전투에서 미군이 상대한 일본군은 약 4800명(조선인 등 군속 2200명 포함)이었다. 미 해병대는 이 섬을 빼앗기 위해 그 네 배에 달하는 1만8000명을 투입했다. 현대전의 기본 원리인 ‘란체스터 법칙’에 따르면 병력이 4배일 때 전투력은 제곱인 16배가 돼야 한다. 이론적으로는 공격자가 압도적인 화력으로 피해를 최소화하며 압승하는 싸움이어야 했다.
하지만 현실은 법칙을 비웃었다. 미군은 76시간 만에 3166명의 사상자를 냈다. 최종적으로 일본군 수비대가 전멸했기에 전체 수치상으로는 미군 피해가 적어 보이지만, 짧은 시간 좁은 해안에 집중된 ‘피해의 밀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노르망디는 규모만 달랐을 뿐 구조는 같았다. D-데이 당일 연합군 사상자는 1만 명 이상이었다. 특히 오마하 해변에서는 가파른 절벽과 독일군의 강력한 방어 앞에 미군 사상자만 2400명에 달했다.
왜 상륙작전에서는 이 수학적 공식이 무너지는가. 해안선이라는 ‘병목’ 때문이다. 상륙정에서 내리는 순간 공격자는 좁은 해안에 밀집된 채 전방에서 쏟아지는 포화를 정면으로 받는다. 아무리 병력이 많아도 해안에 발을 딛기 전까지는 그 숫자가 전투력이 되지 못한다. 반면 방어자는 미리 구축된 진지에서 기다리면 된다. 타라와에서 일본군은 상륙정을 막기 위한 장애물을 설치하고, 상륙정이 기관총과 포화가 집중되는 좁은 사계 안으로 몰려들도록 방어 구조를 완성해 놓고 있었다. 미 해병들은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간 것이었다.
적 해안에 발을 딛는다는 것. 그것은 군사적 우위조차 무력화되는 인명 피해가 예약된 행위다. 80여 년 전 태평양과 노르망디에서 피로 증명한 잔혹한 등식은 지금도 유효하다.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
이 기사를 스크랩 하시겠습니까?